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잘못된 것 같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잘못된 건지 명확하게 알 수 없었다. 하긴, 정답이라는 게 과연 존재할까 싶었다. - P19

"형, 나는 사랑도 만들어 간다고 생각해." - P36

"일반 학교에 다녀 보니까, 그 아이들도 부모들과 웬만해서는 부딪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생활하고 있더라고."
잠시 생각에 잠긴 노아가 다시 툭 한마디 내뱉었다.
"귀찮다나?"
"귀찮아?"
되묻자, 녀석이 끄덕였다.
"그 말을 듣는데 좀 짜증이 났어."
"왜?"
허공을 바라보던 노아의 시선이 천천히 내게로 돌아왔다.
"행복에 겨운 새끼들이지. 낳아서 키워 주고 돌봐 줬는데 부모가 귀찮다? 나쁜 자식들이야, 진짜. 이렇게 말이야.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어."
"......"
"부모들도 저 녀석들을 귀찮아하지 않을까? 저 녀석들에게 짜증도 내고 화도 내지 않았을까? 나는 절대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고 생각하거든." - P41

그래, 노아의 말처럼 이 세상에 원인 없는 결 과는 없을 것이다. 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어, 하고 상대를 원망하 기 전에 그 상대를 그렇게 만든 진짜 원인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하지만 이 인과 관계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 P42

사람들은 꽤나 근본을 중시했다. 원산지를 따져 가며 농수산물을 사 먹듯 인간도 누구에게서 생산되었는지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내가 누구에게서 비롯되었는지 모른다는 것이 그렇게 큰 문제일까? 나는 그냥 나다. 물론 나를 태어나게 한 생물학적 부모는 존재할 테지만, 내가 그들을 모른다고 해서, 그들에게서 키워지지 않았다 해서 불완전한 인간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나는 누구보다 나 자신을 잘 알고 있으니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정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이, 나의 부모가 누구인지보다 훨씬 가치 있는 일 아닐까? […] 생물학적 부모가 누구인지 알고, 그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이 특권 의식을 느낄 만큼 그리 대단한 일일까? 그렇게 소중해서 매일같이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살아가는 것일까? - P42

생각이 많다는 건 칭찬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다만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물론 가끔은 쓸데없는 생각들이 세상을 바꾸는 경우도 있겠지만 말이다. - P51

"나는 네가 차별 없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를 바란다."
"사회는 원산지 표시가 분명한 것을 좋아하잖아요." - P51

부모 면접을 보고 싶다면서 아이를 좋아한다고는 생각해 본 적 없다니. 개인적인 사정은 또 뭘까? 돈 문제겠지. 두 사람은 보정하지 않은 홀로그램처럼 말과 행동 또한 거침이 없었다. 센터를 찾는 대부분의 프리 포스터들이 정부의 혜택을 원하는 것과 결국은 같은 목적일 테지만, 굳이 차이를 따지자면 진실을 애써 감추느냐 솔직히 털어놓느냐였다. - P57

누군가가 나를 꿰뚫고 있다는 기분은 썩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감사한 경우도 있다. 나를 잘 알고 있음에도 전혀 내색하지 않고 배려하는 모습이 그렇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 대해 쉽게 말하고 또 쉽게 생각한다. 내가 알고 있는 상대가 전부라고 믿는 오류를 범한다. 그런 사람 중에서 진짜 상대를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자기 마음조차 모르는 인간들인데. - P61

"가끔 생각하고는 해요. 유전자를 무시할 수 없다면······ 저를 낳은 부모도 저와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겠지, 하고. 아이가 생기자 그분들은 제가 자신들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곰곰이 생각해 봤을 거예요. 결국 필요 없다고 판단한 거죠. 물론 어디까지나 제 상상에 지나지 않아요.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의논할 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을지도 몰라요. 나라는 존재는 깨끗이 잊었겠죠. 저는 가시처럼 뾰족한 성격을 물려받았고요. 어쨌든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랐다면······ 제 삶도 썩 편하지는 않았겠네요." - P75

바깥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를 과연 몇 명이라고 생각할까? 아니면 몇 개라고 생각할까? 이런 것들이 쓸데없는 궁금증인 걸까. 헬퍼는 기능도 종류도 다양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딱 맞는 헬퍼를 고르려고 노력한다. 이를테면 이곳 센터의 아이들이 부모를 선택하는 것처럼. 그런데 과연 완벽하게 딱 맞는다는 것이 존재할까? - P77

아무리 강한 힘으로 권력을 얻었다고 해도, 전 우두머리의 새끼를 물리치고 약한 상대를 짓밟는다고 해도, 승리의 시간은 결코 영원하지 않을 테니까. - P89

"그럼 이곳에 오는 다른 사람들은 준비가 됐고요?" 나는 박이 말한 준비의 의미를 알고 싶었다. 부모가 된다는 건 과연 무엇일까? 아이를 맞이할 준비란? 준비를 하면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 물론 박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대략은 알고 있었다. 새 가족을 맞이한다는 건 생각보다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니까. - P91

"프리 포스터들은 마치 육아 서적을 열심히 읽은 후에 자, 이만 하면 아기를 낳아도 되겠어, 생각하는 사람 같지 않나요?"
"······"
"세상 어떤 부모도 미리 완벽하게 준비할 수는 없잖아요."
"······"
"부모와 아이와의 관계, 그건 만들어 가는 거니까요." - P91

때로는 부모이기에 나약하고, 부모이기에 무너져 내릴 때가 있겠지. 거짓말도 하고, 잘못된 판단도 하겠지. 노아의 전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부모에게 길을 안내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고 어깨를 빌려줘야 하는 상황도 생기겠지. - P92

"네가 만약 살아남은 새끼 원숭이 에드거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너도 던컨이 그랬듯 공격적인 수컷이 되어 지금의 우두머리를 처단할 것 같니?"
박의 질문을 듣자 나는 문득 이 책의 저자가 왜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새끼 원숭이에게 ‘에드거(Edgar)‘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는지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새끼 원숭이의 이름이 에드거잖아요. 에드거라는 이름의 어원은 행복을 만드는 사람, 뭐 그런 거래요. 이 녀석이 영리하다면 복수심 때문에 아론이나 던컨처럼 평생 불안해하며 살지는 않을 것 같아요. 에드거의 행복은 그야말로 녀석의 손에 달려 있으니까." - P94

자꾸 박의 그늘진 얼굴이 떠올랐다. 마치 환영처럼, 빛의 잔상처럼······ 그래, 박도 사람이었다. 작은 일에도 고민하고 힘들어하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 - P99

진실은 자신에게 이득이 될 때에만 쓸모가 있다. 그게 진실의 역할이었다. 사람들이 NC 출신과 자신들은 다르다고 선을 긋는 것이 이득이라고 믿는다면, 그게 곧 진실이 될 수밖에 없었다. - P104

"반가웠어. 너는 되게 어른스럽다. 어른인 우리보다 훨씬."
"어른이라고 다 어른스러울 필요 있나요."
이것 역시 책에서 읽은 내용인데, 모든 어른의 가슴속에는 자라지 못한 아이가 살고 있다고 했다. 여자의 가슴속에 발레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열 살 아이가 살고 있는 것처럼. - P109

"세상의 모든 부모는 불안정하고 불안한 존재들 아니에요? 그들도 부모 노릇이 처음이잖아요. 누군가에게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건 그만큼 상대를 신뢰한다는 뜻 같아요. 많은 부모가 아이들 에게 자기 약점을 감추고 치부를 드러내지 않죠. 그런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신뢰가 무너져요." - P111

