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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구는 왼쪽에 - 『자본』의 세계사와 마르크스 없는 한국사회
강신준 지음 / 사계절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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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재선과 12·3 계엄, 그 후 소위 ‘극우’라 불리는 정치 세력의 사회적 난동을 지켜보며 우리는 전 세계로 번져가는 우경화 현상에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저자는 그들을 극우가 아닌 야만이라고 이름 붙이며, 그 야만을 물리치기 위한 해결책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소환한다. 어째서 우리 사회에서 ‘마르크스주의’는 꽁꽁 숨어버린 걸까? 왜 우리는 ‘혁명’이라는 단어에 반감부터 가지게 된 걸까? 이를 규명하기 위해 저자는 ‘마르크스주의’가 등장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톺아보고, 지난 혁명이 타파하지 못한 한계와 그럼에도 남긴 의의를 짚어본다. 로마 제국의 멸망과 프랑스 혁명, 볼셰비키 혁명, 케인스주의와 신자유주의에 이르는 긴 여정을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이해하고, ‘마르크스 없는 한국 사회’가 어떻게 지금의 정치적 분열을 야기하였는지를 살펴본다. 

‘종북좌파’, ‘빨갱이’라는 말이 횡행하지만, 실은 ‘좌파도 노동자 정당도 없는 나라’라는 날카로운 진단을 받은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한순간에 모든 것을 뒤엎을 꿈같은 혁명은 없음을 받아들이고, 부단히 길고 느릴 혁명을 견뎌야 한다. ‘지금’보다 ‘미래’를 앞세울 마음을 단단히 먹고 말이다.


12·3 계엄 이후 급히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된, ‘마르크스주의’가 무엇인지 겉핥기로만 알았던 나조차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마르크스주의’를 지금 우리나라의 정치와 엮어 쉽게 풀어 설명해 주어서 흥미롭게 읽었다. 


*본 리뷰는 사계절출판사의 도서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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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사는 대만 여자, 썸머의 게스트하우스 일기
썸머 지음, 허유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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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여성 썸머가 칠 년 간 이태원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며 만난 사람들. 숙소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피로 글씨를 쓰는 사람이 있는 한편, 보답하고 싶은 마음으로 밑반찬을 잔뜩 만들어두고 떠나는 사람이 있다. 좋은 사람으로 여겨 가까이 지냈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던 사람이 있고, 더 알고 나니 순하고 아름다웠던 사람도 있다. 제일 기억에 남았던 에피소드는 아무래도 두 복순 할머니. 거제도에서 올라온 해녀 출신 할머니들은 같은 이름이 가지고 있고 같은 집에 산다. 늘 붙어 다니기에 핸드폰도 한 대. 혼자 살면 안 된다고 당부하는 할머니의 말에는, 서로에게 기댄 채 버텨온 고된 삶의 무게가 실려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할머니들이 떠난 적요한 집을 오래오래 바라보고 싶어진다.


소중한 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저만의 이야기. 한 사람에게 귀 기울이기 전까지 그들이 가진 이야기를 알 수 없다는 건 무서우면서도 기쁜 일이다. 썸머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많은 이야기를 발견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의 능력은 이 세상을 희망으로 바라보게 하고, 인간을 사랑하게 한다. 웃기고, 슬프고, 따뜻하고, 화나는! 감정을 몽땅 느끼게 하는 쾌활한 목소리덕에 이 책을 읽는 내내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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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바다 ㅣ 암실문고
파스칼 키냐르 지음, 백선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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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실존 예술가들과 파스칼 키냐르의 가상 인물들, 실제 역사적 사건들과 그가 빚어낸 문학적 허구가 어지럽게 뒤섞인 이 책에서 처음에는 조금 길을 잃을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0여 쪽의 페이지가 그리 어렵지 않게 넘어갔던 것은, 파도에 몸을 맡기듯 아름다운 문장들을 믿고 흘러가기만 해도 흠뻑 즐길 수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인물이 품은 욕망을 적나라할 정도로 훤히 드러내서, 종종 그 욕망이 더부룩하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나는 그 외면하지 않음이 차차 좋아졌다. 꾸며내고 덧붙이지 않고, 벗겨내고 덜어내서 발견해 낸 원초의 아름다움 같은 느낌. 그리고 그 인물들의 삶 가장자리에 음악(을 비롯한 예술)이 늘 어우러지고 있다는 것도. 그래서 17세기 음악에 대해 잘 몰라도, 파스칼 키냐르에 대해 잘 몰라도 거뜬히 도전 가능한 책.

이 책을 읽은 열 명에게 가장 좋았던 장면을 물어보면 열 가지의 답이 나올 것 같다. 그 정도로 고르기 어려웠지만... 등장할 때마다 찬란한 아름다움을 상상하게 해 주었던 말과 공녀가 자꾸만 떠오른다.

