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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여자 - 일상에 도전하는 철학을 위하여
줄리엔 반 룬 지음, 박종주 옮김 / 창비 / 2020년 4월
평점 :
저자는 서점의 서가를 걷다가 지혜를 선사한다는 책들은 대개 죽은 남성 철학자의 의견으로 채워져 있는 것을 보고 ‘살아있는 여성 사상사’들의 생각을 엮어서 책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 생각에서 이 책이 출발했고 그들을 인터뷰하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며 ‘사랑, 놀이, 일, 두려움, 경이, 우정’ 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남성이 월등히 많은 학교와 회사를 다녔던 나는 알게 모르게 그들의 생각과 결을 같이 하기도 하다가 가끔은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분노할 때도 있었다. 여성 리더의 부재로 인해 롤모델을 찾기가 어려웠고 롤모델이라고 제시되는 홍보 자료에는 남성의 시선으로 인터뷰한 (예를 들면, 회식에 무조건 참석하기, 일과 가정의 양립 등) 내용으로 공감하기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 책은 사회 각층에서 저명한 여성 사상가들의 이야기를 담았다는 내용이 마음에 들었고 그래서 읽게 되었다. ‘철학 에세이’라고 이름 붙여져 있어 읽기 쉬울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먼저 가장 좋았던 장부터 언급하고 싶다. 6장, ‘우정’ 부분이었다. 이 책은 저자의 경험을 에세이적으로 표현하는 파트와 사상가와의 인터뷰 그리고 이론 정리 식의 구성을 취하고 있다. 에세이적으로 표현하는 부분은 저자의 개인적 경험이 나오는 부분인데 책으로 내기 쉽지 않았을 내용을 용기있게 써준 덕분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이 장에서는 저자의 어릴 적 친구 ‘조’와의 경험을 적어놓았는데 그들이 어릴적 서로에게 얼마나 의지했는지, 지적 대화를 하며 얼마나 즐거웠는지 등이 적혀있다.
내 친구 조와 나는 1989년에 대학교에서 만났고 우리 둘 다 에술창작 학위과정에 있었다. 우리는 동료 작가, 음악가, 시각예술가, 배우들과 어울렸다. 나는 열여덟, 그녀는 스무살이었다. 경이롭고 복잡하고 흥미진진한 아이디어들의 세계가 우리를 향해 열려 있었다. 우리 우정의 초기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내가 그녀를 닮고 싶어했다는 점이다. 내 목소리가 조의 목소리를 더 닮기를, 그에 담아낼 수 있었던 따스함을,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사람들이 혼자서 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을 질문을 하는 그녀의 모습을 더 닮기를 원했다. (282면)
어린 시절의 반짝거리는 우정은 일이 바빠 허우적대는 동안까지 유지되었지만 망상증과 편집증이 있던 조는 결국 길에서 타격을 당해 죽고 말았다.
조가 살아 있었을 때 우리의 우정에는 실제로 여행과 이사와 병과 보살핌이 여러층을 이룬 복잡한 부침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죽은 후로도 나는 그녀의 영향을 받고 있다. 요즈음은 때로 우리 사이의 이곳저곳, 이 사람 저 사람에 대한 단속적인 대화를 상상한다. (중략) 물론 그녀가 죽은 후에도 계속해서 다른 여러 우정을 형성하고 그속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훗날 인생에서 일과 가족에 헌신하는 와중에 제한된 시간과 에너지의 압박에 맞서며 맺은 많은 우정은, 우리가 이십대였을 때 조와 내가 서로에게 주었던 삶의 힘(조에)으로서 가능했던 충만함과 긍정적인 생명력을 결여하고 있음을 본다. (321,322면)
이 장에서 우정에 대해 말하기 위해 여성학자이자 철학자인 로지 브라이도티의 사상이 적혀있다. 철학자답게 ‘주체’라든지 ‘일원론’이라든지 등의 개념이 많이 소개된다. 이해 안 되는 부분을 억지로 읽으려고 하지 않고 가볍게 넘겼다.
우정이 이 ‘긍정적 차이’라는 관념을 함양할 수 있을 하나의 조건인지 브라이도티에게 물었다.
‘네, 우정이란 게 결코 완수되지 않을 어떤 실천, 기획을 뜻한다면 말이죠. 조금 거슬러올라가보자면, 저는 우정에는 에로스 또한 많이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말하는 에로스란 인식애적 호기심, 너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거예요.’ (316면)
‘친구란 계속해서 연락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그녀는 ‘그들이 성장하는 여러 순간에, 때로는 무너지는 순간에 가까이 있으려 하죠. 힘든 일이에요’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317면)
정말 어려운 개념이 많았지만 나는 이 챕터에서 결국 ‘우정’이란 서로 긍정적인 기운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사람들끼리 존중받고 있다는 마음을 나누며 노력하고 지적 호기심을 나누며 사유하는 관계라고 이해했다. 거창하게 표현된 것 같지만 결국 우정을 나누는 관계는 나와 결을 같이 하고 관심사가 비슷하며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관심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실 책이 전반적으로 너무 어려웠다. 특히 제4장 두려움에 나오는 비체화라는 개념은 두 번 읽어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아 힘들었다.
크리스떼바는 비체화란 무엇보다도 모호성이라고 말한다. 이는 ‘쥐고 있던 것을 놓는다 해도 이것이 주체를 위협하던 것으로부터 근본적으로 주체를 끊어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비체화는 (주체가) 영속적인 위험 속에 잇음을 자인한다. 따라서 배티와 같은 주체는 타자의 증오에 얽히거나 엮여 잇는 것과 같다. 그녀는 자신의 공포로 인해 완전히 변해 있다. 그 공포 자체는 ‘액체성의 안개’이자 ‘환각적인, 유령 같은 미광’으로서, 접근할 수 없으면서도 친밀한 것이다. (181면)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1장 사랑에 나오는 ‘간통’에 대해서는 동의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가정이란 곳이 작은 ‘사회’라는 것도 동의하고 거기서 뻗어나가 가정을 ‘가석방 없는 종신’(34면) 이라고 표현하거나 ‘일종의 강제노동수용소’(34면)로 표현하는 것까지는 가까스로 이해했으나 결혼은 ‘복종’(35면)을 필요로 하고 ‘간통은 정치적 행위’(32면)라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흐름이 끊겼다.
이해가 가지 않고 동의하기 힘들었던 부분은 책을 덮는 순간까지 나를 따라왔다. 그러나 옮긴이 후기를 읽으며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니구나 느꼈다.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옮긴이지만 ‘충분히 이해되지 않는 개념들이 있다’고 적은 것을 보며 책을 읽으며 내가 이해력이 딸리는 것인가 자책했던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
사실 철학서를 마음 잡고 읽어보려고 매번 노력했으나 실패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 책은 힘든 개념이 나올 때 쉬어가는 코너 같이 저자의 에세이가 가볍게 담겨있다. 저자의 경험과 철학적 개념이 잘 어우러져 이해가 쉬운 부분도 있었고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그래도 어찌됐든 이 책의 집필 이유, 살아 있는 여성의 철학을 담았다는 내용 자체로도 충분한 매력이 있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