우리는 양 떼가 아니기에, 양치기 개가 몰아가는 대로 우르르 움직일 수 없었다. 우리가 원하는 진짜 어른은 자신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다고 믿고, 자신들이 모르는 걸 우리가 알 수 있다고 믿으며, 자신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우리가 느낄 수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이었다. - P112

원칙과 규율을 칼같이 지키는 것보다 힘든 것은 원칙을 어기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유를 허락하는 일이었다. - P113

박은 꼭 노아에게 걸맞은 부모를 찾아 줄 것이다. 좀 욱하는 성격이 문제지만, 그 나름 생각이 깊은 녀석이다. 노아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가젤이나 얼룩말, 기린인지도 몰랐다. 부모를 만남과 동시에 뛰고 걷고 말하고 생각할 수 있는 아이들. 그럼에도 오롯이 혼자만의 힘으로 살아가기 버거운,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한 아이들. 만약 진짜 인간이 그렇게 태어날 수만 있다면 잠재의식 속에 남아 있는, 그러나 기억할 수 없는 어릴 적 상처나 아픔이 조금은 덜하지 않을까. 가젤이라······. - P122

"나를 위해서야, 나를 위해서······."
두 사람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세상이 멈춰 버린 것 같았다. 짧은 순간 머릿속에 많은 것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생물학적 부모가 누군지 모를 뿐, 나는 상처 받은 어린 시절도 없다. 나는 감히 박의 아픔을 가늠할 수 없다. 그런데도 박이 겪은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부끄러웠다. 박과 최, 아키와 노아 앞에서 잘난 척하면서 떠들곤 했던 나 자신이······. - P142

‘세상 어떤 부모도 미리 완벽하게 준비할 수는 없잖아요.‘
‘부모를 결정하는 선택권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다. 아닌가요?‘
쿵쾅거리던 심장이 차차 가라앉았다. 가슴속으로 서늘한 바람 한 줄기가 지나갔다. 사람들이 NC 센터를 오해하듯이 나도 나만의 틀 속에 세상을 가둬 놓고 그게 전부라고 믿었다. 그 너머를 상상하지 않으려 했다. 지금까지 나는 그런 시선으로 무엇이든 멋대로 평가해 온 것이다. - P142

자신이 갖지 못한 것, 이루지 못한 꿈을 자식을 통해 이루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꿈이고 목표다. 아무리 하나의 어머니가 최고의 환경과 최고의 교육을 동경했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그 어머니의 꿈에 지나지 않았다. 하나는 어머니와 전혀 다른 인격체였고, 전혀 다른 꿈을 가진 한 명의 사람이었다. - P158

어쩌면 지금도 많은 아이들이, 자신의 꿈이 아닌 부모 꿈의 대리인으로 살아가는지도 몰랐다. 아니, 자신이 대리인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있을 수도······.
문득 일전에 하나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결국 내가 나를 이룬다고 믿는 것들은 사실 내가 모르는 사이 에 만들어진 것들이잖아. ······그럼 기억이 형성되기 전의 나는 어떻게 키워졌을까?‘ - P159

온전한 자기 자신을 찾는다는 건, 그게 누구든,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내가 나를 이루는 요소라고 믿는 것들이 정작 외부에서 온 것일 수도 있으니까.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 낯선 사람과 친구가 되기까지 적잖은 시간이 걸리듯, 내가 나를 알고 친해지기까지, 그렇게 스스로를 이해하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 P159

"엄마와 나를 분리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어. 엄마는 그런 나를 보면서 심한 배신감을 느꼈지. 당신은 나를 위해 모든 삶을 희생하고 언제나 최선을 다했는데, 나는 더 이상 엄마 따위는 필요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거였어. 그럴수록 나는 엄마가 아닌 내 삶을 향해 나아갔고, 어느새 독립할 나이가 되었어. 지극히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여겼어. 그런데, 그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됐어."
"뭔데요?"
"내가 엄마에게서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독립이 필요했듯이······."
"······."
"엄마 역시 나로부터 독립이 필요했다는 걸 말이야." - P160

독립이란 성인이 된 자녀가 부모를 떠나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의 말처럼, 어쩌면 부모 역시 자녀 로부터 독립할 필요가 있는 건지도 몰랐다. 자녀가 오롯이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걸 부모에 대한 배신이 아닌 기쁨으로 여기는 것, 자녀로부터의 진정한 부모 독립 말이다. - P160

"한 가족이 된 것을 기뻐할 때도 있을 테고, 후회할 때도 있을 거야. 너도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 거야. 얼굴 표정, 목소리만으로 서로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알 정도로 가까워지겠지. 그렇게 되기까지 제법 많은 시간이 필요할 거야. 내가 친구들과 그랬듯이. 해오름과 부부가 되었을 때 또 그랬듯이." - P163

나는 테이블에 놓인 그림을 물끄러미 보았다. 이걸 그리기 위해 해오름은 꽤 시간을 들였겠지. 재능은 얼마나 잘하는가에 달려 있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절대 멈추지 않는 것, 그게 재능 같았다. 싸우고 다투고 매일같이 상처를 입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어지지 않는 가족처럼 말이다. 아니, 그건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는 무엇 아닐까. - P167

"사실은 너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구나."
"······저도 저를 모르는걸요."
나도 내 자신이 낯설게 느껴졌다.
"네가 나에게 시간을 더 주는구나."
문득 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를 더 알아 갈 수 있는 시간." - P169

일 년 내내 맑은 날만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구름과 비바람이 없다면 살아남을 식물이 있을까. 이 세상은 사막이 될지도 모른다. - P174

우리는 더 좋은 부모, 더 능력 있는 부모를 기다리는 게 아닐지도 몰랐다. 그저 나와 인연이 닿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뿐일지도. 탯줄처럼, 신비한 끈처럼 이어진 누군가를 말이야. - P175

부모에 대한 우리의 기대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만날 부모만큼은 진심으로 아이를 아껴 주고 경제적으로 풍족 하고 지성과 교양을 갖춘, 완벽한 사람일 것이라는 기대. 그러나 몇 번의 페인트를 거치면서 알게 된다. 우리도, 그들도, 조금씩 문턱을 낮추고 어느 정도 타협하는 심정으로 변한다는 것을 말이다. - P184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마주한다는 건 생각보다 큰 용기를 필요로 하니까. 박의 용기가 과연 그 자신에게 어떤 것을 가져다주었는지 궁금했다. 박이 없는 동안 나는 그의 말을 곱씹어 보고는 했다.
‘나를 위해서야. 나를 위해서······.‘ - P185

박의 말처럼 어떤 시대든 차별은 존재했다. 그러나 그 차별과 억압을 조금씩 부숴 나가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의 발전이기도 하다. - P194

잘 닦인 고속도로를 놔두고 좁고 험한 길을 택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하지만 찾는 사람이 늘면 언젠가는 좁고 험한 길도 넓고 평평해질 것이다. 시작은 돌멩이 하나를 치우는 일일 것이다. 벌써 누군가는 돌멩이를 멀리 풀숲으로 던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뒤에 오는 사람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 P194

