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 한가운데 갇혀 있으니 슬슬 정신이 나가는 기분이었다. 더욱이 초반에는 부지도 완공되기 전이었고 이렇다 할 연구실도 없었기에 나는 내가 정말로 살짝 돌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모든 게 미쳐 돌아가고 있었으니까. 프로젝트의 규모며 일이 진행되는 속도며 우리가 만드는 진짜 무기까지, 모두 다. 사람들이 상상하던 것과는 달랐다. 뉴멕시코의 사막은 뜨거웠지만 많이, 아주 많이 아름다웠다. 로스앨러모스는 암적색 토양의 깎아 지른 절벽 위 메사 언덕에 자리했는데, 나무와 관목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다. 숨막힐 듯한 절경이었고, 내가 가본 어느 곳 보다도 아름다웠다. 뉴욕 출신인 나는 서부가 처음이었기에 딴 세상에 온 기분이었다. 화성이나 뭐 그런 곳. 그곳은 신성한 터의 오묘한 에너지를 품고 있었다. 문명 세계에서 멀리 떨어져 감시하는 눈도 없고 신조차도 아득해 들여다볼 수 없는 피난처. 상상할 수 없는 일을 벌이기에 완벽한 장소였다. - P137

나는 계속 바둑에 돈을 걸었다. 그만큼 매력적이었으니까. 보기에는 단순해서 오 분이면 규칙을 가르칠 수도 있다. 정사각형 격자판에 검은 돌이나 흰 돌을 두어 상대방 돌을 둘러싸고 최대한으로 영토를 장악하면 된다. 보기에는 단순하지만 미칠 듯이 어렵고 체스보다 훨씬, 훨씬 더 까다롭다. 우리 중 일부는 바둑에 중독되기 시작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바둑에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어느새 마음을 사로잡아 꿈속에서도 바둑을 뒀다. 무엇을 하건 늘 머리 한쪽에서는 바둑을 뒀다. - P144

그때 그가 지금도 잊히지 않는 조언을 건넸다. "자네가 사는 세계를 자네가 책임질 필요는 없는 거야." 그런데 언제나 실실 웃으며 즐거워했던 건 폰 노이만뿐만이 아니었다. 로스앨러모스에서 했던 작업을 돌이켜보면, 아내 일로 겪은 개인적인 비극과 상실, 유럽에서 벌어지던 온갖 사건에도 불구하고 그때 그 시절이 내 기억 속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순간으로 남아 있다. 남들 앞에서 대놓고 말하기는 뭐하지만, 그 시절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무기를 만들면서도 마치 어쩔 수 없다는 듯 장난을 멈추지 못했다. 계속해서 실없는 농담을 던졌다. - P149

폭발 시 빛으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해 용접용 안경이 전원에게 주어졌다. 자칫 잘못하면 눈이 멀 수도 있다는 거였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20마일이나 떨어져 있는데 어두운 안경까지 쓰면 구경은 개뿔 아무것도 안 보일 테지! 게다가 환한 빛 때문에 눈이 상하는 게 아니다. 문제는 자외선이다. 자외선은 유리를 통과 못하니 나는 트럭 앞유리창 뒤에 있기로 했다. 그러면 안전하게 그 빌어먹을 것을 볼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맙소사, 그건 나의 착오였다! 섬광의 차원이 달랐다. 번쩍이는 순간 나는 눈이 멀었다고 확신했다. 찰나의 순간에 내 눈엔 빛 만이 보였다. 하얀빛이 내 눈을 가득 채우고 머릿속을 지웠다. 끔찍하리만치 불투명한 광채가 온 세계를 삭제했다. 빛의 거대 함은 형용할 수 없었고 너무 순식간이라 반응할 새도 없었다. 고개를 뒤로 획 젖히며 시선을 돌리자 황금색, 보라색, 연보라색, 회색, 파란색으로 불타듯 환해진 산등성이가 눈에 들어왔다. 모든 봉우리와 틈새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선명하고 아름답게 빛났다. 정말로 상상 이상이었다.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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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동물의 의식에 관해 자주 생각한다. 그건 분명 인간의 의식보다 어둑할 것이고, 꿈같이 덧없을 것이고, 반쯤 녹은 양초처럼 작은 생각들은 절대 윤곽이 또렷하게 그려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면 명쾌하게 생각하느라 기를 써야 하는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 P71

