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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의의 대담
후지사키 쇼 지음, 김은모 옮김 / 엘릭시르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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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에서 티저북을 제공받아 일부나마 읽어보았다.
사실 티저북이라는 형식의 책자를 이번에 처음 받아봐서 신선했다. 티저북이 페이퍼리스 형태로 제공되는 상상을 해본다...

생소한 형식으로 진행된다고 작가가 분명 안내했는데, 첫 페이지를 열자마자 당황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 작가의 안내 문구를 다시 읽고, 재차 본문을 읽기 시작한다. 이제야 좀 머릿속에 인물들의 대화 상황이 그려진다. 인물들이 웃음 뒤에 숨겨둔 비밀은 초장부터 드러나니, 아마 뒷내용에는 비밀 폭로전이 이어지겠지...그나저나...

...이거 혹시 티저북 다음 부분도 계속 대담 형식으로 진행되나? 누구의 음험한 속내가 먼저 드러나고, 누구의 욕망이 성취될지 궁금하다. 살짝 검색해보니 서로 연관된 에피소드들이 나오는 모양이다. 뒷 내용이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하다...

#살의의대담 #후지사키쇼 #엘릭시르 #북클럽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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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브 (반양장) 창비청소년문학 111
단요 지음 / 창비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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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망했어도 사람은 살아야 한다. 지축을 흔들 정도로 큰 일이 있든 없든 우리의 삶은 계속 되어야 한다. 창비 어린이 청소년 서포터즈에서 작가님과 진행한 인터뷰(링크는 이쪽)에서 5번째 질문과 그 답변이 흥미로웠다. 서사에 깊이 빠지는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문구를 굉장히 좋아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일상을 잃은 사람들이 새로운 일상을 만들어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안전하게 즐기기를 좋아한다. 허나 우리가 봤을 때 '망가진 일상'이 이미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개입할 이유가 없다. 잔잔하게 생각해봤을 뿐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좋아하는 입장에서는 깊게 건드린 적 없는 내용이라 약간 반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아주 평범한 일상이기에 선율과 수호의 이야기가 이 망한 세상 속에서 빛난다. 세상이 어떻게 되었든, 사람은 여전히 물과 육지를 오가며 살고 있어서.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서.


어떤 일상을 살아가든, 서로에게 친절하고 다정하게 굴자. <다이브>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기억'이다.

한없이 평범하면서도 다정한 감각이 훌쩍 다가왔다. 지금까지 오간 이야기를 하나로 뭉친 다음 낱말을 걸러 내면 따뜻한 온도만 남는 게 아닐까. 그런 온기는 텅 비었는데도 전체를 담고 있어서, 기나긴 설득보다 더 많은 걸 전해 준다. 그래서.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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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위 책에 수록된 단편소설이랬다. 도서관에 가서 빌리고, 다른 작품을 볼 여력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도서관에 갈 여력을 재는 시점에서 좀 부끄러워해야 하나... 걸어서 10~15분 정도 걸리는 곳에 있는데도 당장의 피로를 달래겠다는 이유로 외출을 삼가고 퇴근길 여백을 늘이지 않는 게 지성인의 태도는 아닐 것이다...만약 「진화 신화」속 세계관이 그대로 현실에 적용되었다면 분명 나는 짤뚱한 다리와 툭 튀어나온 주둥이를 가진 모습으로 진화했을 거다. 불만은 많으나 불만만 가질 뿐 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하지 않는 모습 말이다.


「진화 신화」에서 외견은 사실상 내면이었다. 일종의 사상의 표출이다. 삶의 궤적을 고스란히 체화한 거다. 특히 주인공과 그 숙부의 진화 형태를 보면 실로 그러하다...세상을 피해 어둠에 파묻혀 파충류(묘사에 따르면 사실상 용인 거 같다)가 된 주인공과 권력에 취해 돼지가 되어버린 차대왕의 모습이 참 상징적이다.

내면이 외견으로 나온다면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살까? 사람으로 살고자 노력할까? 나는 회의적이다. 타성은 금방 고개를 들이민다. 사회는 복잡해졌고 '멋진 신세계'는 문을 연 지 오래다. 각종 미디어에서 인간이 아닌, 특정 형질을 가지도록 진화한 인간을 찬미한다면 인간이 '인간'으로 남기는 어려울 거다.

무서운 일이다.


인간을 인간으로 정의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인간의 조건」을 선물로 받았지만...아직 열 엄두가 안 난다. 입문서를 좀 읽고 열어볼 걸 그랬나? 아직 머리에 체계라는 것도 제대로 안 잡힌 내게 너무 어려운 과제를 부여한 건 아닐까...어쩌겠는가...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이미 열어버렸다. 사실 사람 이름을 외우고 챙기기가 아직 어렵다. 나는 공부 오래 하기는 글러먹은 거 같다...내용 파악이 어렵다...그나마 대중적이랬는데... ...아니다, 그냥 배경지식이 부족해서 그렇다.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고 쓴 포스트에서도 연민에 대해 언급했다. 인간이라면 연민과 함께 연대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고 필요한 건 참 많지만 연민을 바탕으로 한 연대의식이 없다면 시민으로 산다고 보기는 어려운 거 같다. 연민이 있어도 연대하지 않는다면 함께 전진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고, 연대하나 연민이 없다면 그 의중이 심히 의심스러워질 거다. 사실 연민이 없으면 연대는 어렵다고 본다. 그것은 연대라기보다는...오월동주에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상대를 도구로 취급한다든지.

