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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바다 암실문고
파스칼 키냐르 지음, 백선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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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실존 예술가들과 파스칼 키냐르의 가상 인물들, 실제 역사적 사건들과 그가 빚어낸 문학적 허구가 어지럽게 뒤섞인 이 책에서 처음에는 조금 길을 잃을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0여 쪽의 페이지가 그리 어렵지 않게 넘어갔던 것은, 파도에 몸을 맡기듯 아름다운 문장들을 믿고 흘러가기만 해도 흠뻑 즐길 수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인물이 품은 욕망을 적나라할 정도로 훤히 드러내서, 종종 그 욕망이 더부룩하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나는 그 외면하지 않음이 차차 좋아졌다. 꾸며내고 덧붙이지 않고, 벗겨내고 덜어내서 발견해 낸 원초의 아름다움 같은 느낌. 그리고 그 인물들의 삶 가장자리에 음악(을 비롯한 예술)이 늘 어우러지고 있다는 것도. 그래서 17세기 음악에 대해 잘 몰라도, 파스칼 키냐르에 대해 잘 몰라도 거뜬히 도전 가능한 책.

이 책을 읽은 열 명에게 가장 좋았던 장면을 물어보면 열 가지의 답이 나올 것 같다. 그 정도로 고르기 어려웠지만... 등장할 때마다 찬란한 아름다움을 상상하게 해 주었던 말과 공녀가 자꾸만 떠오른다.

두 짐승-말과 공녀-은 아무도 보는 이 없이 둘만 있게 되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생각한다는 사실조차 생각하지 않고, 모든 의식을 떠나, 모든 언어를 버리고, 모든 두려움이 가루가 되어 떨어지도록 내버려 둔 채, 숲의 나뭇가지들이 바스락거리는 가운데 숨을 쉬었다. 어떤 광대함이 돌아와 공간을 확장했고, 폐들을 증폭시켰으며, 코와 콧구멍과 눈을 넓혔다. 둘은 행복했다. (117쪽)

사랑에 타격을 입어 보지 않은 이는 사랑을 상상조차 할 수 없어요. - P67

음악은 특출나게 감동적인, 어딘가 미쳐 버린 인식 같다. 세상 이전의 세상에 있던 것, 되찾으리라 더는 기대하지 않던 것과의 아연한 재회 같다. - P195

모든 영혼은 스스로 낯설다. - P210

사랑이, 명백히, 더는 존재하지 않을 때 사랑으로부터 무엇이 남을까? 열거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것들이 남는다. 한 세상이 남는다. - P316

내가 살지 못한 것을 향한 그리움이 나의 심연이다. - P461

그리고 모든 위험과 숲이 지닌 저 모든 아름다움 사이에서 계속 자유로우려면 두려움 속에서 떨기를 멈추지 말아야 해요. - P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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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와 여자의 세상 - 스즈키 이즈미 프리미엄 컬렉션
스즈키 이즈미 지음, 최혜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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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읽은 책 중 제일 좋았다...

전에 박솔뫼 작가 완독회 갔을 때 최근 읽은 좋았던 책 추천해 달라는 질문에 곧 나올 책이라면서... 자살한 일본 여성 작가의 책이고 소설과 에세이가 같이 묶여있는데, 택시를 타고 정신병원에 가는 길을 묘사한 에세이가 너무 좋았다고 말씀하셨고 그것만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가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이 책 출간 소식을 듣고 제목도 작가도 몰랐지만 이 책이구나! 단번에 알아버렸다. 표제작인 <여자와 여자의 세상>은 첫 장만 읽어도 재밌다는 걸 알 수 있고... 소설들이 다 냉소적이면서 웃기고 근데 또 발랄하고 신랄하기도 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어버렸다. 술술 읽다가도 어떤 문장들에 콱 박혀서 다시 처음부터 읽기도 하고. 이를테면 “그래도 말이야, 뒤돌아보는 건 좋은데, 뒤돌아보고 나서 휙 하고 다시 앞을 봤더니 거기에 뒤돌아보고 있는 자신이 있으면 싫지 않아?”라던가 “그래서 확실히 알았는데, 이건 사랑이 아니다. 경험한 적 없는 것에 대한 그리움, 이라는 기분이 든다. 말도 안 되지만.” 같은 문장들. 그리고 소설과 같은 궤에 있는 에세이 역시 너무 좋은데 이런 부분.

