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나무들
헤르만 헤세 지음, 안인희 옮김 / 창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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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지금까지 벗어나지 않고 있지만, 주택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 생각은 딸이 태어나고 나니 더 강해진다. 나의 어린 시절은 어땠을까. 자연에서 뛰놀던 때가 있었을까? 아파트 단지 옆은 지금처럼 건물로 빽빽하지 않았고 군데군데 방치되어 있는 땅도 많아서 거기서 뛰어놀고 자전거 연습도 하고 했던 것 같다. 놀다가 올챙이를 본 적도 있는 것 같다. 할머니 집에 놀러기면 더 뛰어놀 수 있는 곳이 있었다. 엄마는 나와 내 동생 손을 끌고 논이 얼어서 생긴 스케이트장도 곧잘 데리고 갔었다. 지금 지어진 아파트처럼 화려한 조경은 없었지만, 단지 내의 나무들은 크고 푸르게 자랐다. 단지가 마치 거대한 숲 같았다.
헤르만 헤세의 페터 카멘친트를 읽으며 작가가 얼마나 자연을 사랑하는지 느꼈었다. 소설의 1장에서 그는 고향인 산악지대에서 자연을 보고 사유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다. 이런저런 일을 겪고 여러 사람을 만나지만 결국 고향으로 돌아온다. 자연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그리고 얼마나 다정한 친구가 되어줄 수 있는지 표현한다. 그래서 이 책이 궁금했고 서평단 모집을 신청해서 읽게 되었다.
책이 일단 예쁘다. 표지부터 취향 저격인데, 책 내부의 세밀화도 적절하게 나와 읽는 중간중간 기분이 좋아진다.
책이 얇고 가볍다. 한 챕터 씩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 헤르만 헤세의 나무 사랑을 엿보며 조용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근사한 나무 밑에서 읽는다면 더욱 좋겠다는 생각. 요즘의 완벽한 날씨가 그 분위기를 더욱 매만져 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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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여자 - 일상에 도전하는 철학을 위하여
줄리엔 반 룬 지음, 박종주 옮김 / 창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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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서점의 서가를 걷다가 지혜를 선사한다는 책들은 대개 죽은 남성 철학자의 의견으로 채워져 있는 것을 보고 ‘살아있는 여성 사상사’들의 생각을 엮어서 책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 생각에서 이 책이 출발했고 그들을 인터뷰하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며 ‘사랑, 놀이, 일, 두려움, 경이, 우정’ 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남성이 월등히 많은 학교와 회사를 다녔던 나는 알게 모르게 그들의 생각과 결을 같이 하기도 하다가 가끔은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분노할 때도 있었다. 여성 리더의 부재로 인해 롤모델을 찾기가 어려웠고 롤모델이라고 제시되는 홍보 자료에는 남성의 시선으로 인터뷰한 (예를 들면, 회식에 무조건 참석하기, 일과 가정의 양립 등) 내용으로 공감하기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 책은 사회 각층에서 저명한 여성 사상가들의 이야기를 담았다는 내용이 마음에 들었고 그래서 읽게 되었다. ‘철학 에세이’라고 이름 붙여져 있어 읽기 쉬울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먼저 가장 좋았던 장부터 언급하고 싶다. 6장, ‘우정’ 부분이었다. 이 책은 저자의 경험을 에세이적으로 표현하는 파트와 사상가와의 인터뷰 그리고 이론 정리 식의 구성을 취하고 있다. 에세이적으로 표현하는 부분은 저자의 개인적 경험이 나오는 부분인데 책으로 내기 쉽지 않았을 내용을 용기있게 써준 덕분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이 장에서는 저자의 어릴 적 친구 ‘조’와의 경험을 적어놓았는데 그들이 어릴적 서로에게 얼마나 의지했는지, 지적 대화를 하며 얼마나 즐거웠는지 등이 적혀있다.

내 친구 조와 나는 1989년에 대학교에서 만났고 우리 둘 다 에술창작 학위과정에 있었다. 우리는 동료 작가, 음악가, 시각예술가, 배우들과 어울렸다. 나는 열여덟, 그녀는 스무살이었다. 경이롭고 복잡하고 흥미진진한 아이디어들의 세계가 우리를 향해 열려 있었다. 우리 우정의 초기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내가 그녀를 닮고 싶어했다는 점이다. 내 목소리가 조의 목소리를 더 닮기를, 그에 담아낼 수 있었던 따스함을,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사람들이 혼자서 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을 질문을 하는 그녀의 모습을 더 닮기를 원했다. (282면)

어린 시절의 반짝거리는 우정은 일이 바빠 허우적대는 동안까지 유지되었지만 망상증과 편집증이 있던 조는 결국 길에서 타격을 당해 죽고 말았다.

조가 살아 있었을 때 우리의 우정에는 실제로 여행과 이사와 병과 보살핌이 여러층을 이룬 복잡한 부침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죽은 후로도 나는 그녀의 영향을 받고 있다. 요즈음은 때로 우리 사이의 이곳저곳, 이 사람 저 사람에 대한 단속적인 대화를 상상한다. (중략) 물론 그녀가 죽은 후에도 계속해서 다른 여러 우정을 형성하고 그속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훗날 인생에서 일과 가족에 헌신하는 와중에 제한된 시간과 에너지의 압박에 맞서며 맺은 많은 우정은, 우리가 이십대였을 때 조와 내가 서로에게 주었던 삶의 힘(조에)으로서 가능했던 충만함과 긍정적인 생명력을 결여하고 있음을 본다. (321,322면)

이 장에서 우정에 대해 말하기 위해 여성학자이자 철학자인 로지 브라이도티의 사상이 적혀있다. 철학자답게 ‘주체’라든지 ‘일원론’이라든지 등의 개념이 많이 소개된다. 이해 안 되는 부분을 억지로 읽으려고 하지 않고 가볍게 넘겼다.