바깥 한기를 막아주는 묵직한 커튼 사이로 아침의 첫 빛줄기가 내리비치던 순간에 나는 형에게 물었다. 그때는 답을 듣지 못했지만, 손에 한가득 나사를 들고 앉아 있던 나를 두고 위층으로 내달려 침대 위에 옹송그린 채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이미 혼날 채비를 하던 형은, 그에 대한 답을 내리고자 누구보다 많은 일을 했다고 나는 믿는다. 앞으로 무엇이 닥칠지. 미래에 형이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그때는 알 수 없었지만 직조기를 바라보던 형은 어쩐지 어렴풋하게, 그러나 강렬하게 미래를 내다보고 고통스러워했다는 확신이 든다. 그 환영은 형을 표독스럽게 붙들었고, 이전까지는 오직 게임과 폭탄을 향해서만 느끼던 섬뜩한 이끌림에 불을 지폈다. 그런 것을 정확히 감지할 수 없었던 나조차도 발치에 흩어진 기계의 잔해를 보고 있자니 속이 살짝 메스꺼워졌다. 그 감각은 이후로도 줄곧 나를 따라다녔다. - P79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나는 자기 상상에 심취한 그들이 부러웠다. 그때 나는 다 알면서도 일부러 주변 세상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대륙이 불타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부다페스트의 부유한 십대로 예쁨받는 즐거움에 젖어 전쟁의 숙명 따위를 걱정할 시간이 없었다. 참 한심한 생각이었지만, 어쨌든 우리나라 안에서 큰 전투가 벌어진 건 아니었으니까. 헝가리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곡창지대였기에 전시 기근으로 밀 가격이 치솟으면서 부자는 더욱더 부유해졌다. 그래서 우리는 다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척 굴었다. 끔찍해 보이리란 것을 안다. 하지만 덕분에 나는 인류에 관한 단순한 진실을 아주 일찍이 깨쳤다. 문 앞에서 악마가 문을 두드리는 와중에도 우리 인간은 춤출 수 있다는 것. 내가, 그리고 우리 대다수가 그랬다. 그런데 그게 진짜 우리 탓이려나? - P82

사방에서 폭발적으로 산업화가 일어났으나 우리의 도시는 여전히 봄철의 제비꽃 내음을 머금고 있었다. 우린 부족한 게 하나 없었다. 날마다 새로운 게 나오는 듯했다. 새로운 발견, 새로운 농업 생산량 기록, 새로운 상품, 새로운 옷. 새로움의 짜릿함이 항상 존재했다. 그래서 우리는 해야 할 일을 했다. 즐기는 것. 우리는 놀았다. 이 전쟁에서 저 전쟁으로 넘어가는 동안에도 흥청망청 술에 취해 춤을 췄다. 달리 뭘 할 수 있었을까? 우리를 위해 만들어진 멋진 세상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을 다들 알고 있었다. 그러니 우리의 놀이란 다급한 것이었다. 꼭 필요한 일이었다. 잴 것 없이 무조건 즐거워야만 했다.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뭐가 닥칠지 알고 있었으니까. 왜인지는 몰라도, 우린 그냥 알았다. 남자건 여자건. 돈이 많건 적건. 유대인이건 비유대인이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어린애들처럼 굴며 어린애들이 가장 잘하는 짓을 했다. 아무 문제도 없는 척 그냥 계속 노는 것. 세상은 알아서 굴러갈 테니까. - P83

