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개의 경계로 본 세계사 - 국경선은 어떻게 삶과 운명, 정치와 경제를 결정짓는가
존 엘리지 지음, 이영래 외 옮김 / 21세기북스 / 202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서제공

제목에서 드러나듯 이 책은 ‘경계’의 관점에서 세계사 주요 사건들을 들추어보고 있다. 이 경계는 국경선에서부터 시간대, 바다, 하늘 나아가 우주에 관한 내용까지로, 저자는 광범위한 내용들을 심도 깊게 다룬다. 배타적 경제수역과 우주를 둘러싼 각국의 경쟁, 나아가 도시 내에서의 인종 차별, 민족 내에서 종교 갈등 등까지 ‘경계’의 의미를 확장해서 찬찬히 훑고 이야기한다.

각 장에서 다루는 역사적 사건들을 읽다보면 인류의 역사는 이 경계, 선 긋기의 역사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선을 그을 때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되는 것은 민족의 정체성도, 종교도, 다수의 이익이나 선의가 아니라 철저히 인간의 욕망이다.

인간이 모이면 갈등이 생기고, 갈등이 있는 곳에선 욕념이 배제될 수 없다. 이렇듯 내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울타리를 치고 그것을 지키고 싶은 것 역시 당연하기에 이 ‘경계’는 인류사의 단초라 하겠다. 하지만 도대체 어디에 어떻게 위치하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또 알려고 애쓰지도 않으면서 땅 가르기에 급급했던 자들의 기록들은 씁쓸했다.

멀게는 고대 이집트부터 가깝게는 한반도 휴전선까지 경계에 얽힌 역사사건, 갈등, 전쟁, 종교문제, 흥망성쇠 등을 촘촘하게 엮었다. 유산, 역사, 외부효과 이렇게 총 3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옮긴이의 말에서 역자는 세계사 지식이 없어도 읽기 편한 3부를 먼저 읽는 방법도 추천하고 있다.(p.414)

물론 배경지식이 있다면 읽기 편하겠지만 수박겉핥기 식으로 큼직한 사건들만 대충 아는 나에겐 마냥 쉬운 책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한반도 휴전선을 다룬 25장에서는 매우 쉽게 몰입할 수 있었다.

한반도 휴전선을 다루면서 보여준 저자의 통찰력은 날카롭다. 그는 “사소한 충돌 하나가 핵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 장소(p.221)”라고 언급하면서 비무장 지대가 이름과 달리 고도로 무장되어 있다는 점과 자연 생태계의 보존으로 평화로운 분위기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음을 명시한다. 이 휴전선이 정해지는 데에도 딱히 엄청난 신념과 가치가 기준이 되지 않았다. 단지 행정적 편의에서 시작된 선이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 중 하나로 남“(p.227)게 된 것이다. 경계, 국경선이 가진 무게에 비하면 그 시작은 허무할 정도이다.

덧붙여 저자가 머릿말에 책이 가진 한계에 대해 밝힌 점이 인상깊었다. 그는 “영국인, 영국 시민, 유럽인, 서구인, 백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배경이 내 시각에 영향을 미쳤다”(p.13)고 고백한다. 지정학적 갈등을 해체하고 읽어내는 탁월한 고찰 앞에 그것이 겸손의 미덕임을 알겠다.

세계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인간과 경계의 서사가 각각 둘이 아닌 하나임이 명백하단 걸 여실하게 느꼈다. 경계를 만드는 것이 인간이기에, 경계가 가진 의미를 관통하는 것은 곧 인간의 의지다. 이 책은 급변하는 세계 질서 속에서 가장 눈여겨 봐야 할 키워드가 경계임을 강조하면서 그것을 해석해 내게끔 격려한다.

쉽지 않지만 의미 있는, 깊생을 원한다면 후회하지 않을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 제목에서 이시봉 대신 우리집 반려견 이름을 넣어도 어색하지 않다. 꼭 맞는 옷을 입힌 기분이다. 명랑한 강아지들-그밖의 무수한 털친구들-은 짧고 투쟁 없이 산다. 우리가 모두 헤아릴 수 없는 매순간을 다만 진실 되게 산다. 책 두께만큼 담긴 의미들이 묵직해서 책속 문장들을 몇번이고 다시 읽었다.