우정이 이 ‘긍정적 차이’라는 관념을 함양할 수 있을 하나의 조건인지 브라이도티에게 물었다.
‘네, 우정이란 게 결코 완수되지 않을 어떤 실천, 기획을 뜻한다면 말이죠. 조금 거슬러올라가보자면, 저는 우정에는 에로스 또한 많이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말하는 에로스란 인식애적 호기심, 너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거예요.’ (316면)

‘친구란 계속해서 연락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그녀는 ‘그들이 성장하는 여러 순간에, 때로는 무너지는 순간에 가까이 있으려 하죠. 힘든 일이에요’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317면)

정말 어려운 개념이 많았지만 나는 이 챕터에서 결국 ‘우정’이란 서로 긍정적인 기운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사람들끼리 존중받고 있다는 마음을 나누며 노력하고 지적 호기심을 나누며 사유하는 관계라고 이해했다. 거창하게 표현된 것 같지만 결국 우정을 나누는 관계는 나와 결을 같이 하고 관심사가 비슷하며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관심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실 책이 전반적으로 너무 어려웠다. 특히 제4장 두려움에 나오는 비체화라는 개념은 두 번 읽어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아 힘들었다.

크리스떼바는 비체화란 무엇보다도 모호성이라고 말한다. 이는 ‘쥐고 있던 것을 놓는다 해도 이것이 주체를 위협하던 것으로부터 근본적으로 주체를 끊어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비체화는 (주체가) 영속적인 위험 속에 잇음을 자인한다. 따라서 배티와 같은 주체는 타자의 증오에 얽히거나 엮여 잇는 것과 같다. 그녀는 자신의 공포로 인해 완전히 변해 있다. 그 공포 자체는 ‘액체성의 안개’이자 ‘환각적인, 유령 같은 미광’으로서, 접근할 수 없으면서도 친밀한 것이다. (181면)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1장 사랑에 나오는 ‘간통’에 대해서는 동의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가정이란 곳이 작은 ‘사회’라는 것도 동의하고 거기서 뻗어나가 가정을 ‘가석방 없는 종신’(34면) 이라고 표현하거나 ‘일종의 강제노동수용소’(34면)로 표현하는 것까지는 가까스로 이해했으나 결혼은 ‘복종’(35면)을 필요로 하고 ‘간통은 정치적 행위’(32면)라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흐름이 끊겼다.

이해가 가지 않고 동의하기 힘들었던 부분은 책을 덮는 순간까지 나를 따라왔다. 그러나 옮긴이 후기를 읽으며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니구나 느꼈다.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옮긴이지만 ‘충분히 이해되지 않는 개념들이 있다’고 적은 것을 보며 책을 읽으며 내가 이해력이 딸리는 것인가 자책했던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

사실 철학서를 마음 잡고 읽어보려고 매번 노력했으나 실패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 책은 힘든 개념이 나올 때 쉬어가는 코너 같이 저자의 에세이가 가볍게 담겨있다. 저자의 경험과 철학적 개념이 잘 어우러져 이해가 쉬운 부분도 있었고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그래도 어찌됐든 이 책의 집필 이유, 살아 있는 여성의 철학을 담았다는 내용 자체로도 충분한 매력이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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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로하, 나의 엄마들 (양장)
이금이 지음 / 창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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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페이지를 빨리 넘기다가도 책이 끝나가는게 아까워서 천천히 넘기게 되는,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이 흥미진진한 내용이 펼쳐지는 이 소설! 1917년 버들, 홍주, 송화가 한국을 떠나 ‘사진 결혼’으로 하와이로 정착하면서 겪게 되는 눈물 겹지만 재밌고 감동이 넘치는 이야기다.
열여덟 살 소녀 셋이 낯선 땅에 가서 서로 의지하고 닥친 현실을 헤쳐 나가는 장면이 먹먹하지만 기특하기도 했고 때때로 즐겁기도 했다. 하와이에 가면 공부할 줄 알고 떠난 버들이 결국 생업에 내던져(?)지고 무뚝뚝한 남편에 대한 서러움을 터뜨릴 때 나도 함께 울 뻔했다. 엉엉. 나라를 떠났지만 결국 하와이에서도 영원한 외지인인 우리나라 사람들끼리 뭉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애쓰는 모습이 뭉클했다.
양반, 돈으로 양반을 산 상인 출신, 무당 출신 셋인 그녀들도 하와이에서는 그저 이민자이고 어쩔 때는 동등한 사람 취급도 못 받는다. 고단한 생업에 서러운 대접에서도 그녀들의 삶은 빛나고 씩씩하다. 소설은 잊고 지내는 그 시대 소녀들의 삶도 조명하고 그로 인해 우리는 현재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돌아보게 만드는 울림을 준다.
나는 이 책을 어머니한테도 그리고 아는 동생한테도 추천하고 싶다. 하와이에서 낯선 사람에게 환영의 인사로 레이를 걸어주는 것처럼 나도 그런 느낌을 추천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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