물론, 나도 앞날을 생각하면 두려웠다. 그러나 분명 기회는 있을 것이다. 그것이 기회임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노력만 한다면 말이다. 나는 아직 세상에 나가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벌써부터 지레 겁먹을 필요가 있을까? 할 수만 있다면 다양한 경험을 해 보고 싶다. 그 속에서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 - P195

모른다는 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모르기 때문에 배울 수 있고, 모르기 때문에 기대할 수 있으니까. 삶이란 결국 몰랐던 것을 끊임없이 깨달아 가는 과정이고 그것을 통해 기쁨을 느끼는 긴 여행 아닐까?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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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린이 말했다. "[…] 루씨 집안 사람들의 소망은 조용한 안식이었어. 시신이 흙과 하나가 되고, 집도 시간에 따라 자연적으로 풍화되기를 바랐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이 장원의 주인이 루씨였음을 사람들이 잊어버리기를, 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는 여기에 장원이 있었다는 것 자체를 아무도 모르기를, 그 속에 이토록 비참한 삶이 있었던 걸 모르기를 바랐어. 우리가 황무지에서 흔히 마주치는, 아무도 물어보지 않는 허물어진 담벼락처럼 되기를 바란 거야." - P428

"알고 싶지 않아. 어머니가 이 집과 어떤 관련이 있었든 이제는 알고 싶지 않아. 어머니가 살면서 본능적으로 거부한 기억이야. 어머니는 이제 의식도 없으신데 내가 꼭 알아야 할까?"
룽중융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싼즈탕아, 산쯔탕.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귀신도 알지만, 그도 모르고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구나."
칭린이 말했다. "됐어. 나는 모든 의미란 결국 다 무의미하다, 라는 말이 생각난다."
하늘빛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더니 태양이 뭇 산의 파도 속으로 가라 앉았다. - P429

류샤오촨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럴 거라 예상했네. 어떤 역사든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드러나지 않으니까. 그리고 추측이란 무엇이든 그다지 믿을 수 없어. 그러니까 세상의 많은 일은 반드시 알아야 하지도 않아. 자네는 안다고 생각해도, 사실 자네가 아는 것은 본래 모습과 근본적으로 다를 수 있어."
"네. 이번에 다니면서 어떤 일은 하늘이 덮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시간에 맡긴 채 시간에 의해 풍화되도록, 시간에······ 연매장되도록 둔다고요." - P430

사실 어떤 사람이든 죽을 때는 세상의 비밀을 어느 정도씩 가져가기 마련이다. 그런 비밀은 말하면 세상을 놀라게 할 수도 있지만 말하지 않으면 바람처럼 가벼워진다. - P434

아버지는 많이 알 필요가 없다고, 그냥 홀가분하게 살면 된다고 말했다. 칭린이 보기에 그건 당연히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깊은 밤 홀로 있을 때도 정말로 홀가분해질 수 있을까? - P436

칭린은 알기 싫은 일을 알려 하지 않는 것도 강함의 또다른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긴 시간이 진실의 모든 것을 연매장했다. 설령 안다고 해도, 그게 진실의 모든 것이라고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 P437

룽중융이 말했다. "사실 자신을 규정하는 문제라는 건 존재하지 않아. 인생에는 수많은 선택이 있잖아. 어떤 사람은 좋은 죽음을 선택하고 어떤 사람은 구차한 삶을 선택하지. 어떤 사람은 전부 기억하기를, 또 어떤 사람은 잊기를 선택해. 백 퍼센트 옳은 선택이란 없고, 그저 자신에게 맞는 선택만 있을 뿐이야. 그러니까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 네가 편안한 방식을 취하면 된다고." - P442

룽중융이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누군가는 망각을 선택하고 누군가는 기록을 선택해. 우리는 각자의 선택에 따라 살아가면 되는 거야." - P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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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린이 대답했다. "그래. 나는 문득 우리가 모든 역사를 알아야 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 삶에는 자연도태의 법칙이 있잖아. 알리기 싫은 것들이 있으면 삶은 모종의 방식으로 그걸 감춰버리지. 그럴 때는 아예 몰라도 되는 거야. 어차피 세상에는 모르는 일이 더 많고 아는 일은 적으니까. 더군다나 우리가 힘들게 알아낸 것들이 당시의 진실이라고 보이지도 않아."
룽중융이 말했다. "네 말은 몰랐던 일을 굳이 들쑤셔서 알 필요가 있느냐는 거지?"
"사실 여기 올 때만 해도 생각이 확실했던 건 아니야. 그런데 오늘 밤 갑자기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들더라. 특히 루씨 가문 도련님의 ‘영원히‘ 결심을 들었을 때. 그들은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후손에게 절대 알리지 않겠다잖아. 모든 걸 시간의 풍화에 맡기겠다는 철학을 가진 듯했어. 그렇다면 나는 몰랐던 것을 왜 굳이 알려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원래 아무 관련이 없던 이곳과 왜 굳이 관계를 맺으려는 걸까 싶기도 하고." - P399

"네 말은 어머니가 알려주신 것들은 그저 단편적인 단어에 불과하고, 그것들을 그냥 조각난 상태로 두는 게 더 낫겠다는 거지? 그 자잘한 것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더 많은 걸 생각해낼 수 있겠지. 하지만 정말로 그것들과 관련된 모든 것을 찾아내 원형을 복원하면, 너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될지도 모르니까. 더군다나 네가 맞춰낸 원형은 진정한 원형이 아닐 수도 있고. 이렇게 생각하는 거야?" - P400

칭린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그렇게 말해주니 마음이 좀 편해진다. 평온하고 평범해 보이는 삶도 뜯어보면 정말 무시무시한 면이 있는 것 같아. 아, 나는 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역사의 짐을 짊어질 수 있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고. 평범한 사람은 대항하지 않는 법이지. 나는 평범한 사람이고. 나는 자연스럽게 기억하고 자연스럽게 잊는 법을 배우고 싶어. 시간은 인생에서 가장 좋은 선생님이니 시간을 따라갈래."
룽중융이 응했다. "평범한 사람은 대항하지 않는 법이라고, 그래! 그렇다면 그러자. 이제 내려놓고 더 생각하지 마. 더 묻지도 말고. 나는 이해할 수 있어." - P402

반면 딩쯔타오는 무척 담담했다. 시아버지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자기 집만 건사할 수 있어도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엄청난 불행으로 끝났다. 그는 상황을 잘못 읽어서 자기 자신은 물론 가족들도 구하지 못했다. 그 사람들의 증오는 서로 아는 집안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부자를 증오했다. 부자의 재산을 나누는 게 모든 가난한 사람이 원했던 일이었다. - P409

그때 딩쯔타오는 모란 이불을 침대에 깔던 순간이 떠올랐다. 사람들이 둘러서서 깜짝 놀라며 탄성을 내질렀다. 신방 전체가 그 이불 때문에 환해지는 듯했다.
원래 내 인생에도 그렇게 빛나던 시절이 있었구나, 하고 딩쯔타오는 생각했다. - P414

끝없는 어둠 속으로 야생화가 전부 숨었다. 자연의 모든 것이 검은 밤과 한몸을 이루고 있었다. 앞쪽의 등불만 검은 장막 위에서 명멸하는 유령처럼 불규칙적으로 흔들흔들 빛날 뿐이었다. - P421