칸토어는 어렸을 때부터 수학을 연구하라고 등 떠미는, 그의 표현에 따르면 "알 수 없는 은밀한 목소리"를 들었다. 이후 그는 자신이 무한 개념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신의 개입 때문이었노라고 확신하게 됐다. 진정한 계시가 모두 그렇듯, 칸토어는 자신이 받은 계시가 위대하고 초월적인 확실성으 로 인류를 이끌리라 믿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누구도 그의 무한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고, 적들은 기를 쓰고서 그의 앞길을 망치고 연구를 좌절시키려 들었다. 칸토어는 당연히 프로이센에서 내로라하는 대학 어디서든 교수직을 맡을 수 있었지만, 후미진 할레에만 머무르며 점점 줄어드는 친구와 동료 무리에게 불만을 토로하곤 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의 연구가 몇몇 사람에게 불러일으킨 두려움은 결국 우리를 창조하고 유지하는 것이 지고하고 완벽한 형태의 무한임에도, 진정한 무한을 바라볼 가능성을 파괴하는 일종의 근시안이다. 얼마 전 미타 그레플레르에게서 편지를 받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는데, 놀랍게도 그는 진지하게 고민한 끝에 내가 발표하려던 글이 ‘약 백 년은 시대를 앞섰다‘라고 평했다. 그러면 1984년까지 기다리라는 소리인데, 그건 누구에게나 과한 요구가 아니던가! 누가 뭐라건 간에 나의 이론은 바위처럼 굳건하다. 그것을 겨냥한 화살은 족족 되돌아가 암살을 시도한 자의 심장에 꽂히리라." - P101

의심은 그 자체로 우리를 구원할지 모른다. 처음부터 없던 믿음보다 사라진 믿음이 더 나쁜 까닭은, 성령이 저주받은 이 세상을 버리고 떠나며 생긴 구멍처럼 떡하니 공백을 남기기 때문이다. - P112

거대한 탱크가 덜컹거리며 대로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 맹세컨대 야노시는 주인이 남은 음식을 제 밥그릇에 붓는 소리를 들은 개처럼 침을 흘리기 시작했다. 소름이 끼쳤다. 다 큰 어른이 탱크를 보겠답시고 어린애처럼 사람들 머리 위로 방방 뛰어대고, 아마도 훗날 우렛소리와 함께 유럽을 짓밟을, 산 자와 죽은 자의 뼈를 으스러뜨리고, 대륙에 들이닥쳐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방식으로 우리 사람들을 노예로 부리고 굶기고 고문하고 몰살한 나치의 무력 기습을 이끌게 될 바로 그 죽음의 차를 얼빠지게 쳐다보며 손을 꺾어대는 모습은 정말로 섬뜩했다. 괴이한 기계에 정신이 팔린 그를 보면서, 그가 무엇을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잘 알고 있었던 나는 그에게 희망은 거의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우리 모두에게 희망은 거의 없었고, 나에게는 분명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 P114

나는 이미 나름의 이민 계획을 세워둔 상태였지만, 그는 나에게 자신과 함께 떠나자고 했다. 알았다고는 했으나 그가 어째서 이민을 미루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왜 계속 유럽에 머무르려 하는지, 독일에는 왜 자꾸 가는지 물었다. 그는 수학의 기초에 가까이, 거의 다 근접했노라고 했다. 머릿속에서 그것이 간질거리는 게 느껴질 정도로! […] 역사, 특히 고대 제국 쇠망사 에 별나게 집착했던 연치는 나치를 무한히 혐오하면서도 정확히 언제 독일을 뜨면 될지 알 수 있으리라는 자기 확신이 있었다. 그가 얼마나 정확히 미래를 내다보았는가를 지금 와 생각하면 전율이 인다. 그의 예지력은 정보를 처리하고 역사의 물결에서 현재의 알갱이들을 걸러내는 뛰어난 능력에서 기인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 능력이 있었기에 그는 진심으로 안심했으며,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내 꺾였을 과신에 차 있었다. 야노시는 실로 한참을 앞서 있어 마치 모든 것을 과거의 일처럼 돌아보는 듯했다. - P116