초반에 배치된 비숑 이시봉의 길고양이 구조 사건은 한편의 생생한 활극이다. 순식간에 독자들을 매료시키고 다음을 기대하게 만든다. 목이 졸린 길고양이의 엉덩이를 콧잔등으로 받쳐 구하는 강아지라니! 인간의 눈으로 보자면 이것은 인간의 잔혹성을 해체시키는, 명랑한 강아지 이시봉의 숭고한 활약이다. 하지만 강아지 이시봉은 그저 고양이의 엉덩이에서 냄새를 맡고 인사를 나누고 싶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소설은 보호자 이시습과 반려견 이시봉을 중심에 두고, 인간의 욕망과 투쟁의 역사를 여러 갈래로 엮는다. 가깝게는 이시봉을 입양한 시습의 아버지 이야기부터, 멀게는 스페인 왕가 역사와 이시봉의 혈통과 관련한 프랑스 유학생들의 이야기가 교묘하게 얽혀 있다. 다층적인 서사는 쉽사리 다음 전개를 예상할 수 없게 하고 그래서 더욱 흥미진진하다.

분명 개와 인간의 우정 내지 사랑이라고 확신했는데, 아니, 그건 “인간의 오해”이자 “오독”이고 그나마 그 오독에서 비롯된 개를 향한 감동과 이해가 인간이 가진 “유일한 장점”이라고 하니 순간 멍해진다.(p.469)

그러나 작가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노조활동, 검머외가 이끄는 사모펀드 운용회사, 개농장, 길고양이 학대, 가정폭력 등등 너절한 인간들의 면면을 보여주고 이 연결고리마다 강아지 이시봉 혹은 이시봉의 부모견 등이 등장한다. 이때 이시봉은 변함없이 이시봉이지만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따라 그 의미는 다르다. 우리집 막내, 교통사고의 원인, 우수한 혈통의 비숑 등. 소설은 전반적으로 유쾌한 재치를 잃지 않으면서도 윤리적 책임에 대해서 끊임없이 묻는다.

하지만 이 무수한 사건의 우연이 겹치고 또 겹쳐서 결국 다시 보호자 이시습은 반려견 이시봉과 기꺼이 함께 산다. 이것은 사랑이 아닐 수 없고, 그것은 서로가 반드시 서로의 모든 것을 알아야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각자의 언어로 완벽하게 읽어낼 수 없어도 다만 명랑하게.

#도서제공 #서평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포 제인 오스틴 - 최초의 문학이 된 여자들
홍수민 지음 / 들녘 / 202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비포 제인 오스틴, 홍수민
#도서제공 #서평단


분명 존재했던 이들이지만 명성에서나 관심도에서나 남성 작가들에 비해 밀려나있던 여성 고전 작가들을 시대순으로 한데 엮었다. 제인 오스틴, 브론테 자매, 버지니아 울프나 우리나라 허난설헌 정도만 생각하던 내게 새로운 장을 열어보여주었다.

여성 문학의 시초부터 천천히 되짚으면서 독자적인 정체성, 불합리한 세태에 대한 비판, 여성들의 인권, 한 명의 인격체로서의 저항정신들이 살아있음을 알게 됐다. 그들의 의지에 공감할 수밖에 없는, 글의 힘을 느끼게 된다.

‘(여성 작가들에게) 쓰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었습니다.(p.9)’

여성들이 문학사에서 분투해 온 생생한 과정을 소개해 가슴 벅차오르면서 읽었다. 자칫 따분하거나 진입 장벽이 높을 법도 하건만 이 책의 특장점은 독자들에게 직접 말을 건네는 문체로 주목하게 만들고, 적절한 재치와 입담으로 사로잡는다는 것이다. 특히 소제목들이 생기 발랄해서 주제의 무게감을 덜고 흥미를 더한다.