칭린이 말했다. "장원의 삶이 안락하고 편안해 보이지만, 여자와 아이들만 그런 생활을 누렸을 뿐 주인은 늘 긴장하고 초조해했던 것 같아. 이 망루와 포구를 보면 알 수 있잖아."
룽중융이 동의했다. "여기 주인은 의지가 강했을 뿐만 아니라 가족도 잘 챙겼던 것 같아. 사실 망루가 초소와 포루를 합친 건데, 거기에 뾰족한 지붕을 가진 정자까지 올렸잖아. 그건 주인이 낭만적이어서가 아니라 가족을 위로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이곳은 화포를 쏘기 위한 곳이 아니라 경치를 감상하며 시를 읊는 곳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거지." 그런 다음 또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 망루의 매력은 전쟁과 평화를 한데 품었다는 점 같아." - P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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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린은 알 수 없는 감동에 휩싸였다. 사람이 늙으면 명예나 이익에 무덤덤해지고 심지어 무심해진다고 했던가. 나이가 들면 감정이 무엇보다 중요해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P161

오솔길을 따라 걷다보니 바깥이 온통 산이고, 산 뒤에 또 산이 있었다. 그 속의 인간은 먼지처럼 보잘것없게 느껴졌다. 가만히 세어보니 리둥수이는 오십 년 넘게 누명을 쓴 채 살아왔다. 그의 자식과 손자도 영향을 받아 남들 밑에서 일하며 수많은 기회를 놓쳐야 했다. 그런데 지금, 위로 몇 마디와 ‘영웅‘이라는 인정만으로 모든 억울함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 P170

웃고 나서 생각해봐도 역시 어쩔 수 없었다. 그래, 먼지는 먼지일 뿐이지. 잊어야 하는 일이든 잊지 말아야 하는 일이든 결국에는 모두 잊을 수밖에. - P171

언젠가 시아버지 루쯔차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은 풍성한 혼백을 가지고 태어났다가 살면서 차츰 잃어간다. 그러다 다 잃어버리면 혼이 사라지지. 옆에서는 그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사라진 거다. 그 사람은 다시 몸을 돌려 조금씩 자기가 뿌려놓은 혼백을 줍기 시작하지. 도로 다 회수하면 득도할 수 있다. 그러면 좋은 집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어. 다 회수하지 못하면, 잘은 모르지만 내세에 돼지나 개로 태어날지도 모른다.
그녀는 내 혼을 조금씩 모두 회수해야 해, 다음 생에는 좋은 삶을 살 거야, 더는 생고생하기 싫어, 하고 생각했다. - P197

그날 밤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흙을 메웠는지 몰랐다. 평소에는 아침부터 밤까지 재잘재잘, 바스락바스락 울리던 집안의 소리가 전부 사라졌다. 한때 미소 짓던, 슬퍼하던, 키득거리던, 찡그리던, 침울해 하던 얼굴이 전부 똑같이 변해버렸다.
이런 밤을 겪었는데 제가 살아 있는 것 같나요? 그녀는 속으로 그들에게 물었다. - P201

딩쯔타오는 자기 집과 참 다르다고 생각했다. 친정인 체런루의 문은 시댁의 문보다 컸고 일반적인 집처럼 두 짝이었으며 검은색에 문고리도 있었다. 왜 우리집 문은 루가 저택의 문과 달라요? 그녀의 물음에 아버지가 대답했다. 대대로 학자 집안이라 숨길 필요가 없어서란다. 거리낄 게 없거든.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해도 돼. 사실 세상에서 제일 이목을 끌지 않는 사람은 모두와 똑같은 사람이란다. 그래야 제일 안전하고.
그런 기억을 떠올리다가 딩쯔타오는 냉소를 지었다. 어떤 식으로 몸을 낮췄든 전부 곱게 죽지 못했잖아요, 하고 생각했다. - P212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겨울이 지나갔는데도 봄은 더디게 오고 있었다. 석양빛이 초봄의 한기에 얼어붙은 듯 열기를 내지 못해 그날 밤은 유난히 추웠다. - P222

그는 강기슭에서 점점 멀어지는 칭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볼수록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 익숙한 감정은 아주 아득한 익숙함, 오래 전에 잊어버린 익숙함이었고 지금 불현듯 그의 가슴 위로 떠올랐다. 왜 이런 감정이 들까? - P225

류샤오안은 완저우에서 초등학교를 몇 년 다녔다. 그때만 해도 완현이었다. 그는 자신이 기억하는 게 많을 줄 알고 비행기에 오른 뒤 옛일을 떠올리며 잔뜩 흥분했다. 하지만 도착한 뒤 당황하고 말았다. 완전히 낯선 곳으로 변해 이곳에 살았던 느낌이 전혀 없다고 투덜거렸다. 그는 차를 몰고 아내와 한참이나 시내를 돌아다닌 후에야 옛 흔적이 남은 곳을 몇 군데 발견해 기억을 되짚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다만 도착하기 전에 조금씩 쌓아올렸던 감정들은 생소함에 이미 산산조각난 뒤였다. - P226

그러던 어느 해 류샤오안과 베이징으로 출장 가 거리의 작은 식당에서 맥주를 마시게 되었다. 칭린은 갑자기 흥이 올라 그때 무슨 생각이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류샤오안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나는 편안하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 인생에는 여러 방식이 있는데, 왜 꼭 아버지처럼 출세하고 싶어 하거나 동생처럼 부자를 꿈꿔야 하지? 아내는 나와 인생관이 같아. 그래서 나는 이런 사람과 살면 정말 편하겠다고 생각했어. 오랜 시간을 통해 내가 옳았다는 게 증명됐고. 아내가 돈을 좀 밝히지만, 절대 내 삶을 희생해가며 출세하거나 돈을 벌어오라고 나를 몰아붙이지 않아. 류샤오촨의 아내를 봐. 은행에 수억 위안을 저축해놓지 않으면 잘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잖아. 그런 다음 내 아내를 보라고. 걱정 없이 잘 먹고 마시고 놀면 그만이야. 어떤 인생이든 사실은 소소한 인생이고 누구나 소소한 일상을 제일 많이 살아. 다시 말해 소소한 인생은 소소한 일상과 어울려야만 가장 자유롭게 즐길 수 있다고." - P228

완저우는 당연히 류샤오안 부부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 바로 직전에 유럽에서 화려하고 깔끔하고 아름다운 소도시를 보고 왔기 때문에 심리적 격차가 너무 컸다. 특히 류샤오안의 아내는 툭하면 이렇게 낙후한 곳에 볼 게 뭐가 있느냐고 툴툴거렸다. 하도 툴툴거려 류진위안의 낯빛이 변하자 칭린이 여기에 놀러온 게 아니라 추억을 찾아온 것이라며 눈치 빠르게 나섰다. 추억은 현대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유럽 마을이 수백 년 동안 변하지 않은 것도 사실 후대인의 추억을 위해서라고 말했다. - P229

고향 말을 하면서 고향 국수를 먹고 웃으니 무척 즐거웠다. 류진위안은 이게 바로 행복이며, 이런 행복은 전투할 때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현실은 오래전에 그의 예상을 넘어섰다. 그는 평생을 정말 성공적으로 살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 P236

다이원이 대꾸했다. "제가 살기 싫다면요?"
"넌 살기 싫어도 살아야 한다. 무슨 수를 쓰든, 돼지나 개처럼 살더라도 살아야 해. 이게 네 운명이야!"
"저들에게 죽음으로 보여줄 거예요."
"저들은 상관도 하지 않을 거다. 네가 죽어봐야 개가 죽은 듯 여길 거야. 너희 온 가족이 죽었는데 신경쓰는 사람이 있더냐?" - P250

