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의 향기 / 김자인
이웃집에 살다가 이사 간 윤정엄마나 소정엄마는 나이도 비슷해서 친구처럼 지냈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을 키우며 어려운 일이 있을 땐 서로 의논하고 지낸 이웃사촌이었다. 그들이 동네를 떠나자 난 무엇을 잃어버린 듯 몹시 서운했었다. 그 뒤로 가끔 전화로 안부를 묻고 만나기도 했으나 해가 갈수록 점차 만남의 횟수도 줄어들었다.
이집트에 살다가 뉴질랜드로 떠난 소정엄마는 가끔 전화를 하거나 편지로 소식을 전해온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마음으로 전해오는 그의 향기를 느낄 수 있어 흐뭇해진다. 꽃향기는 꽃이 시들면 향기마저 없어져버리지만 만남의 향기는 그들이 떠난 후에도 내 마음속에 그리움의 향기로 남아 때론 그 향기 속에 머물 때도 많다.
한동안 소식 없던 윤정엄마가 전화를 했다. 시장엘 다녀오는데 나와 똑같은 여자가 저만치 앞서가기에 부리나케 쫓아갔다고 한다. 아파트 입구까지 따라갔는데 불러도 못 듣고 엘리베이터를 타더라는 것이다. 먼발치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바람에 나를 놓쳐서 무척 아쉬웠다며 오늘 그 아파트에 왔었냐는 것이다. 나는 그곳에 가지 않았지만 그녀도 가끔 날 생각하고 있는 듯해서 반가웠다. 윤정엄마나 소정엄마에게 나는 어떤 색깔로 각인되어 있을까가 궁금해진다.
세상을 살다보면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진다. 그 만남 속에서 끈끈한 정이 오가기도 하고 마음을 다쳐 상처를 받기도 한다. 어떤 이는 처음 만났을 때 말하는 태도와 행동에서 가까이 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한다. 한 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의 마음속은 알지 못한다고 여러 번 만나고서도 가늠하기 어려운 것이 사람의 마음일 것이다.
전생에 오백 번이나 만난 인연이 있어야 금생에 잠깐 옷자락이라도 스친다는데 부부로 만난 인연이나 형제 자식과 사제지간, 친구지간이 되려면 수 천만번 은 만난 인연일 것이다.

불교에서는 인생의 팔고(八苦) 를 말한 여덟 가지 괴로움 중에 두 가지 만남에 관한 것이 있다. 애별리고(愛別離苦)와 원증회고 (怨憎會苦)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하는 괴로움과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야하는 괴로움이다. 둘 중 하나는 누구나 겪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다면 그래도 사랑의 향기가 남아있겠지만,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야할 때는 그 괴로움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향기는 전혀 느끼지 못하고 고약한 냄새만 날 것 같다.
소설가 펄벅여사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남을 미워하지 않는 것이라 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말이 있듯, 미워하는 사람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가끔 인격과 인품이 갖추어져있고, 거기에 교양까지 지닌 사람들을 만나면 밑바닥에 가라앉은 교양이 슬금슬금 자리를 털고 일어서려 한다. 향기 나는 꽃들과 있으면 그 향기가 몸에 배듯이 교양 있는 사람들 곁에 있으면 나도 그래야지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미워하는 사람이 자신도 모르게 미워하는 사람을 닮아가듯이 교양 있는 사람들을 닮아가고 싶은 것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여러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졌지만 나보다는 남을 먼저 배려하는 사람들 만큼은 그래도 무언가 다른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 향기를 마음속 깊은 곳에 넣어 두었다가 내가 지혜의 샘이 모자랄 때마다 내 안에서 조금씩조금씩 배어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두고두고 맡아도 싫지 않고 가끔은 보고 싶고 만나고 싶은 인연의 향기를, 내 안에 담아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