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어머니는 자기 수프에서 고깃조각들을 건져내 아들의 숟가락에 올려놓는다. 좀 피곤해 보이는 아들은 어머니에게 말도 별로 건네지 않고 조용히 앉아서 먹기만 한다. 그에게 내가 지금 얼마나 우리 엄마를 그리워하는지 아느냐고 말해 주고 싶다. 어머니한테 더 잘 대해드리라고, 삶은 허망해 어머니가 언제 훌쩍 떠나가버릴지 알 수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으시게 하라고, 혹시 지금 어머니의 몸안에 작은 종양이 자라고 있지는 않은지 반드시 확인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 P22

엄마의 사랑은 엄한 사랑 그 이상이었다. 무자비하고 단단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나약함이 설 자리는 털끝만큼도 내주지 않는 강철 같은 사랑이었다. 제 아이한테 가장 좋은 게 뭔지 열 발짝 앞서서 보는 사랑, 그 과정에서 아이가 아무리 고통스러워해도 개의치 않는 사랑이었다. 내가 다쳤을 때 엄마는 자신이 다친 것처럼 내 고통을 고스란히 느꼈고, 다만 과잉 보호에 죄책감을 느꼈던 것이다. 단언컨대 이 세상 누구도 우리 엄마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나는 그 사실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 P34

"울긴 왜 울어! 네 엄마가 죽은 것도 아닌데."
우리집에선 이 표현을 자주 썼다. 엄마는 미국 격언에 대해 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었으므로 자기만의 것을 몇 가지 만들어냈다. "오직 엄마만이 너한테 진실을 말해줄 수 있어. 왜냐면 진짜로 너를 사랑하는 사람은 엄마뿐이니까" 같은 말들을 엄마가 일찌감치 나에게 가르쳤던 것 중에 지금 생각나는 말은 이런 거다. "너의 10퍼센트는 따로 남겨두어라." 누군가를 아무리 깊이 사랑하더라도, 혹은 깊이 사랑받는다고 믿더라도 절대 네 전부를 내주어서는 안 된다. 항상 10퍼센트는 남겨두어라. 네 자신이 언제든 기댈 곳이 있도록."나도 네 아빠한테 내 맘을 온전히 다 내어주진 않는단다." 엄마는 이렇게 덧붙였다. - P35

엄마의 규칙과 기대는 내 진을 다 빼놨지만, 엄마에게서 벗어날라치면 혼자 알아서 놀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그래서 나는 어린 시절 내내 두 가지 충동이 분열된 채로 지냈다. 어느 날엔 결국 엄마에게 꾸중을 듣는 것으로 끝나는 타고난 선머슴 기질에 따라 행동했다가, 다음날엔 엄마에게 찰싹 달라붙어 엄마를 기쁘게 해주려고 안간힘을 쓰는 식이었다.
[…]
혼자 있는 동안 끊임없이 방을 치우고, 부모님의 짐 가방을 정리하고, 수건으로 가구를 구석구석 닦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때 두 분이 돌아와서 내가 한 일을 봐주기를 얼마나 간절히 기다렸던지. 나는 바퀴 달린 어린이용 침대에 앉아 방문만 노려보고 있었다. 오직 두 분의 얼굴이 기쁘게 변하는 모습을 보겠다는 생각에, 내일 아침이면 청소부가 와서 치울 거라는 생각 따윈 꿈에도 하지 못한 채로. 부모님이 돌아와서 아무 변화도 감지하지 못하자, 나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방안 이리저리로 끌고 다니면서 내가 한 착한 일을 일일이 알려주었다. - P39

엄마는 다른 영역에서는 부모의 권위를 앞세웠지만 음식에 대해서만큼은 무척 관대했다. 내가 좋아하지 않으면 절대 억지로 먹게 하지 않았고, 내 몫의 절반만 먹고 남겨도 결코 접시를 다 비우라고 말하는 법이 없었다. 엄마는 음식은 즐기는 것이어야 하며 배가 부른데도 꾸역꾸역 밀어넣는 것만큼 미련한 짓도 없다고 생각했다. 엄마의 유일한 규칙은 뭐든지 적어도 한 번은 맛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
우리 가족은 내 용기를 칭찬했고, 나 역시 스스로가 자못 자랑스러웠다. 그 순간의 무언가가 나를 새로운 길로 들여놓았다. 비록 착한 아이가 되는 일은 그리 순탄치 않았지만, 용감한 아이가 되는 것만은 제법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세련된 입맛으로 어른들을 놀라게 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기 시작했다. - P42