그날의 일을 딩쯔타오는 전부 기억해냈다. 가슴이 쥐어짜듯 아팠다. 자신의 심정을 뭐라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들 나더러 살라고 해서 난 정말로 살았어요. 그런데 이렇게 사는 게 죽는 것과 뭐가 다르죠? 내가 사는 게 후씨 가문, 루씨 가문과 무슨 관련이 있나요? 모두 사라졌는데, 내가 후씨 가문 사람인지 루씨 가문 사 람인지 누가 신경이나 써요? 다들 내 목숨을 지켜주려 했지만 나는 내가 누구인지조차 몰라요. 이런 목숨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딩쯔타오는 이제 눈물마저 말라버렸다.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는 게 눈물이었다. - P257

이제 딩쯔타오는 열번째 층에 도착했다. 그녀는 희망을 보았다고 생각했지만, 그 희망을 채우고 있는 것들 때문에 절망하고 말았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고 인생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도 알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이 누구인지, 그런 일을 겪고도 왜 살아 있는지는 또 기억나지 않았다. 시아버지가 주저 없이 죽음을 선택한 건 죽음이야말로 제일 쉽고 간단한 방법이었기 때문인 듯했다. - P258

다행히 칭린은 생각이 깊었다. 그는 어쩌면 이것이 어머니 삶에서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도착한 곳은 다른 사람이 갈 수 없는 곳일지도 몰랐다. 어머니는 그곳에서 또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며, 그 방식은 자기처럼 평범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사실은 이 세상에 어머니의 숨결이 있는 한 안심할 수 있다는 거였다. - P265

세상 누구에게도 속물근성이 없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칭린은 생각했다. - P267

"엄마, 내년 설에는 절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지 마세요. 꼭 건강을 되찾으셔야 해요. 매일 생선과 고기를 구워주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저는 이미 오랫동안 엄마가 해주시는 음식을 못 먹었어요."
그렇게 말하는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칭린은 눈물을 닦지 않고 흘러내리게 두었다.
그해 섣달그믐의 저녁식사 때 가장 기억에 남은 맛은 바로 그 눈물의 맛이었다. - P272

우 노인은 내 마음을 알아차린 듯 산속에서 지내면 아무도 모르게, 죽은 것처럼 살 수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하늘이 죽음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한번 살아보자. - P273

그러자. 죽은 듯 살자. 이미 죽었는데 뭔들 참지 못할까. - P274

1948년 겨울
어쩌면 12월, 혹은 해가 넘었을지도 모르겠다. 우 노인은 시간을 기억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말했다. 하늘을 보면 밥때를 알 수 있고 추위와 더위는 저절로 알게 된다고 했다. 일리가 있다. - P275

1949년 정월
맞는지 모르겠다. 이미 새해가 밝았다고 짐작할 뿐이다. 사실 짐작할 필요도 없다. 어느 해면 어떻겠는가. 무의미한 시간의 지옥이란 이런 것이리라. - P276

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며칠 동안, 이미 배운 사람이 산에서 인생을 낭비하면 안 된다고 설득했다. 자기와 함께 산을 나가서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자고, 그건 민주적이고 평화로운 사회가 될 거라고, 더는 전쟁이나 굶주림이 없고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지도 않을 거라고 했다. 누구나 공부할 수 있고 누구나 직업을 가지며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로울 거라고 말했다. - P282

생각하다보니 문득 자신은 이 과정을 고작 몇 시간에 겪었지만, 아버지는 몇 년 동안 겪었겠구나 싶었다. 시간이 길어지면 이해하기 힘든 일들도 단순해지고 자연스러워지지 않던가. 시간의 소화력이란 강력해서 아무리 강렬한 감정이라도 밋밋하게, 엄청난 결심도 무기력하게 바꿀 수 있음을 칭린은 잘 알고 있었다. - P283

가다가 마을에 묵을 때마다 주민들이 무척 반기며 비적의 악행을 고한다. 그들의 열정은 감동적이다. 우리는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떠나기 전에 마당과 길을 깨끗이 청소한다. 예전에는 해방군이 이런 걸 전혀 몰랐다. 이제 나는 류 정치위원을 따라 산에서 나온 게 매우 옳은 선택이었음을 안다. 모든 과거는 지나갈 수 있다. 나는 삶을 다시 시작하려 한다. 이 삶은 내 과거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나는 절대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내 과거를 영원히 묻어버릴 것이다. - P284

이제 그는 자신의 인생이 할아버지와 할머니까지 대변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깊은 그리움과 기억이 담겨 있었다. 우리 할아버지 성함은 둥푸칭, 할머니는 전린이시구나. 지금까지 가문이라는 개념이 없던 칭린에게 갑자기 어떤 지역의 사람들, 유서 깊은 지역의 사람들과 친밀한 혈연관계가 생긴 듯했다. 그는 자신의 핏줄이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거대한 체계와 연결되는 기분이었다. 그들의 피가 통하고 흐르기 시작했다. - P295

그녀는 말수가 적었다. 그런데 눈동자에 알 수 없는 슬픔이 깊고 무겁게 담겨 있었다. 그녀의 기억상실도 어쩌면 강한 충격 때문일지 몰랐다. 그런 충격 때문에 그녀의 본능이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도록 막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정말 그녀가 부럽다. - P298

그렇다면 아버지의 ‘혹시‘라는 말과 물음표는 무슨 의미일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부모님은 그토록 특별한 상황이 되었을까? 두 분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너무도 깊이, 거의 아무도 알지 못하게 숨어 살았다. - P299

그는 부모님의 인생이 왜 그렇게 뒤틀렸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왜 그렇게 깊이, 세상 누구도 알 수 없게 꼭꼭 숨겼는지는 더더욱 상상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인생의 전반부를 자질구레한 일상 속에 숨겨버렸다. 이런 은폐는 그들이 외부인에 대해 얼마나 깊은 두려움을 갖고 있었는지 암시하고 있었다.
세상이 뒤바뀌는 격변의 시대에 개인은 얼마나 고독하고 미약해지는 걸까? 시대의 한줄기 미풍이 어쩌면 그들 인생의 배를 완전히 전복 했을지도 몰랐다. - P300

나 한테는 이 가련한 여자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은 나 자신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과 같다. - P307

매일 쯔타오를 데리고 성당에 간다. 루르드 성모상 앞에 이르렀을 때 쯔타오가 누구냐고 물었다. 나는 당시 사람들도 "누구세요?"라고 물었으며 그녀는 "나는 원죄에 더럽혀지지 않은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노라고 알려줬다. 쯔타오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그래서 성모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손바닥에 글자도 써줬다. 쯔타오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나는 원죄가 없다는 뜻이라고 답한 뒤 이 세상에서는 나와 그녀 모두 원죄에 더럽혀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녀는 아리송한 눈치였지만 내 말을 가슴에 새겼다. 다음날에는 루르드 성모를 보고 속으로 ‘나는 원죄에 더럽혀지지 않은 사람이다‘라고 중얼거리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했다.
그게 옳다. 내게는 그녀의 평온이 필요하다. - P310