잠깐 옆 길로 새 버렸다. 원래 강의 중에도 딴소리가 제일 재밌는 법이다. 사실 우리는 「진화 신화」에서 묘사하는 것만큼은 아니지만, 문학적 허용을 적용하자면, 모두 마음먹은 대로 진화하고 있다. 관상은 '싸이언스'가 아니지만 인상은 그 사람이 살아온 궤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주름이 삶의 지도고 눈동자는 마음의 창이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참 이상한 일이다. 비슷한 성정을 지닌 이들을 모아두면 어찌 그리 서로 비슷하게 생겼는가? 얼굴을 빼다 박았다는 말이 아니다. 인상이 말이다. 그 이목구비의 오밀조밀한 조합이 말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몇몇 유명인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라진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그럴지 모르겠다. 예시를 들고 싶은데 부적절한 예시밖에 떠오르지 않아 삼키게 된다...

결국 주인공도 자신이 생긴 대로 살게 된 게 아닌가 싶다. 현대사회에는 다소 부적절한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시대의 부름, 민중의 소망...주인공 본인은 이로부터 멀어지려고 그렇게 도망갔지만 결국 용이 되어 승천하고 비를 내렸다. 그토록 먼 길을 돌아왔지만 결국 자신이 갈 길대로 진화하여 가버렸다. 나는 이 과정이 참 맘에 들었다. 그토록 스스로를 부정하고 또 부정해도 결국 사람은 갈 곳으로 가게 된다. 시간은 흐르지 않고, 우리는 그저 빛의 속도로 이동하는 중이라는 이론을 같은 맥락에 둘 수도 있겠다.


내면은 외견이 된다. 이를 무거운 말로 표현하자면 운명일 거다. 자아의 외부에서 내 운명을 그토록 붙들고 흔들어도 결국 내 운명의 주인은 나다. 우리는 생긴 대로 살기 때문이다. 그 어느 때보다 「진화 신화」속 서사가 현실에 필요한 때다. 세상으로부터 멀어져도 운명은 우리를 부른다. 다른 존재로 탈바꿈할 수 없다면 인간으로 살자. 인간으로 살기 힘든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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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은 사람에게 기본적으로 멋진 판단 근거를 준다. 예전에 이렇게 해보니까 크게 도움이 되었다, 다른 사람이 이랬다는데 이만저만했다더라, 기타등등, 기타등등...경험은 쌓이면 거대한 데이터베이스가 되고 삶을 위한 최소한의 이정표로 삼을 수 있게 된다. 아마 나이를 먹은 사람이 현명하다는 건 이 데이터베이스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일 거다.

장미칼도 맥가이버칼도 만능이 아니듯 경험도 만능은 아니다.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퇴색되어버린 과거의 경험, 한쪽에 치우친 경험, 필터 버블 속에서만 쌓은 허구의 경험...뭐 그런 것들은 사람의 눈을 가리기에 딱 좋더라. 이번에 얘기하고 싶은 거는 과거의 경험이다.

사람은 잘 안다는 착각에 너무 쉽게 빠져버린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대부분의 '지나가는 경험'은 절망의 골짜기와 무지 사이의 어드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어렸을 때 친구들과 떡볶이를 먹으러 가던 기억, 치기어린 마음에 부모님께 화를 낸 일,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혼나 자나 단소 따위로 맞은 적 등등...이런 기억을 얼마나 상세하게 기억하는가? 정말 충격적인 기억이나 글로 소상히 적어둔 일이 아닌 이상 아동기 기억을 생생하고 정확하게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다. 왜 우스갯소리로도 '어제 일도 기억이 안 나는데 옛날 일은 어떻게 기억하냐'라고 하지 않나? 당장 나만 해도 내가 언제 넘어저서 코가 깨졌는지, 동생이 이마를 할퀴어서 난 상처가 어쩌다 생긴 건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니까 그러려니 하는 거다. 하지만 '내가 대충 알고 있는 어린이의 행동양식'에 따라 '아~마도 이러다가 생긴 거겠지?'라고 추측은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추측을 곱씹거나 입에 올리면 추측은 점차 사실이 되고 만다. 진짜인지 아닌지 알아낼 수도 없는데...

성인은 아이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한다. 모든 어른은 아이였던 시절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성인이 된 다음 아이들의 행동을 보며 '요즘 애들은 잘 모르겠어', '나 때는 안 그랬는데', '우리 때는~' 같은 말을 어렵지 않게 한다. 하지만 어른들, 자신의 아이 시절을 그렇게 잘 기억하나...? 정말로?