”나는 골목대장이 될 수 없다고 믿어왔으니, 당연히 자아를 가져야 마땅한 남성에게 기대했던 것이다. 그것에 귀속되는 것이 동화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상행위일 뿐이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대를 만족시킬 만큼의 자아와 영리함을 지닌 남자는 적다. 나는 가끔,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쾌함과 초조함에 휩싸였다. 끝내는, 슬퍼졌다. 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375쪽)

너무 기대했던 책이었는데 그 기대를 훌쩍 뛰어넘어버린 책은 또 오랜만이어서 기쁘다. 친구들한테 마구 선물하고 어떤 단편이 제일 좋았냐고 어디가 좋았냐고 얼마큼 좋았냐고 붙잡고 묻고 싶은 책.


+ 서평단에 선정되어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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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타일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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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허물어지고 물러지고, 그랬다가 다시 차곡차곡 쌓이고 비로소 굳어지는 과정을 오롯이 느끼게 하는 김금희의 소설. 이번에도 역시 그랬다... 이런 글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큭큭 웃었다가 찡했다가 귀여웠다가 짜릿했다가...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가 여름의 마음이라면, <크리스마스 타일>은 겨울의 마음.
크리스마스를 앞둔, 혹은 맞이한 사람들이 지나간 시간의 기억과 상처를 돌아보고 비로소 다시 앞을 바라보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가끔씩은 다시 뒤돌아보고, 그때마다 또 아파하고 후회하겠지만 그래도 이제는 천천히 걸어나갈 수 있겠지. 살아갈 수 있겠지.

앞으로의 여름과 겨울에는 꼭 이 두 소설을 다시 꺼내게 될 것 같다.
일 년을 마무리할 이 겨울에 읽는다면 너무너무 좋을 소설. 마음을 담아 추천합니다!


+가제본 서평단에 당첨되어 창비에서 책을 제공 받았습니다.


달려나가는 마음을 멈추지 못하는 스물네살의 야콥과 그 다가섬을 마다할 이유가 없는 스물셋의 예후이, 비슷한 이유로 포기라는 걸 고려하지 않는 동갑의 윤슬까지. 그 모든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샹강의 수천그루 귤나무가 해를 거듭해 자라고 노을이 강물을 물들이며 바람이 새들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고 지나가는 것처럼.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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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숲속의 소녀들 - 신경학자가 쓴 불가사의한 질병들에 관한 이야기
수잰 오설리번 지음, 서진희 옮김 / 한겨레출판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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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투적인 생각과 오래전에 이미 잘못된 것으로 밝혀진 이론들'(287쪽)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심인성 장애는 많은 사람들에게 '진짜 병'으로 인정받지 못하곤 한다. 신경학자인 수잰 오설리번은 전 세계의 심인성 장애 사례들을 탐사하여 우리에게 들려줌으로써 심인성 장애에 대한 해묵은 오해를 걷어내려 한다.


"미친 거지 진짜 아픈 게 아니라"(267쪽)거나 흔한 꾀병이라는 유구한 사회적 낙인 때문에, 심인성 장애 환자들은 쉽게 진단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존재하지 않는 다른 답을 찾아 오랜 시간 헤매기도 한다. 특히 취약한 환경에 놓인 환자들은, 이 병의 불가사의한 속성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주로 음모론자...)에 의해 더 큰 고통을 받기도 하고... 