두 짐승-말과 공녀-은 아무도 보는 이 없이 둘만 있게 되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생각한다는 사실조차 생각하지 않고, 모든 의식을 떠나, 모든 언어를 버리고, 모든 두려움이 가루가 되어 떨어지도록 내버려 둔 채, 숲의 나뭇가지들이 바스락거리는 가운데 숨을 쉬었다. 어떤 광대함이 돌아와 공간을 확장했고, 폐들을 증폭시켰으며, 코와 콧구멍과 눈을 넓혔다. 둘은 행복했다. (117쪽)

사랑에 타격을 입어 보지 않은 이는 사랑을 상상조차 할 수 없어요. - P67

음악은 특출나게 감동적인, 어딘가 미쳐 버린 인식 같다. 세상 이전의 세상에 있던 것, 되찾으리라 더는 기대하지 않던 것과의 아연한 재회 같다. - P195

모든 영혼은 스스로 낯설다. - P210

사랑이, 명백히, 더는 존재하지 않을 때 사랑으로부터 무엇이 남을까? 열거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것들이 남는다. 한 세상이 남는다. - P316

내가 살지 못한 것을 향한 그리움이 나의 심연이다. - P461

그리고 모든 위험과 숲이 지닌 저 모든 아름다움 사이에서 계속 자유로우려면 두려움 속에서 떨기를 멈추지 말아야 해요. - P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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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와 여자의 세상 - 스즈키 이즈미 프리미엄 컬렉션
스즈키 이즈미 지음, 최혜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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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읽은 책 중 제일 좋았다...

전에 박솔뫼 작가 완독회 갔을 때 최근 읽은 좋았던 책 추천해 달라는 질문에 곧 나올 책이라면서... 자살한 일본 여성 작가의 책이고 소설과 에세이가 같이 묶여있는데, 택시를 타고 정신병원에 가는 길을 묘사한 에세이가 너무 좋았다고 말씀하셨고 그것만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가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이 책 출간 소식을 듣고 제목도 작가도 몰랐지만 이 책이구나! 단번에 알아버렸다. 표제작인 <여자와 여자의 세상>은 첫 장만 읽어도 재밌다는 걸 알 수 있고... 소설들이 다 냉소적이면서 웃기고 근데 또 발랄하고 신랄하기도 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어버렸다. 술술 읽다가도 어떤 문장들에 콱 박혀서 다시 처음부터 읽기도 하고. 이를테면 “그래도 말이야, 뒤돌아보는 건 좋은데, 뒤돌아보고 나서 휙 하고 다시 앞을 봤더니 거기에 뒤돌아보고 있는 자신이 있으면 싫지 않아?”라던가 “그래서 확실히 알았는데, 이건 사랑이 아니다. 경험한 적 없는 것에 대한 그리움, 이라는 기분이 든다. 말도 안 되지만.” 같은 문장들. 그리고 소설과 같은 궤에 있는 에세이 역시 너무 좋은데 이런 부분.

”나는 골목대장이 될 수 없다고 믿어왔으니, 당연히 자아를 가져야 마땅한 남성에게 기대했던 것이다. 그것에 귀속되는 것이 동화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상행위일 뿐이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대를 만족시킬 만큼의 자아와 영리함을 지닌 남자는 적다. 나는 가끔,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쾌함과 초조함에 휩싸였다. 끝내는, 슬퍼졌다. 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375쪽)

너무 기대했던 책이었는데 그 기대를 훌쩍 뛰어넘어버린 책은 또 오랜만이어서 기쁘다. 친구들한테 마구 선물하고 어떤 단편이 제일 좋았냐고 어디가 좋았냐고 얼마큼 좋았냐고 붙잡고 묻고 싶은 책.


+ 서평단에 선정되어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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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타일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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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허물어지고 물러지고, 그랬다가 다시 차곡차곡 쌓이고 비로소 굳어지는 과정을 오롯이 느끼게 하는 김금희의 소설. 이번에도 역시 그랬다... 이런 글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큭큭 웃었다가 찡했다가 귀여웠다가 짜릿했다가...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가 여름의 마음이라면, <크리스마스 타일>은 겨울의 마음.
크리스마스를 앞둔, 혹은 맞이한 사람들이 지나간 시간의 기억과 상처를 돌아보고 비로소 다시 앞을 바라보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가끔씩은 다시 뒤돌아보고, 그때마다 또 아파하고 후회하겠지만 그래도 이제는 천천히 걸어나갈 수 있겠지. 살아갈 수 있겠지.

앞으로의 여름과 겨울에는 꼭 이 두 소설을 다시 꺼내게 될 것 같다.
일 년을 마무리할 이 겨울에 읽는다면 너무너무 좋을 소설. 마음을 담아 추천합니다!


+가제본 서평단에 당첨되어 창비에서 책을 제공 받았습니다.


달려나가는 마음을 멈추지 못하는 스물네살의 야콥과 그 다가섬을 마다할 이유가 없는 스물셋의 예후이, 비슷한 이유로 포기라는 걸 고려하지 않는 동갑의 윤슬까지. 그 모든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샹강의 수천그루 귤나무가 해를 거듭해 자라고 노을이 강물을 물들이며 바람이 새들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고 지나가는 것처럼.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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