10세기 헤이안 시대부터 여성 고전 작가들을 소개하는데 작가의 작품을 인용할 뿐만 아니라 그의 생애, 당시 시대상 등을 적절하게 곁들였다. 여기서 소개한 책도 얼른 읽어보고 싶게끔 홀린다. 덧붙여 이 책에서 예시로 든 여성 고전 작품들이 전부 국내 번역본으로 출간되어 있다는 점에 다시 한 번 설렌다. 하나씩 읽어봐야지.

특히 우리가 여성 고전의 존재를 기억해야만 여성 작가들의 ‘미래를 낙관할 수 있다’는 의견에 적극 동의한다. 각자의 시간에 선구자로 남았던 이들이 문학사의 고전으로 남았다. 그들과 그들의 존재를 기억한 독자들이 여성 문학을 그저 단순히 흘러간 시간이 아니라 의미있는 역사로 만들었던 것이다. 여성 고전의 존재를 알고, 이 알아차림이 다시, 역사의 순간으로 남게끔 계속해서 읽어나가고 이들의 이름을 기억해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중해의 끝, 파랑
이폴리트 지음, 안의진 옮김 / 바람북스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서제공 #서평단


온통 푸른 빛으로 가득 찬 책이다. 종이는 경계가 있지만 거기 담긴 그림은 경계가 없어, 읽는 독자를 순식간에 지중해 난민 구조 현장으로 끌어다 둔다. 인간다움, 연대의식, 그리고 개개인의 삶에 대해서 들여다 보는 계기가 된다.

저자 이폴리트는 탐사보도 전문 그래픽노블 작가다. 자신의 강점을 살려 현장감 넘치는 상황을 만화로 실감나게 남겨, 난민 문제에 대해 낯선 독자도 충분히 상황에 공감하고 마음 쏟게 만든다. 직접 인도주의 구조단체 ‘SOS 메디테라네’의 구조선 오션 바이킹호에 동승해 지중해 난민들을 구조하는 경험을 기록하고 있다.

바다에 얽힌 삶이 얼마나 다양한지 보여주는데 아름답고도 참혹하다. 바다라는 장소는 누군가에게는 휴양지, 안락한 순간을 누릴 수 있는 곳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생사의 기로가 갈리는 곳이다. 죽음을 건너서 비로소 새 삶에 닿을 수 있다. 하지만 온전히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여기 깃든 인류애와 연대가 눈물겹다. 세상은 다정하지만은 않아서 구조하고도 항구에 정박할 수 없게 한다거나 구조선 눈 앞에서 난민들을 가로채기도 한다. 냉담한 현실과 코로나 펜데믹이 한데 겹쳤을 때에는 끝없이 절망만 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국가들의 무책임은 SOS 메디테라네가 존재하는 이유(p.108)’이기에 이들은 행동할 뿐이다. 구조선에 오르는 구성원들은 ’저마다의 경험과 역량을 가지고‘(p.112) 한 팀으로서 뭉치고 서로 배려하기를 수없이 숙지한다. 뭍에서 사소할 일도 바다에서라면 큰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구조 대원들뿐 아니라 기억에 남는 몇몇 난민들의 이야기도 남겨둔다. 그중에서도 배에서 주운 유니콘 인형을 들고 뛰놀던 아이샤가 인상깊다. 인간이 가진 생명력과 희망을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또 지나온 시간을 다 헤아릴 수 없지만 일단 구조선에 싣고 항구에 닿을 수 있는 ‘허가’가 떨어졌다는 사실에 다만 기뻐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어지는데 가슴이 뭉클했다.

하지만 출렁대는 파도가 삼킨 또 다른 삶들, 마음들은 묻어둘 수밖에 없다. 지금껏 많은 이들을 살렸지만 모든 이들을 살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많은 것이지만, 아무것도 아니다.‘(p.194)라고 담담하게 적힌 문장이 무겁게 다가왔다.

저자는 갖가지 부조리한 것들 속에서도 명징하게 기록을 남기고, 할 수 있는 것들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난민문제를 둘러싼 각국의 이해관계를 나로서는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지만 이 책을 통해서 지금껏 내가 외면해왔던 삶의 형태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감히 쉽게 선택할 수 없는 길을 기꺼이 선택하는 모습에서 숭고함마저 느꼈다.