힐베르트 프로그램은 그렇게 종말을 고했다.
연치는 괴델의 말을 즉각 이해했으나 처음에는 쉽사리 받아 들일 수 없었다. 괴델이 옳다면 연치를 비롯해 어느 누가 무슨 짓을 하건 간에, 수학을 공리화하는 일도, 그토록 찾아 헤매던 논리적 기초를 발견하는 일도 불가능했다. 내부 역설과 모순에서 자유로운 공리의 형식 체계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 안에는 체계의 규칙으로 결코 증명할 수 없는, 그러나 더할 나위 없이 참인 진실과 명제가 내포되므로, 체계는 언제나 불완전할 수밖에 없음을 괴델이 연치에게 보인 것이었다. 괴델의 발견은 우리가 과거에 생각하지 못한, 존재론적 한계라 할 수 있는 무언가였다. 증명 불가한 진실은 수학자의 악몽이었고, 연치에게는 사적인 재앙이었다. 어떤 새로운 지식이나 이론으로도 메꿀 수 없는 거대한 틈새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괴델의 논리에 깃든 철학적 함의란 실로 엄청났으며, 훗날 불완전성정리라고 알려진 그의 이론은 오늘날 인간 이해의 한계를 시사하는 근원적인 발견으로 여겨진다. - P119

괴델의 정신쇠약에 관해서는 워낙 기록이 많지만, 그가 않았던 유형의 편집증이 그가 몰락한 원인인 동시에 수학적 위업의 뿌리였다는 데는 많은 사람이 동의한다. 빈 대학교에서 아주 젊은 시절의 괴델을 보았던 어느 교수는, 그가 불안정한 이유가 연구의 성격 때문인지, 아니면 애당초 불안정한 상태여야 괴델처럼 사고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두 관점 다 옳다고 본다. 몇 차례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나는 그의 논리와 논리적 사고가 점점 심해지는 정신착란과 떼어놓을 수 없이 엮여 있음을 감지했다. 어떻게 보면 편집증은 논리가 미쳐 날뛰는 상태라 할 수 있으니까. "혼돈은 모두 잘못된 외피를 두르고 있다." 괴델은 이렇게 적었다. 그는 모든 일에 이유가 있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부터 지극히 흔하고 일상적인 일들 뒤에서 그것을 은밀히 조종하는 음모와 힘을 보게 된다. 하지만 괴델을 망친 건 마음의 불균형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세상에 들여왔으며 우리가 여태껏 극복하지 못한 생각 때문에도 타격을 입었다. 증명 불가한 진실과 불가피한 모순. 이 자기 지시적인 논리의 악몽이 무시무시한 악마처럼 그를 집어삼겼다. 그 악마는 지상에 내려오고 나면 무슨 수로도 다시 쫓아낼 수 없는 존재였고, 나의 벗 야노시마저 갉아먹은 존재였다.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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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에 방북했을 때는 농촌 사람들이 일손을 멈추고 일본에서 온 방문단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어 놀랐던 기억이 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땅에 쪼그려 앉아 작업을 하다가도 버스가 지나가면 일어나서 손을 흔들거나 경례를 보냈다. 버스에 탄 방문단 사람들도 기쁘게 손을 흔들며 화답했다. 나는 그들이 손을 흔드는 것이 본인의 의지인지 의무인지 몰라 복잡한 마음이 들어 웃을 수 없었다. - P64