부모님은 모두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 내가 자란 집은 책이나 레코드로 가득찬 집이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예술작품 을 구경하거나 박물관에 가거나 그럴듯한 문화시설에서 연극을 관람하는 호사를 누리지도 못했다. 우리 부모님은 아마 내가 읽어야 하는 작품의 작가나 내가 봐야 하는 외국 영화 감독의 이름 하나 몰랐을 것이다. 중학생이 된 내게 『호밀밭의 파수꾼』 구판본도 건네주지 않았고, 롤링스톤스 레코드판이든 뭐든 내가 문화적으로 성숙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어떤 학습 모델도 소개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님은 두 분만의 방식 대로 쌓인 세상 경험이 풍부했다. 두 분은 세상을 실컷 구경했고, 세상이 제공하는 것들을 원 없이 맛보았다. 비록 고급문화에는 문외한이었지만 그 결핍을, 자신들이 어렵게 번 돈으로 세상 최고의 산해진미를 맛보는 것으로 만회했다. 나는 순대며 생선 내장이며 캐비아 같은 음식을 마음껏 맛보면서 풍족한 유년기를 보냈다. 부모님은 맛있는 음식을 사랑했고, 그걸 만들고 찾아다니고 함께 즐겼으며, 나는 그들의 식탁에 초대 받은 특별 손님이었다. - P43

"엄마가 모자 한번 써보라 해도 너는 싫어하잖아."
[…]
한국 아이돌로 살 수도 있겠다는 나의 희망은 그렇게 단박에 허물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서울에서 잠깐이나마 나는 어쩌면 연예인이 될 기회를 노릴 수 있을 정도로 예쁜 아이였다. 엄마가 아니었다면 나는 한낱 그 중식당의 애완용 악어 신세가 됐을지도 모른다. 화려한 수조에 갇혀 사람들의 심심풀이 구경거리 노릇을 하다가, 나이들어 몸이 더는 수조에 맞지 않으면 인정사정없이 바로 치워지는 신세가. - P62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엄마는 완전히 망연자실한 상태였다. 엄마는 또렷한 한국말로 연신 "엄마, 엄마" 하고 울부짖었다. 엄마는 거실 바닥에 널브러져, 소파에 앉은 아빠 무릎에 기댄 채로 온몸을 들썩이며 흐느꼈고, 그런 엄마를 보면서 아빠도 같이 울었다. 그때 나는 엄마가 무서웠다. 그래서 할머니 방에 있던 엄마와 엄마의 엄마를 지켜보던 때처럼 멀찍이 떨어져서 부모님을 조심스럽게 지켜보았다. 그때까지 나는 엄마가 그처럼 적나라하게 자기감정을 드러내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엄마가 마치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자제하지 못하는 모습은 난생처음이었다. 당시에는 엄마의 슬픔이 얼마나 깊은지 지금처럼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 엄마는 어마어마한 상실의 영역으로 넘어갔지만 나는 아직 그쪽으로 넘어가지 않았으니까. 나는 엄마가 자기 엄마에게서 떨어져 지낸 그 모든 세월에 대해, 한국을 떠난 것에 대해 느꼈을지도 모를 죄책감도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의 내가 위로의 말을 듣고 싶어 하듯, 엄마도 그랬을 텐데 그때는 어떤 위로의 말을 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때는 엄마의 마음을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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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차에서 도시로 돌아가면서 여기를 걷고 있다. 해가 지고 있는데 나는 동쪽을 향해 걸어간다. 나는 이중의 여정을 밟는다. 하나의 여정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여정이다. 마주 오는 사람은 초록이 물들어가는 인적 없는 지역을 걸어가는 사람을 본다. 그런데 이 평화롭게 걸어가는 사람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는 자기 앞으로 늘어진 그림자를 본다. 길게 드리운 그림자가 땅 위로 움직인다. 그림자의 다리가 창백하고 길다. 나는 인적 없는 곳을 가로지른다. 그림자가 갈색 벽 위로 올라가더니 갑자기 머리가 없어진다. 마주 오는 사람은 이걸 보지 못한다. 이걸 보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다. 나는 두 건물 사이에 만들어진 홀로 들어선다. 홀은 끝없이 높고 그림자로 가득 차 있다. 이곳의 흙은 약간 퀴퀴하고 마치 텃밭의 흙처럼 다루기 쉽다. 마주 오는 들개 한 마리가 미리 한쪽으로 비키면서 벽 옆으로 달려 간다. 우리는 서로 지나쳤다. 나는 주위를 둘러본다. 뒤에 남겨진 문턱이 빛난다. 거기 문턱 위에서 순간적으로 홍염이 개를 휩싼다. 그다음에 개는 황야로 달려간다. 그리고 지금에야 나는 개의 털빛이 붉은색이라고 단정할 기회를 얻는다. - P71