가슴 서늘한 이야기를 잔잔한 파도처럼 풀어두고 있는 책이다. 읽고 나면 새 지평이 열린다. 만화 형식이어서 어린 친구들도 읽기 부담없다는 게 또 하나의 매력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악녀서 거장의 클래식 5
천쉐 지음, 김태성 옮김 / 글항아리 / 202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서제공 #서평단
#악녀서 #글항아리 #말많음주의 #스포주의

전반적으로 아름다운 문장과 자기 해체적 성향이 짙어서 산문시같은 느낌이 든다. 특히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장면이 많아서 감각적인 문체가 가진 장점이 더 극대화된다. 여백이 많아 그다지 친절한 전개는 아니지만 고백체로 이어져서 몰입이 어렵지는 않다. 하지만 분명 취향을 많이 탈 만한 작품이고 개인적으로는 호다.

네 편의 소설 모두 적나라한 성애가 껴들어 있으나 소설집을 관통하는 주제가 꼭 동성 간의 사랑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에 관한 거듭된 성찰로 결국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게끔 확장시키면서 독자들을 끌어들인다. 이 과정에 여자들 간의 사랑이 반드시 있다. 몸과 마음이 겹치고, 감정이 뒤얽히는 장면들이 인상적이다.

첫번째 소설 「천사가 잃어버린 날개를 찾아서」의 주인공 차오차오의 이야기 역시 그러하다. 순탄하지 않았던 유년기의 여파로 엄마가 음란하다고 날세우지만 끝내 그녀를 향한 사랑을 기꺼이 인정한다. 그 여정에는 동성의 연인 아쑤가 있다.

차오차오가 갖고 있던 사랑에 관한 갈망은 글쓰기로 완성되는데 이 글쓰기를 독려하는 존재는 아쑤다. 별안간 삶에 등장한 그녀는 차오차오에게 처음으로 절정에 이르게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아쑤의 입을 빌려 글쓰기가 곧 차오차오의 운명이고, 그 안에서 자아를 찾게 될 거라 끊임없이 말한다. 아쑤는 ‘이상하고 아름다운 세계’로 차오차오를 당기는데 그곳에서 ‘사랑’의 의미를 일깨워 주고자 하고 달성한다.

아쑤는 등장과 마찬가지로 퇴장도 느닷없고 그 존재를 기억하는 사람은 오직 차오차오 뿐이다. 하지만 사색할수록 생생한 기억들이 가득하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장면에서 오히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징해지곤 했다.

마지막 문장을 읽고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나는 아쑤라고 해.”
“나는 차오차오야.”
자 됐다! (p.32)

이 문단에서 오래 머물렀다. 아쑤를 만나고 결국 다 되었다는 것. 엄마를 이해하기 위한 시간들은 아쑤와 만나 서로 이해하고 포개어지면서 마침내 이루었다. 격정적인 성관계는 서로의 속마음, 삶의 궤적 등을 이해하게 장치이고, 그 근원에는 모태에서부터 이어졌던 엄마와의 관계가 있다. 차오차오는 ‘줄곧 내 몸 안에 닫힌 자아가 숨겨져 있다고 생각해왔(p.26)’고 어쩌면 그건 아쑤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두번째 소설 「이상한 집」의 주인공은 마흔살 색정 소설가다. 스스로도 별 볼 일 없는 존재라 여겼건만 뜨거운 청춘, 아름다운 외피를 걸친 타오타오라는 여자는 이런 나를 사랑한다. 급기야 함께 더없는 쾌락의 세계로 뛰어든다. 나는 타오타오를 붙들어 두기 위해 설서인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고, 계속해서 결말 없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큰이모와 작은 이모, 작은 이모의 하얀 연꽃같은 가슴에서 나온 ‘아이’의 이야기에는 사랑과 치정과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사람을 울게 하는 사탕수수밭이 있고 앳되고 순진무구한 얼굴로 죽음을 맞닥뜨린 작은 이모의 미소가 있다. 결말이 영원히 없다면 타오타오는 영원히 곁에 있을 것이다. 주인공이 엮는 이야기 속 사랑과 그녀가 하는 사랑이 닮아 있다.