"위대한 지도자님 아래, 조선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정당한 사회주의의 길을 걷고 있으며 우리 인민에게는 승리가 약속되어 있습니다"라는 버스 가이드의 진부한 멘트에도 "비록 지금은 ‘고난의 행군‘을 견뎌야 할 시기지만"이라는 둥 이전까지는 들어본 적 없던 본심이 섞여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 사람들의 표정과 겹치는 교조적인 말에 더욱 마음이 쓰렸다. 평양에 도착하고 나서도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을 주시하기로 마음먹었다.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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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회하려는 마음이 꾸준히 하는 사람의 동기이다. 물론 다시 한다고 더 좋아지리라는 보장은 없다. 더 좋아졌다고 해서 만족하리라는 보장 역시 없다. 보장이 다시, 더, 계속하기의 동력이 아니라 한 일에 대한 불만족이 동력이다. - P236

우리는 문장으로 느낌과 생각을 표현하지만, 그것들은 사실 어떤 문장으로도 잘 표현되지 않는다. 세상은 요란하고 빠르고 오묘해서 납작하고 느리고 순진한 문자로 붙잡기가 쉽지 않다. 글을 쓰는 사람은 가장 정확한 한 단어, 딱 들어맞는 하나의 표현을 찾으려고 한다. 그런 표현이 있으리라는 믿음을 플로베르가 심어주었다. 그는 어떤 사물과 개념을 가리키는 단 하나의 단어가 있다고 했다. 하나밖에 없는 그 단어를 찾는 것이 글쓰는 이의 일인데, 그 일은 여간 어렵지 않다. 어쩌면 불가능하다. 반복과 되풀이, 심지어 동어반복처럼 느껴지는 문장을 붙여 쓰고 이어 쓰는 사람은 그 하나의 단어, 하나밖에 없는 맞춤한 표현을 찾아내지 못한 사람이다. - P237

원한을 가진 사람은, 불만족의 원인이 자기가 아니라 외부에 있다고 생각하므로 만회하려고 하지 않는다. 불만족의 원인이 자기에게 있을 때만 만회하려는 마음이 생긴다. 만회는 외부와 타인을 향해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해 하는 것이다. 만회는 누가 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는 것이다. 세상이 자기의 족함을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가, 자기를 향해 더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지 않는다. 외부가, 다른 사람이, 누군지 무엇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바깥 세계가 자기를 위해 무언가를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사람이 벌충하기 위해 다시, 더 시도할 리 없다. 다만 투덜거릴 것이다. 만회하려 하지 않는 사람은 꾸준할 수 없다. - P239

불만은 자기가 얻은 결실이 자기가 기울인 노력에 비해 충분하지 않을 때 생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얻은 결실과 자기 것을 비교할 때 생긴다. 자기보다 덜 일한 사람이 자기와 같은 대접을 받거나 자기와 똑같이 일한 사람이 자기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은 사실을 알게 될 때 생긴다. 다른 사람이 어떤 결실을 얻었는지, 어떤 혜택을 받았는지 모를 때는 생기지 않던 불만이 다른 사람이 얻은 결실, 받은 혜택을 알게 되는 순간 생긴다. 비교하는 순간 생긴다. 이 사람에게 만회하려는 마음이 생길 리 없다. - P242

원한과 자기만족은 손바닥의 안과 박처럼 붙어 있다. 붙어 있되 정반대 쪽에 있다. 세상으로부터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고 생각할 때 생기는 것이 원한이라면, 세상으로부터 받는 과도한 평가가 당연하다고 생각할 때 생기는 것이 자기만족이다. 원한은 밖을 향하고 자기만족은 안을 향한다. 불만족의 원인을 밖에서 찾을 때 원한이 생기고, 족함의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을 때 자기만족에 빠진다. 원한이 다시, 더 시도하려는 마음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자기만족 역시 다시, 더 시도하려는 마음을 빼앗는다. - P242