나는 모르겠다. 내가 무슨 생각을 했고 어떤 기분을 느꼈으며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유소년기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까닭은 내 개인사를 대충 정리해둔 일종의 캐릭터창에 주변 어른들의 증언과 명백한 사실을 기록해뒀기 때문이다. 정성적인 내용은 '그랬겠거니' 하는 추측으로만 채운다.

'그랬겠거니'에 들어갈 내용들은 사실상 내가, 혹은 우리가 어린이를 생각할 때 같이 떠올리는 감상들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어린이었던 경험이 있어서 어린이라는 대상이 어떤 것인지 잘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쓰잘데기 없는 주저리가 너무 길었다. 올해(2021년 기준)의 책! 어린이라는 세계! 우리는 어린이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습니까?

어린이를 마주할 수밖에 없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데도 이 책을 읽으며 평소 내 태도에 대해 정말 많이 점검하게 되었다. 아직도 '무식한 정점'에서 다 내려오지 못한 거 같다. 내가 어린이었기 때문에, 내가 어린이를 만나왔기 때문에 어린이에 대해 잘 안다는 착각을 아직도 하고 있다. 이제사 의식적으로 모르겠다고 말하는 거지...

어린이에게도 지키고 싶은 품위와 체면이 있다. 정작 아이들에게 말하면 '에이 그런 거 없어요', 라고 하지만 행동하는 것을 보면 아니다. 공개적으로 혼나면 몹시 수치스러워하고 이에 대해 성인이 사과하면 쿨한 척 괜찮다고 말하고는 가버린다. 막상 사과를 받으면 기분이 좋아지는데 말이다. 지금와 생각하면 그랬다. 어떤 성인들은 너무 쉽게 어떤 성격의 어린이들은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해봐야 한다고 한다. '경험적으로'(그러니까 일반화하기 어려운, 개인적인 판단이라는 말이다)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망신당했을 때의 기분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책을 읽은 지금, 남의 품위를 지키며 부족한 부분을 말할 수는 없는 걸까 고민할 수밖에 없게 된다. 성인이 어린이에게 망신을 주는 건 손쉽다.

어느 대목을 읽으면서 되게 우울했었는데...정확한 대목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적어둘 걸 그랬어.

당시 감정은 기억난다. '나는 이런 사람은 될 수 없겠구나'. 절망한 건 아니다. 그보다는 한계를 느꼈다고 하는 게 맞을 거 같다. 아, 아마 '사랑이라고 해도 될까' 챕터를 읽을 때였던 거 같다. 나는 평생 사랑으로 아이들을 대할 수는 없을 거 같다. 따뜻한 시선으로 아이들을 볼 수는 있겠지만 사랑...가슴에서 끓어오르는 사랑으로 성인을 대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공적 영역에서 만난 사람들을 나는 사랑으로 품을 수 있을까?(이런 고민을 이야기하면 대다수의 내 동료들은 나를 다소...놀리듯이 보거나 유치하게 여길 것이다. 확신한다. 학생을 향한 사랑을 이야기하기에 이 집단은 너무나도 냉소적으로 변했다.)

어느 강의에서 다른 사람을 연민으로 대할 때 서로가 서로를 훨씬 좋은 상대로 대우할 수 있을 거라는 요지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사랑까지는 가지 못하더라도 연민으로 대하는 건 할 수 있을 거 같다. 동물들도 행동에 이유가 있는데 어린이라고 말과 행동에 이유가 없을까? 아닐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시시콜콜하고 자질구레하며 어떨 때는 번잡스럽게 느껴지는 행동에는 이유(아이들은 그냥이라고 말하지만 나름 근원을 짚어가면 이론을 세울 수 있는 정도의 것 말이다...)가 있을 거다. 타인의 연민을 경험한다고 그 아이들이 모두 당장 행동이 개선되고 성인이 용납할 수 있는 수준에 다다를 수는 없을 거다. 당연하다. 우리는 모두 그 과정을 거쳐왔다. 거쳐왔기 때문에 기꺼이 연민을 베풀 수 있는 거다. 너도 그렇구나. 나도 그랬어.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분명히 그랬을 거야. 우리는 모두 어린이였으니까.

우리는 어린이를 정말 잘 알고 있을까? 잘 기억나지 않는 기억 한 켠에 문장으로만 남은 기억을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현상으로 믿기보다 당장 눈앞에 있는 어린이에게 관심을 가지면 근거 없는 자신감 구간을 넘어 정말로 잘 아는 길에 오를 수 있을 거다. 나도 그랬다는 동질감을 조금만 꺼내오면 이해할 수 없는 행동도 수용할 수 있을 지 모른다...그랬으면 좋겠다. 다음주는 어제보다 아주 조금만 더 우리 아이들의 말과 행동을 받아들일 수 있는 어른이 되자...'어린이라는 세계'가 내게 준 삶의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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