아들아, 또 한 가지 당부하는데, 혹시 흔적을 따라가다가 참혹한 일을 발견하면 중단하거나 포기하거라.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일이 무척 많으니 그런 일이 하나 더 있다고 해도 아무 상관 없단다.
과거를 잊는 건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기능이다. 망각이 있어서 나와 네 어머니는 이렇게 오랫동안 편안히 살 수 있었다. 망각은 네 부담을 줄여주고 미래를 가볍게 맞이하도록 해줄 거다.
네가 평생 평온하게 살길 바란다. 네 아이 세대가 되면 과거의 모든 것은 흔적조차 남지 않겠지. - P314

딩쯔타오는 아버지가 그들 땅을 사지 않았던 게 기억났다. 아버지는 아무리 싸도 그들 땅은 사지 않겠다며 우리는 조상들 사이에 생긴 원한을 이어가지 않겠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딩쯔타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버지, 아버지가 틀렸어요. 아버지가 그들보다 더 잘사는 이상 원한은 저절로 이어져요. - P322

그해 겨울은 유난히 길었다. 산꼭대기에 늘 눈이 얕게 깔린데다 음산하고 추웠다. 해가 비치는 날에도 한기가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쯔타오는 갑자기 고향이 생각났다. 고향의 겨울은 언제나 그랬다. 추위가 줄기차게 피부를 파고들었다.
아니나다를까, 지금도 찬바람이 날카로운 가시처럼 피부를 찌르는 것 같았다. - P325

딩쯔타오의 눈에 빛이 보였다.
어렴풋한 그 광선은 밝아졌다가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춤추는 검은 조각 같기도 하고 흩날리는 눈송이 같기도 했다. 딩쯔타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세상에, 이제 출구에 가까워졌나? 나가면 어떻게 될까? […] 밖으로 나간들 누구와 말할 수 있겠는가? 그 모든 게 진심이 아니었다고 누구에게 말해야 할까? - P334

그때 딩쯔타오는 극히 냉정한 상태가 되어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 어머니는 어떤 인생을 사셨을까? 어떻게 그토록 단순하게 생각했을까? 훨씬 잘 이별할 수 있었는데 그 어리석은 고육책 때문에 본인들 목숨도 구하지 못하고 오빠까지 죽음으로 몰아넣었잖아. 나도 목숨만 건졌을 뿐 스스로를 견딜 수 없이 증오하게 되었고. 내 손까지도 그 죄를 기억하고 있잖아. - P339

자신은 왜 아직도 살아 있을까?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왜 살아야 할까? 무슨 이유로 죽지 않았을까? 그런 것들을 그녀는 전부 이해할 수 없었다.
[…]
이 모든 것들을 누구에게 말할 수 있을까? 또 누구를 더 알아야 할 까? 심지어 그들의 그런 죽음이 더 나은지, 자신의 이런 삶이 더 나은 지 딩쯔타오는 이미 분간할 수 없었다. - P340

"다이원, 누가 귀찮게 굴면 네 아버지에게 루쯔차오의 사돈이라고 말하라고 해. 너도 길에서 누가 시비 걸면 루씨 가문 며느리라고 하고."
다이원이 조금 망설이다가 물었다. "그게 소용 있을까요?"
시아버지가 냉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이 근방 수백 리 안에서는 그래도 아직 우리 집안 말발이 선다. 현의 간부 중에 나를 모르는 사람이 몇이나 되더냐?"
"하지만 지금이 어느 때인데요? 예전과 다르잖아요."
"내가 그들에게 세워준 공이 얼마인데, 그걸 봐서라도 어느 정도는 체면을 세워줄 거다. 내 말대로 해라."
그때 딩쯔타오는 자기도 모르게 시아버지처럼 냉소를 지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루쯔차오의 체면을 세워준다고요? 본인 목숨까지 잃고도 무슨 체면을 논합니까? 그런 오만함과 우월감으로 온 가족이 아버님을 따라 죽었어요. 그런 자부심이 무슨 소용입니까? 한 푼 가치도 없는 것을! - P342

"드라마를 보는 것 같군. 자네 집에 이렇게 흥미로운 일이 있을 줄이야. 그나저나 기억을 잃은 뒤 잠재의식 제일 밑바닥에 남는 건 가장 사랑했던 곳일까, 아니면 가장 증오했던 곳일까?"
[…]
류샤오촨이 말했다. "나라면 제일 싫어했던 곳이 남을 것 같아. 상처를 심하게 받아서 어떻게든 복수하려고."
류샤오안이 대꾸했다. "봐봐, 나는 너랑 완전히 반대라고. 나라면 제일 사랑했던 곳을 기억할 거야. 그래야 계속 살아갈 힘이 생길 테니까." - P352

칭린은 문득 놀랍고 기이한 일들이 우리 곁을 수시로 스쳐지나가는 데 우리가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넘기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렇게 무심히 넘긴 일들의 뒤편에는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 P357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생각이 바뀌었다. 그렇게 대단한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하루에 한 대야씩 머리에 물을 끼얹는 것처럼 하루하루가 지나가자 강렬한 감정도 차츰 쓸려나갔다. 갈수록 칭린은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시간과 노력을 들여 찾은들 내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더구나 어머니 연세가 이미 이렇게 많은데 과연 깨어나실 수 있을까? 정말로 친척을 찾는다고 해도 지금껏 남으로 살아왔으니, 그런 낯선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또 아버지도 그 일들을 알 필요가 없다고 적어두셨다. 아버지와 어머니 본인들이 떠올리기 싫다고 했던 과거를 내가 굳이 파고들어야 할까? 그냥 두 분 생각대로 하자. - P358

시간이란 정말 무서운 존재다. 그런데 현실은 그보다 더 독해서 감정이 끓어넘치던 사람을 담담하기 그지없는 실용주의자로 바꿔놓을 수 있다. 칭린도 그랬다. 그는 자기 일, 눈앞의 삶에 충실한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과거를 돌아볼 게 아니라 미래를 봐야 하며, 시간을 거슬러갈 게 아니라 앞으로 따라가는 게 옳았다. […]
그렇게 생각한 칭린은 재빨리 감정을 추스르고 그 일을 아버지의 가방처럼 구석에 내려놓았다. - P359

민간 건축, 특히 부자들의 대저택은 건축적인 의미에서는 사실 새로운 게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 배경, 예를 들어 기원과 변천, 결말에는 건축 자체보다 훨씬 가치 있는 내용이 많았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지난 오십여 년 동안 사회의 질적 변화 때문에 거의 모든 남방 장원이 주인을 잃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장원은 학교나 창고, 사무실이 되거나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원래의 가족 구성원이 모두 사망한 장원은 대부분 폐허가 되었다. 그건 시간의 흐름에 따른 쇠락이 아니라 사회에 의한 파괴라 할 수 있었다. - P359

그런데 떠나기 전날 갑자기 류샤오안이 칭린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칭린, 내가 연장자로서 자네보다 세상을 좀더 알잖아. 해주고 싶은 말이 있네. 만약 찾기 힘들면 그냥 포기해도 돼. 진상을 반드시 찾아야만 하는 건 아니란 말이야. 세상의 모든 일에 진상이 있는 건 아니라고. 그러니까 단순하고 편안하게 사는 게 언제나 인생의 진리라는 말이네."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지만 칭린은 통화 내용을 가슴에 담았다. 그는 마음을 다잡고 창문 앞으로 걸어가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 P361

세상에는 기억할 가치가 없는 일들이 있잖아. 혹은 잊어야만 하는 일이나 사람도 있고."
룽중융은 한참 동안 대꾸하지 않다가 차가 충칭을 벗어나서야 입을 열었다. "확실히 그래. 그런데 어떤 사람이나 일은 말이야, 잊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반드시 기억하려는 사람도 있거든." - P362