카뮈는 스물두 살에 쓴 『안과 겉』의 재판을 이십 년이 지난 후에 다시 냈다. 그 책은 오랫동안 절판 상태로 있었다. 그는 젊을 때 쓴 그 책이 ‘서툴고 미숙하기 때문에‘ 다시 출판하지 않으려 했다고 서문에서 고백했다. 그가 쓴 것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글이 그 책에 실려 있다는 한 철학자의 주장을 카뮈는 반박한다. 그는 잘못 생각한 것이다. 천재가 아닌 한, 스물두 살에는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겨우 알까 말까 하는 법이니 말이다." 카뮈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다. 그리고 아마 이 말은 진실일 것이다. 스물두 살은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는 나이일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진실은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터져나오기도 하는 법이다. 때로는 기교가, ‘어떻게‘에 대한 앎이 진실을 가리기도 하는 법이다. - P243

보상은 대부분 뜻밖의 사건이다. 뜻 안에 있을 때 보상은, 아무리 큰 보상이라도 마땅하거나 미흡하다. 뜻 밖에 있을 때 보상은, 아무리 작은 보상이라도 과분하거나 놀랍다. - P247

언제까지 걸을 거라고 미리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을까. 걸을 수 없는 순간이 올 것이다. 걸을 수 없는 순간이 올 때까지 걸으면 된다. 언제까지 쓸 거라고 미리 결심할 필요가 있을까. 글을 쓸 수 없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 쓰면 된다. -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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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도 하나의 방법이긴 하다. 철조망을 통과하는 요령에 ‘밑으로 통과‘와 ‘위로 통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회‘ 역시 철조망 통과 요령 가운데 하나라는 걸 훈련병 시절 조교로부터 배웠다. 우회는 피해서 돌아가는 것이다. 통과하지 않는 것도 방법이다. 통과하지 않고도 통과할 수 있다. 참여가 아니라 외면하기 위해 읽은 책들이 세상, 개인의 남루함과 비루함을 폭로하는 데 열심인 것만 같은 이 무정한 세상의 환한 빛을 상대할 힘을 제공한다는 것은 역설이다. 이런 식의 의외의 효과가 아주 드물게 나타난다. 피했는데 만나거나, 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한 셈이 되거나, 이쪽을 향해 걸었는데 저쪽에 이르는 것과 같은 일. 유해하지 않은 부작용도 있는 것이다. - P210

한 개인은 세계 속에 놓인다. 세계는 개인의 삶에 침투하고 간섭하고 반사하고 굴절하고 회절한다. 간섭과 반사와 굴절과 회절의 경향과 정도에 의해 개인의 고유한 삶이 만들어진다. 이것을 우리는 이야기라고 한다. 개인은 이 세계의 간섭과 반사와 굴절과 회절에 맞서 싸우며 자기 운명을 만들어간다, 그러려고 한다. - P213

허용되지 않은 것에 대한 욕망에 인간이 이처럼 취약하다. 이 부자유가 스스로의 선택이라는 것보다 더 비참한 것은 없다. 이 비참함은 역설적이라기보다 인간적이다. 인간은 주어진 자유로 부자유를 선택한다. 이야기를 지어낼 수 있는 능력, 거짓말할 수 있는 자유가 부자유의 원인이 되었다. "나의 죄는 내가 악마에게 손을 내밀었다는 것이었다." - P215

인간은 악에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비범함에 이끌린다. 악을 행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악의 어떤 속성인 비범함을 소유하기를, 소유하고 있다고 내세우기를, 그렇게 보이기를 원한다. 모든 유혹의 핵심에 이 욕망이 깃들어 있거니와 특히 이런 유혹에 취약한 시기가 있다. - P216

금지되지 않은 것을 범할 능력은 누구에게도 없다. 금지된 것이 욕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 욕망하게 한다. - P218

르네 지라르의 모방이론으로 창세기의 이 텍스트를 해석하는 자리에서 장미셸 우구를리앙은 신의 소유(‘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가 아니라 신의 존재(‘신처럼 될 것이다‘)에 대한 모방으로 넘어가도록 하와의 심리 변화를 이끌어낸 뱀의 계략이 성공한 거라고 설명한다. (『욕망의 탄생』) 신의 소유를 욕심낸 것이 아니라 신의 존재에 흔들린 것이다. 인간은 신처럼 되고 싶어졌다. 비범함에 대한 유혹이 저 근원의 시간, 최초의 인간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 P220