이 모든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왜냐하면 정상적인 시력으로 볼 수 있는 나라에서는 다른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길을 걷던 사람이 개와 마주친다, 해가 진다, 황야가 초록으로 물들어간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나라는 관심과 상상의 나라이다. 여행자는 외롭지 않다! 두 명의 누이가 양옆에서 걸으며 손을 잡고 이끈다. 누이 한 명의 이름은 관심이고 다른 누이의 이름은 상상이다. - P72

약속은 잊어버리자. 나는 사랑에 빠진 남자가 아니다. 나는 거리의 선량한 천재이다. 내게로 오시오! 내게로 오시라고!
3시 15분이다. 시곗바늘이 겹쳐져서 수평으로 뻗어 있다. 그걸 보고 나는 생각한다.
‘파리가 발을 비비는 거야. 심란한 시간의 파리 한 마리가?‘
어리석어! 무슨 놈의 시간의 파리야!
그녀는 오지 않는다. 그녀는 오지 않을 것이다. - P73

관심의 세계는 머리맡에서 시작되고, 꿈나라로 떠나기 전에 당신이 옷을 벗으면서 침대 가까이로 끌어오는 의자 위에서 시작된다. 당신이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나면 온 집 안이 아직 잠에 빠져 있고 방 안에는 햇살이 가득하다. 고요하다. 움직임 없이 가득한 햇빛을 그대로 두려면 꼼짝하지 마시라. 의자 위에 양말이 놓여 있다. 갈색 양말이다. 그런데 조금의 움직임도 없는 눈부신 햇살 아래에서 당신은 갈색 직물 속에 위로 구불구불하게 뻗친 빨갛고 파랗고 오렌지 빛깔인 털 가닥들을 갑자기 발견한다. - P80

"기다려!" 돌멩이가 외쳤다.
"날 좀 봐!"
그리고 정말로 나는 기억했다. 돌멩이를 잘 살펴봐야 했다. 정말, 의심의 여지 없이, 그 돌멩이는 놀라운 물건이었다. 그런데 그런 돌멩이가 관목들 사이에서, 풀숲 사이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걸 손안에 쥐었던 나는 그것이 어떤 색깔이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 돌멩이는 연보랏빛이었을 수도 있고, 한 덩어리가 아니라 몇 개의 조각으로 구성된 것이었을 수도 있다. 어떤 화석이 그 돌멩이 안에 들어 있었을 수도 있다. 죽은 딱정벌레나 버찌 씨 같은 것 말이다. 그 돌멩이는 구멍이 숭숭 많이 난 것일 수도 있었고 마지막으로, 내가 땅바닥에서 주워 든 것이 사실은 전혀 돌멩이가 아니라 녹색 빛을 띤 뼛조각이었을 수도 있다! - P82

중요한 것은, 아이들은 진지한 이야기를, 보다 정확하게는 반박하거나 배척할 수 없는 이야기는 전혀 하지 못한다는 확신을 어른들이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아이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모두 쓸데없다고 치부되었다.
그뿐인가. 아이들의 대화나 생각, 열망 속에는 언제나 점잖지 못한 것이 포함되어 있다고 의심했다. - P87

그때가 당도했습니다. 제가 위대한 문학을 읽기 시작한 겁니다. 그 영향이 굉장하지 않을 수가 없는 사건이 마침내 일어난 겁니다.
생전 처음으로 돈키호테에 대한 지식이 제 두뇌에 생겼습니다. 다른 사람이 만들어낸 한 인간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들어갔습니다. 지상에서 가능한 형태의 불멸이 머릿속에 자리 잡았고 저는 이 불멸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저는 사고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여자를 인식하는 것처럼 유일무이하고 반복되지 않는 것입니다. - P92

