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평이 넘는 제법 넓은 마당에 은행나무는 아직 청청하고,
자귀 나무는 분홍색 깃털을 가진 어여쁜 새들이 내려 앉아
고개만 푸른 잎 사이에 감추고 있는 것처럼 화려하게 하늘대고,
담 모퉁이의 빨랫줄 아래 자생한 맨드라미꽃은
장닭의 벼슬처럼 도도하고 검붉고,
장마통에 여기저기 웃자란 잡초만 제거해준다면
잔디의 푸르름도 반드르르 한결 더 윤기가 흐를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들은 이제 전성기에 있지 않았다.' -p35-
국회의원 경력을 가졌던 맹범씨가 손자를 보는 이야기를 담은
'애 보기가 쉽다고?'이야기가 인상깊다.
최근 퇴직한 신중년들이 눈에 많이 띄였던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퇴직후에도 아주 젊은 요즘의 할아버지들은
제2의 인생 준비에 여념이 없는 듯하다.
그동안 못해본 새로운 일들에 도전하기 위해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는 젊은 노년들의 모습이
책 속 풍경과는 사뭇 다르지만
단편 속에서 애를 보는 맹범씨의 모습과 겹쳐서 생각된다.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돈 한푼 없이 거리로 나온
맹범씨의 육아 분투기가 짠함으로 시작되었는데,
구멍가게에서 천원짜리 한장을 꾸어, 전철을 처음 타보고
약국에서 아기 기저귀를 낱장으로 구하고,
재개발 지역의 주민에게 물 한바가지를 가까스로 얻고
구멍가게에서 아이 우유를 사는 등
여러 수난과 고초를 겪으며 느꼈을 맹범씨의 생각들이 흥미롭고 진지했다.
마지막 반전은 또 독자의 예상을 벗어난 행동이었다.
문득 그의 모습이 역내의 대형 거울에 비쳤다.
저 늙은이는 누굴까.
저 늙고 초라하고 더럽고 비굴한 늙은이는 누구란 말인가.
그 늙은이가 그가 매일 아침 거울에서 봐 온 품위 있고 건강하고
자신있게 늙어가는 자신이란 말인가. -p69-
'도둑맞은 가난' 에서 실제로는 부잣집 도련님이던 상훈이
자신과 함께 한 시간이
가난체험중이었던 사실에 일류 재봉사를 꿈꾸던 나(주인공)는
가난뱅이 짓을 장난삼아 해보는 부자들이 훔쳐간 가난을
분하게 생각한다.
나는 우리 집안의 몰락의 과정을 통해
부자들이 얼마나 탐욕스러운가를 알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부자들이 가난을 탐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해 본 일이었다. -p330-
빛나는 학력과 경력도 모자라 가난까지 훔쳐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의 에피소드로 삼는
부자들을 통해 깜깜한 절망을 느꼈다는 주인공의 생각에
뭔가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끔찍한 빈민굴을 벗어나라며 옷가지를 사라고 주는
상훈의 돈과 제안을 거부하고,
비굴하게 굴지 않은 주인공의 모습은 그래도 당당함이 느껴진다.
오히려 혼비백산 도망치는 상훈이 아둔하고 맹추스럽고 백치스럽게 보인다.
모든 것이 풍요롭고 넉넉해진 요즘의 환경이지만,
그 속에서 느끼는 격세지감과 불안, 절망같은 것들이 뒤섞여
착잡함이란 감정이 생겨난 것 같다.
구병모, 김중혁, 김연수, 성해나, 한 강 등 31명의 한국 대표 소설가들이 뽑은
박완서 작가님의 단편소설 10편을 '쥬디 할머니'를 통해
다시 읽으며 작가님의 다정하고 편안한 미소를 떠올려 보게 되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