 

비교적 증상이 약하고, 환자가 쉽게 통제할 수 있으며, 나약한 내면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심인성 장애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들. 그러나 "많은 이에게 심인성 장애는 저절로 계속되는 현상"(187쪽)이고, 단지 개인의 내면적인 문제라기보다는 복잡한 요소들이 맞물려 발생한다. 사실 심인성 장애를 비롯한 모든 질병은 생물학적/심리적 요소를 비롯해, 그 사람이 처한 사회/문화/정치적 상황이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여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므로.


어쨌거나 내 마음인데도 마음대로 가눌 수 없고,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데도 이렇게나 큰 물리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하다. 마음이라는 건 정말 뭘까 자꾸 생각했고... 

전혀 모르고 있던 분야라서 이 책 정말 흥미롭게 읽었다.

 



따라서 뇌졸중을 앓는 어떤 사람이 기질적인 뇌 질환이라고 하면 ‘진짜‘ 마비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심인성 혹은 기능성 장애라고 하면 ‘진짜‘ 마비된 것은 아닐 것이라 여긴다. 심인성(기능성) 장애가 있다는 의미가 그런 식으로 해석된다면 사람들이 그 진단을 거부한다 해서 놀라울 게 뭐가 있겠는가? - P175

육체적 고통만큼 심리적 고통에서 긴급한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다른 이들로부터 이해받기는 정말 쉽지 않다.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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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부수는 말 - 왜곡되고 둔갑되는 권력의 언어를 해체하기
이라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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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사회학 연구자인 이라영이 던지는 21개의 화두의 중심에는 '말'이 있다. 왜 어떤 말은 뱉어지기까지 너무나 쉽지만 어떤 말은 그토록 어려운지, 왜 어떤 사람을 말하기만 하고 어떤 사람은 듣기만 하는지, 왜 어떤 말은 빠르게 잊히는지를 면밀하게 분석한 책이다.


나를 분노하게 하는 말도 있지만,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말들이 더 많다. 나 역시 빈번히 무심한 폭력을 저지르는 주체가 되므로. 몰랐던 것들을 새로이 알고 배우는 것은 분명 큰 기쁨이지만, 동시에 내가 옳다고 믿어온 것들이 무너지는 일이고, 그럴 때마다 나는 자꾸만 부끄러워진다. 내가 뱉었던 말들이 나에게 돌아와 나를 가차 없이 때리는데, 그럼에도 지금 내가 아는 것은 티끌에 불과하다는 사실 때문에 더 괴롭다.


그래서 나는 저자가 말하는 '아름다움'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저자는 시몬 베유의 '아름다움은 선에 대한 우리들의 갈망을 반추하는 거울과 같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아름다움은 '고통과 연대하고 권력에 저항하며 정상성에 균열을 내어 세상에 충격을 주는 행위'(9쪽)라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이 가진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이 '나 이외의 타자와 동등하게 연결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연결'(362쪽) 되기를 소망한다. 그러므로 섣불리 비관주의에 잠식되지 않고, '어쩔 수 없는 문제들을 어쩔 수 있는 것으로 바꾸'(288쪽)려 부단히 노력하기. 또한 이것이 아름다움에 가까워지는 행위임을 기억하기. 완벽하고 매끄러운 아름다움이 아닌, 울퉁불퉁하고 땀 흘리는 아름다움을 향해서라면 한없이 부끄러워지더라도 다시 올려다볼 수 있을 것 같다.

언제나 고통에 대한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 - P7

고통을 외면한 채 우리는 아름다움을 맞이할 수 없다. 타자의 고통을 마주하고 사랑과 아름다움이 주는 힘과 그것의 정치성에 대한 무한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세계를 아름다움으로 이끌 것이다. 아름다움은 살아가는 모든 것에게 애쓰는 마음이며 동시에 죽어간 모든 것에게 애도를 잃지 않는 마음이라 생각한다. - P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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