룽중융이 차창 밖의 산을 보며 탄식했다. "비적이 많을 만하네. 나무와 풀, 흙과 물이 있으니까.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할 수 있잖아. 숨기 쉽고 달아나기도 어렵지 않고."
"당시 비적들이 꽤 편했을 거란 말이야?"
"분명 가난한 사람보다 살기 쉬웠을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왜 비적이 되겠어?"
"일리가 있네. 무슨 일이든 개별적 사건이 현상이 될 때는 심오한 배경이 있기 마련이니까. - P364

룽중융이 말했다. "봐봐! 충칭만 봐도 알 수 있잖아. 입체감이 분명한 도시라 한층 한층 단계적으로 높일 수 있는데 굳이 산꼭대기에 고층 건물을 세웠지. 산간도시의 아름다운 입체감을 기어코 망가뜨렸잖아. 거리를 걸을 때 지붕을 한눈에 바라볼 수 없으니 얼마나 답답해. 안타깝다니까, 안타까워."
칭린이 웃음을 지었다. "하늘과 누가 높은지 겨루는 꼴이지."
"대자연과 대결해 성취감을 만끽하자는 신조를 받들면서 조화를 우선시한다는 원칙을 버렸어. 정말 어리석지 않아?" - P365

우연일까? 칭린은 계속 우연 쪽으로 생각하려 했지만, 어떻게 해도 우연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이렇게 많은 우연이 겹치면 필연일 수밖에 없었다. - P383

"[…]조카가 돌아와서 하는 말이, 둘째 도련님이 처가를 방문하려 했는데 마을 자체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하더군. 그리고 떠날 때 ‘영원히‘를 세 번 말했다는 거야. 영원히 돌아오지 않겠다. 이곳을 영원히 고향으로 여기지 않겠다. 자손들에게 이곳을 영원히 모르게 하겠다. 이 얼마나 지독한 말이냐고." - P397

루싼이 갑자기 목청을 높였다. "다들 귀신의 집을 보면 너무 처참하다고 생각하지. 그런데 말은 바로 해야지. 루씨 집안이 그렇게 된 건 결국 그들의 선택 아닌가? 왜 진뎬의 집안에 대해서는 처참하다고 말하지 않지? 루씨 집안에서 진뎬 집안의 땅을 빼앗지 않았으면 그 집이 망했을까? 설마 가난한 집은 망해도 별일 아니지만, 부자가 망하면 더 처참하다는 건가? 그러니까 이 일은 루씨 집안에서 왕씨 집안을 망가뜨린 바람에 보복당한 거라고 봐야 해. 이건 두 집안의 일이라고. 더군다나 그들은 진이 손을 쓰기도 전에 스스로를 파멸시켰어. 하인들까지 놓아주지 않고. 진은 자신을 길러준 그들 부모의 묘비를 세웠으니, 원한도 갚고 은혜도 갚았다고 할 수 있지. 그런데 이를 갈면서 고향을 원망하는 게 무슨 도리지? 더 예전으로 돌아가 그들이 어떻게 부를 축적했느냐고? 아편을 팔아서 자기 배를 살찌웠잖아.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들 장사로 집을 잃고 목숨을 잃었는데? 남들은 이를 갈며 화내지 않는데 그들은 왜 내려놓지 못하느냐고?" - P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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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해파리 씨의 이름은 관해파리다. 적어도 우리가 헤엄치는 범위에 그 개체는 하나뿐이니까. 관해파리는 식물처럼 자신을 복제하여 자라나며 영원히 산다. 천 년을 살았는지 만 년을 살았는지 아는 물고기는 아무도 없다. 관해파리 씨의 몸집은 고래만큼이나 크다. 관해파리끼리는 고래와 마찬가지로 저주파로 대화한다. 그 낮은 목소리는 고래와 마찬가지로, 지구를 반 바퀴 돌며 대양 전역에 이른다. 그래서 관해파리 씨는 고래들처럼 이 대양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 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분은 저 멀리뿐 아니라 아득한 옛날의 일까지도 다 안다는 점이다.
그리 오래 살아왔어도 남을 해칠 힘은 없는 분이라 누군가 작정하고 뜯어 먹으려 한다면 한순간에 생을 마감하겠지만, 심해 식구 누구도 관해파리 씨를 먹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건 대양의 역사를 뜯어 먹는 것과 마찬가지가 될 것이니. 이 세계의 기록을 뜯어 먹는 것과 마찬가지 일이 될 테니. - P14

삶이란 게 그렇지. 어떻게든 잘 참고 견디고 버티는 듯하다가도, 팽팽하게 당긴 끈처럼 한순간에 툭 끊어져 다 무너져버릴 때가 있지. 부디 그들이 물고기의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기를.
"이 심해에 내려올 때는 모두 같아."
나는 기도를 드렸다. 큰니가 빛을 죽이며 같이 몸을 숙였다.
"모두 같지."
"맹독이든, 병균이든, 슬픔이든, 아픔이든, 여기에서는 모두 같아. 모두가 아름다운 눈송이가 되지. 은혜로운 양식이자 생명의 기쁨이 되지."
"썩지 않는 것들만 빼고." - P16

나는 몇 년 전 알을 낳기로 결심하고 여자로 전환한 친구를 떠올렸다. 번식의 주체가 되고 일가족을 책임지는 것은 고난스러운 일이지만, 스스로 퇴화하여 반려의 장기 일부가 되느니 기왕에 태어난 삶, 한생 맨몸으로 부딪쳐 살아보겠노라고 했다. - P18

"자연계는 신비로운 것이야, 나무수염. 통상의 상식은 통하지 않아." - P19

그럴 때가 온다. 끈이 끊어질 때가. 아등바등도 인내도, 의지조차도 기력을 다할 때가. - P20

"세상의 끈이 끊어졌군요."
내가 말했다.
"하지만 세상도 오래 참고 견뎠어요. 의연하고도 인내심 있게." - P21

"저 위의 주민들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이제 세상이 조금은 좋아지려나요? 흙 위를 뒤덮은 괴물들이 지금 다 사라지고 나면, 썩지 않는 것을 먹고 죽는 아이들도, 그런 것에 목이 감겨 살이 짓물러가며 죽는 아이들도 사라지려나요?" - P22

여자가 주인공인 게임은 여성향일까, 남성향일까? 게임 주인공은 유저가 이입하는 대상인가, 아니면 욕망하는 대상인가? 누구에게 어느 쪽이 작용할지 알 수 없으니 정석은 두 성별을 다 내놓는 것이다. 초창기 게임들은 모두 이 원칙을 지켰다. 하지만 게임 그래픽이 화려해지면서 도리어 성별이 하나로 고정되기 시작했고, 몰입감은 예전보다 약해지고 말았다. 만약 예산상 한 명밖에 구현할 수 없다면 어느 성별이어야 하나? - P30

