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D 없음! 카세트테이프 없음! 오직 LP판만 팝니다!
요즘 이런 가게가 있을까?
아주 오래전 레코드 가게에서는 내가 원하는 노래를 공테이프에 녹음해주기도 하고
팔기도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 카세트테이프가 CD로 바뀌어 CD플레이어가 필요해졌었고
그 이후 MP3에 음악을 담아 듣기도 했던 시간들이 있었지만
요즘은 그 마저도 필요 없어진 시대가 되었다.
스마트폰에 음원을 다운로드해서 들으면 되니,
모든 기기가 필요 없게 되었다.
최근 레트로 열풍에 CD플레이어나 LP플레이어가 눈에 띄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엔 일부 사람들의 덕후활동으로 여겨지는 면이 있다.
우리나라의 LP판 제작소가 단 한 곳만 남아있다고 한다.
한 분야를 끝까지, 세상의 변화에도 꿋꿋이 지키고 있는
모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설 속의 프랭크도 그 모습이다.
주변의 변화, 권유, 압박에도
CD를 들이지 않고 오로지 LP 판매만을 고집하며
끝까지 변화들과 맞선다.
클래식, 록, 재즈, 블루스, 헤비메탈, 펑크에 이르는 모든 장르를 아우르는 조예로
사람들이 원하는 음반을 찾아줄 뿐 아니라
힘들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고민을 들으며
그에 어울리는 음악을 듣게 해 마음의 위로와 평온까지
찾아준다.
"아레사 플랭클린이 부른 <Oh No Not My Baby>라는 노래를 들어보시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될 겁니다. " -p20-
오래되고 낙후되어 오고가는 사람들이 드문 거리 '유니티스트리트'의 한 허름한 가게...
가게 주인 프랭크와 점원 키트, 문신가게의 모드, 종교 선물 가게의 앤서니 신부,
폴란드 빵집 주인 노박, 장의사의 윌리엄스 형제등
이웃과 오가는 따뜻한 정이 느껴지는 이야기와
재개발 지역으로 되어 하나 둘씩 가게 문을 닫게 되는 어려운 현실과의 싸움과 극복,
그리고 음반가게를 찾는 단골 손님들의 이야기가
프랭크가 권하는 음악들과 함께 어우러져 전개된다.
만일 영화의 장면이라면 적정한 타이밍에 흘러 나오는
OST처럼 소설속에 음악에 얽힌 이야기와 함께 음반이 소개되어
책을 읽는 중간중간 음악을 찾아서 감상하게 된다.
장르별이 아닌 프랭크만의 방식으로 분류된 음반들을 손님들에게 찾아주며
자개 옷장을 개조해 만든 청음실에서 감상하는 모습을 함께 떠올려보게 된다.
평범한 날들중 어느 날 가게 앞에서 쓰러진 녹색원피스의 여인 '일사 브로우크만'이 나타나면서부터
프랭크의 잔잔한 생활에 파도를 일으킨다.
남다른 엄마 페그에 의해 남다른 어린시절을 보낸 프랭크의 사랑에 대한 트라우마는
일사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지나치게 절제하게 하며
혼자만의 소극적인 사랑으로 간직하려 한다.
처음 비발디의 <사계>를 추천 받으며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일사는
매주 1회 만나서 추천하는 음악과 그 음악에 얽힌 이야기를 해 줄 것을 제안하고...
일사와의 시간들은 프랭크에겐 설레임이기도 또 고통이기도 하지만
그 감정의 절제에 소설속 주변인과 독자까지 안타깝게 만든다.
프랭크가 손님과 일사에게 해주는 음악에 얽힌 이야기는
어린시절 언제나 음악과 함께하던 엄마 페그를 통해 늘 들어왔던 이야기로,
소설의 한 장면마다 과거 엄마 페그와의 장면들이
현재와 겹쳐서 오고간다.
"음악에서는 침묵의 순간이 중요해."
"침묵에서 출발해 침묵으로 돌아가는 게 음악의 여정이야."
"음악이 시작될때의 침묵과 끝날때의 침묵은 달라."
"좋은 음악을 듣고 나면 세상이 달라 보여"
"사랑에 빠지는 경우와 비슷하지만 음악은 결코 상대를 배신하지 않아 " -p58-
음악을 사랑하며 음반 사는데 돈을 쏟아부은 엄마 페그와 여섯 살 프랭크가 바닥에 누워
<베토벤 교향곡 제 5번 운명>을 듣는 장면의 대화다.
두 부자가 나란히 누워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담은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들으며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페그가 세상을 떠난 지 15년이 지나서는
어머니가 좋아했던 곡을 마음이 아파 듣지 못한다.
책은 A면 1988년 1월부터 B면 2월, C면 3월의 3개월동안 일어난 일들이다.
일사와의 만남과 헤어짐, <포트개발>의 재개발에서 유니티스트리트를 지키려는 노력도
프랭크의 가게에 불이 나면서 모두 허사가 된다.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 프랭크와 함께 주변가게와 거리는 폐허가 되고
재개발 유혹으로 사기당한 상점 주인들은 뿔뿔히 흩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