세번째 소설 「밤의 미궁」에서는 주인공이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자문한다. 이 소설집의 화두라고 생각했다. 네개의 단편들을 한번에 꿰는 질문이다. 네명의 주인공이 모두 정체성을 두고 번민하는 세월을 산다. 넷은 각기 다른 사람들이지만 또 하나의 ’나‘라고 여겨지는데 작가가 서문에서 진실한 사람이 하나의 유형으로만 존재한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라(p.14)고 이미 말한 까닭이다.

「밤의 미궁」은 실험적인 문체로 주인공의 속마음을 괄호 속에 병기하고 있는데 이로써 주인공이 겪는 일련의 사건들이 어쩌면 모두 환영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의심이 일게 한다. 남편 아리, 나, 그리고 술집 미궁에서 만난 아페이 세사람이 이끌어가는 이야기 속에서 모든 인생은 미궁 속 흰 쥐가 된다. 이유도 모르고 출구를 찾지만 출구는 또다시 가중된 곤경과 완전히 낯선 미궁으로 연신 이어진다.

마지막 소설 「고양이가 죽은 뒤」는 과거와 현재 모두 고양이들이 중요한 매개체다. 다만 그들의 죽음은 너무 절망과 맞닿아 있지는 않다. 죽음 이후에 주인공 나를 둘러싼 세계가 늘 재편되고 새로운 만남이 찾아온다. 어린 시절에는 따로 살던 아버지가 나타나고, 현재 ‘고양이’를 보낸 뒤에는 2년만에 사랑하는 아마오와 재회한다.

아마오는 주인공 나의 애인이다. 중성적인-남성에 가까운-외향이 매력적인 아마오는 여자이고, 샴 고양이 아바오의 주인이다. 처음 나와 아마오의 만남을 주선한 것은 이 샴 고양이다.

‘아바오가 좋아하는 여자는 틀림없이 나를 좋아할 거예요.(p.181)’ 아마오는 과연 첫만남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뒤에 고백할 때도 ‘영혼을 빼앗긴 것처럼’ 그리고 ‘우리 생명에 서로 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걸 안다고 말한다. 플러팅의 대가다.

‘나’는 사람보다 고양이 앞에서 곧잘 속마음을 털어놓는데 1인칭 고백체로 내용 전개도 비슷하다. 애인 아마오는 마음도 주고 표현도 퍼붓고 잘 드러내지만 주인공 나는 다소간 소극적이다. 사랑하지만 남자가 아닌 여자라는 것에서 주저하다 ‘마침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고 인정한다.

요약하자면 입덕 부정기 겪다가 운명처럼 다시 만나 애인과 재결합하는 눈물 겨운 이야기고 그 속에서 아마오의 입을 빌려 삶과 정체성과 나 자신을 인정해야 종국에 사랑의 합일에 대해 말할 수 있단 걸 보여준다.

세상의 눈으로 재단하기에는 만만치 않은 주인공들이 나와서 제목이 악녀서인가 싶다. 95년도에 이 작품을 읽었다면 더 그랬을 만 하다고 여겨진다. 끝에 출간 당시 작가의 후기도 그대로 실려있다. 구판에서 무엇도 덜거나 더하지 않았다고 한다. 작가의 후기는 한 편의 고백 편지여서 이 책 전체가 일련의 고백과도 같다고 느껴진다. 앞서 실린 소설 네 편 모두 1인칭 고백체로 감정을 깊게 토로하고 속엣말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어서 줄거리보다는 인물이 가진 사랑, 정염, 갈망 그리고 엄마를 향한 근원적인 애증과 결핍 등이 더 촘촘하다. 취향에 맞다면 몇번이고 재독하게 될, 여운이 긴 책이다. 「천사가 잃어버린 날개를 찾아서」의 주인공이 말미에 엄마의 무덤(끝) 앞에서 엄마의 자궁 속(시작)인 것처럼 몸을 말았듯이, 또 첫 장으로 돌아갈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