우리는 왜 비범함을 동경하는 걸까. 우리 안에 그 가능성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우리는 악마가 될 수도 있고 천사가 될 수도 있는데, 그 가능성은 외부에 있지 않고 내부에 있다. 때로는 외부의 자극이 절대적인 것 같다. 외부의 자극에 의해 이런 존재가 되거나 저런 존재로 만들어지는 것 같을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이런 존재나 저런 존재가, 가능성의 형태로 들어 있지 않다면, 외부의 자극에 의해 이런 존재가 되거나 저런 존재로 만들어지지 못할 것이다. 어떤 자극에도 자극받지 않을 것이다. 어떤 큰 자극도 자극이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안의 존재가 우리에게 그처럼 낯선 것은 우리가 그만큼 많기 때문이고, 확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고, 우리가 우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 P221

비범함은 비범하지 않은 사람을 유혹하고 괴롭힌다. 비범해지라고 유혹하고 비범해지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도록 괴롭힌다. 그래서 우리는 차라리 깨어나지 않는 쪽을 택하려 한다. 자기 자신이 되지 않는 쪽으로, 알 속에 고착하는 쪽으로, 타성과 고정관념에 순응하는 쪽으로 몸을 웅크린다. 알 속에 있을 때가 가장 안전하다. 그 속은 복잡하지도 않고 시끄럽지도 않다. 알을 깨고 나오려고 시도하지 않을 때 우리는 평온하다. 쓰라리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다. 갈등도 없고 사유도 없다. 그래서 ‘모든 힘을 다해 깨어나지 않으려고 한다.‘ - P225

가능성이 평가의 기준이 될 때도 그 평가는 해온 일로부터 산출된다. 창작자에게 평가는 불가피하고, 평가의 기준은 평가하는 이의 내부에 있을 터이니 창작자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나는 어떠어떠한 작가다‘라고 선언할 수는 있지만, 그 선언이 곧바로 평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선언은 자기 다짐에 가깝지만, 평가는 해온 일에 대한 규정에 다름 아니다. 그 배경이나 요인은 평가자의 것이다. 선언이 평가와 어긋날 수 있는 것처럼 평가 역시 선언과 어긋날 수 있다. 평가의 배경이나 요인이 다르니 평가와 평가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는 것도 자연스럽다. - P229

2006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튀르키예의 작가 오르한 파묵은 ‘사무원처럼‘ 일한다고 말한 바 있다. 소설가를 시인과 비교하는 과정에서 한 말이다. 그에 의하면 시인은 ‘신이 말을 걸어주는 자‘이다. 그는 시인이 되고 싶었으나 신이 자기에게는 말을 걸어주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고, 그래서 시인이 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신이 자기를 통해서 말을 한다면 어떤 말을 할지 상상해보려고 노력했다. 아주 꼼꼼히 알아내려고 노력했다. 그 과정이 바로 산문(소설) 쓰기라고 그는 말한다. 그의 정의에 의하면, 시인은 신이 말을 걸어주는 자이고, 소설가는 신이 자기를 통해 할말이 무엇인지 찾으려고 애쓰는 자이다. 시인은 영감의 사람이고, 소설가는 일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풀어도 될 것이다. 일하듯 쓰는 사람이 소설가 라는 그의 말에 동의한다. 아니, ‘쓰는 일‘을 하는 사람이 소설가이다. 사르트르는 시인을 언어에 봉사하는 사람으로, 소설가를 언어를 이용하는 사람으로 구분했다. 그가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물을 때 문제삼은 ‘문학‘은 소설(산문)이지 시가 아니었다. 시는 문학이 아니라 예술이기 때문이다. 소설가는 언어를 도구로 사용하여 일하는 자이다.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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