이세연이 말하는 ‘직접 내게 일어나는 일‘인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법칙은 수없이 많았다. 유저가 멍하니 화면을 지켜보는 시간은 5분을 넘지 않게 할 것. 단순하게라도 주기적으로 조작과 선택을 하게 할 것. 선택지를 줄 때에는 반드시 둘 중 하나는 조금이라도 더 좋은 것이도록 할 것. 무엇이 더 좋은 선택일지에 대한 정보는 충분히 주어져야 하며,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면 그 선택으로 큰 피해나 이득을 보는 일은 없도록 할 것. 단지 다양한 분기를 보여주는 데에 그칠 것. 몇 가지 선택은 운명을 크게 바꾸어야 하고 엔딩은 충분히 많아야 하며 가장 만족스러운 엔딩을 얻기 위한 경로는 가장 어려워야 한다. 그리고 적어도 하나의 엔딩은 해피 엔딩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수백 시간의 플레이에 대한 보답이 비극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절대로, 유저를 게임에서 소외시키지 말 것. - P44

"우리 인생도 선택으로 가득해. 하지만 그래봤자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고. 왜냐하면 어차피 평생 갈 수 있는 길이 하나뿐이라면 결국 안전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으니까······. 영웅적인 선택도 바보스러운 선택도 할 수가 없어. 원하지 않는 길을 어쩔 수 없이 가야 한다고. 그렇게 우리는 다 자신의 인생에서 소외되는 거야······. 하지만 게임은 그렇지 않아. 선택지가 나타났을 때 알게 되는 거야. ‘나는 저 모든 길을 다 갈 수 있겠구나.‘ 세계의 이면을 다 보고, 모든 가능성의 경로와 결과를 다 볼 수 있겠구나······. 그걸 알게 되는 순간 내 게임을 하는 사람은 세계의 주인공이 되는 거야. 그게 바로 게임이야. 그게 진짜 게임 시나리오라고." - P46

게임은 절대 오래 만들면 안 되는 물건이다. 게임은 1년이면 유행이 변한다. 책은 유사 이래로 종이에 쓰였고 영화는 유사 이래로 영화관에 걸렸지만 게임은 그렇지 않다. 1년이면 모든 기기가 업그레이드되고, 때로는 완전히 새로운 기종과 기술이 나와 패러다임이 통째로 바뀌어버린다. 개발 기간이 2년만 넘어가도 변한 기술을 뒤쫓느라 게임을 뒤엎어야 하고, 그러면서 비용이 늘고, 늘어난 비용을 회수하기 위해 점점 기획이 커지면서 비용이 점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악몽 같은 쳇바퀴 늪에 빠지고 만다. 아니면 내놓을 때는 이미 구닥다리가 되어버리든가. - P51

"돈이야. 돈이 현실감을 주지. 누가 얼마나 많은 돈을 게임에 퍼부었느냐에 따라 대우를 다르게 해주는 거지. 서민들은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부자들에게 그들이 때려 넣은 돈 만큼 보상해주는 거야. 그 막대한 자본력을 보며 유저들이 경탄하고 찬사를 바치게 하는 거지. 그러면 그 돈을 가진 사람이 주인공이자 영웅이 되는 거야. 그 사람이 모든 걸 다 할 수 있는 사람이야. 모든 선택을 다 할 수 있는 사람이고. 그게 밸런스야. 그게 공정함이야. 진짜 현실감 넘치는 시나리오지. 현실과 똑같으니까. 유저도 좋다고 몰려오고 회사도 떼돈을 벌고." - P67

"있잖아, 나."
홍운은 얼굴을 붉히며 몸을 배배 꼬았다.
"생각해봤는데. 나, 네 세계에 남아도 될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어쩌려고 이런 대사를 넣었을까. 하지만 이것도 이세연이 끌어안고 살던 산더미 같은 법칙 중의 하나였다. 할 법한 말을 할 것. 예측할 수 있지만 그 예측을 살짝 넘는 말을 할 것. 그래서 이 상황에 개연성이 있다고 믿게 할 것. 일어날 법한 일이라고. 그래서 몰입하게 할 것. - P70

그랬었지. 잘 짠 몇 개의 퀘스트가 게임 전체를 빛나게 한다고. 유저는 시나리오의 평균값을 체험한다고. 그것도 시나리오 작가 혼자 생각해야 하는 일 중 하나였다. 게임을 잘 살펴 몇 마디의 대사로 모순을 없앨 것. 시스템이 만드는 괴리를 시나리오로 풀처럼 발라 메울 것. 그렇게 모순이 없어지면 몰입감이 생긴다. 그래서, 절대로, 유저를 게임에서 소외시키지 말 것.
시나리오 작가가 조용히 그런 일을 해주지 않으면 그 게임은 망하지만, 왜 망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 P74

예측할 수는 있지만 예측을 살짝 벗어나는 이벤트로 유저를 놀라게 할 것. 이벤트를 볼 확률은 높게, 하지만 놓쳤을 가능성을 상상하게 하여 그 일이 특별한 일처럼 느껴지게 할 것. 그래서 믿게 할 것. 당신이 세상의 주인공이라고. 영웅적인 선택도 바보 같은 선택도 할 수 있는, 누구보다도 중요하고 특별한 사람이라고. - P77

"얼굴 좋아 보이네.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야. 그간 별일 없었어?"
마치 내가 그간 어떤 선택을 했든, 어떤 길을 걸었든, 우리가 어떤 다툼을 했든, 모든 일들은 세월에 마모되고 윤색되었고, 가장 아름다운 추억만이 이 자리에 남아 빛나고 있다고 말하듯이. - P77

쓰지 않는 물건은 사라진다. 인적이 드문 장소는 없어진다. 때로는 산이나 개울이 없어지고 어느 날에는 마을 하나가 통째로 자취를 감춘다.
그러니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있다면 계속 쓰거나 지켜보아야 한다. 양자역학의 원리를 빌려 말하자면, 모든 것이 확률적으로 존재하여 관찰로 고정해야 하는 셈이려나. - P87

바람이 불었고 갈매기가 끼루룩 울었다. 파도가 부서져 우리 발치까지 부글거리는 거품을 흘려보냈다가 물러났다. 별은 보석처럼 반짝였고 구름이 달을 가리며 황금빛으로 빛났다. 바다에 비친 달이 물결에 금싸라기처럼 부서졌다. 나는 그 모두를 눈에 담았다. […]
아름다웠다. 내 말은, 풍경이 말이지. 뭐 어쨌든. - P91

"너를 제일 만나고 싶었어."
네가 급작스럽게 갔기에.
그래서 너의 이야기에는 결말이 없었기에.
연재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갑자기 중단된 소설처럼, 문장 중간에 뚝 끊긴 말처럼, 하다 만 대화처럼. 나는 다음에 뭔가 이야기가 더 있어야 하는데, 있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 속에서 남은 삶을 살았다.
[…]
그리 행복하지 않아도 좋으니. 이상적이지 않아도 좋으니. ‘아, 그렇게 마무리된다면 이야기가 더 이어지지 않아도 어쩔 수 없지‘, 싶은, 그런 소소한 결말을. - P106

늘 바라마지 않았다. 이런 풍경이 너의 결말이기를.
같이 맛있는 식사를 하고 수다를 떨고, 따듯하고 푹신한 곳에 편히 누워 고요함 속에서 이야기가 마무리되기를. 너의 결말이 안온함 가운데 찾아오기를. 그렇게 뚝 끊긴 너의 이야기에 내가 지금 만든 이 작은 결말을 덧붙이는 것으로 위로 받을 수 있기를. 그렇게 너의 새 결말을 같이하는 것으로 또한 내 이야기를 다시 마무리하기를. 내가 그랬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 내 남은 아이들도 위로받기를, 너와 나의 이야기가 이렇게 끝을 맺기를.
비록 겉보기만 그럴듯하다 할지라도······.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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