아버지에게는 제 걸음걸이를 지켜보는 것이 제가 걸어가고 있는 길을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해요. 그 광경은 아버지에게 자기 만족을 불러일으키고, 아버지가 한 번도 이루어본 적 없는 어떤 업적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키고, 긍지와, 왠지 모르게 자꾸 새어 나오는 웃음을 불러일으킵니다. 저한테는 그 웃음이 바보처럼 생각되고요. 저는 아버지가 보는 데서 책 읽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저는 그걸 피합니다.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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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일어나 바닥 위에 간신히 서서 옷을 입었다. 더 이상 중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이 새로운 세계의 법칙들을 아직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경계심을 가지고 몸을 움직였다. 어떤 부주의한 행동으로 놀라운 영향을 불러일으킬지 몰라 두려워하면서. 그냥 생각하고 사물을 그저 받아들이는 것조차도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밤새 그에게 생각을 물질화하는 능력이 갑자기 생기기라도 한 것일까? 그렇게 추정할 근거가 있다. 예를 들면, 우선 단추들이 저절로 채워졌다. 또한, 예를 들면, 머리카락을 깨끗이 하기 위해 빗을 적셔야 했을 때 갑자기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돌아보았다. 햇살 아래 벽에서 렐랴의 옷들이 한 아름으로 몽골피에 Montgolfier 형제의 열기구 색깔로 불타고 있었다. - P27

자갈들이 버석거리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내 눈길 밑으로 타이어가 달려 나간다. 쪽문이, 구부러진 지팡이처럼, 내 어깨 밑으로 파고들 기회를 노리고, 녹이 잔뜩 슬어서 부풀어 보이는 어떤 나사못이 길 위에 누워 있다. 그렇게 여행이 시작된다! - P42

눈에 작은 파리가 들어갔다. 오, 어째서 이런 일이? 내가 달리는 곳은 이렇게 넓은데, 내가 얼마나 빨리 달리는데, 꼭 그래야 하는지···. 그리고 전혀 일치점이 없는 두 종류의 운동(나의 움직임과 벌레의 움직임)이 이렇게나 작은 내 눈 속에서 충돌했어야만 하는가 말이다!
시야가 쓰라려온다. 얼마나 심하게 눈을 찡그렸던지 눈썹이 뺨에 닿을 지경이다. 핸들을 놓아서는 안 된다. 눈꺼풀을 쳐들려고 애를 쓰지만 눈꺼풀은 경련을 일으킬 뿐이다···. 나는 브레이크를 잡고 자전거에서 내린다. 자전거가 누워 있고 페달은 여전히 돌아간다. 나는 손가락으로 눈을 벌린다. 눈알이 밑으로 돌아간다. 나는 붉은 눈꺼풀 안쪽을 본다.
눈 속에 들어간 벌레는 왜 즉시 죽어버리는 걸까? 내가 독액이라도 분비한단 말인가? - P42

새로운 줄타기 곡예사가 옛것을 패러디한다.
그리 오래되기 전에 우리는 나이아가라의 줄타기 곡예사들도 보았다. 그것은 과거로의 회귀였고 변절이었다. 이 곡예단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공연했는데, 헬멧을 쓰고 로마식 장비를 갖추고는 자전거를 타고 와이어 줄 위로 다니는 장갑 보병들이었다. 폭죽이 터지는가 하면 일제 사격도 이루어졌다. 특수효과가 강렬했다. 그러나 흔들거리는 와이어 줄과 함께 공중으로 뛰어오를 줄 아는, 해진 바지를 입은 소박한 사람의 공연을 보면, 때로는 이 사람이 이미 살아 있는 어떤 존재가 아니라 그림자일 뿐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외관상 수수한 이 공연이 가장 드높은 장인의 경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 P54

코즐렌코프가 갑자기 일어섰다. 그는 꿈을 떠올렸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의자가 뒤로 물러났다. 회계책의 페이지들이 곤두섰다.
그는 옆 사무실로 가는 문을 열고 문턱을 넘어섰다. 바로 그 때 모든 고개들이 숙여졌다. 그는 창문들이 열려 있고 창문 너머에 초록이 우거지고 나뭇가지들이 드리운 것을 보았다. 그 순간 창문들이 움직였다. 어떤 힘이, 어떤 기운이 창문에 날아들어 창 문짝을 사방으로 흔들어놓았다. 나뭇가지들이 흔들리며 설렁거렸다. 책상에서부터 회오리를 일으키며 서류들이 날아올랐다. 그의 등 뒤에서 쾅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맞은편 문은 저절로 열렸다.
그리고 그는 가장 중요한 것을 보았다. 모든 고개들이 푹 숙여지더니 얼굴이 책상에 가닿는 것이었다. 물론 맞바람 때문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도 그를 향해 시선을 들지 못하는 것도 보았다. 그리고 그는 그 의미를 얼마든지 좋을 대로 평가할 수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모두들 내 앞에서 고개를 푹 수그렸어. 난 걸어간다. 난 천사를 보았어. 나는 예언자야. 나는 기적을 행해야 돼.‘ -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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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적인 부조리주의자가 되기 위해서 는 불안과 불확실성을 기꺼이 껴안고 우리가 마주한 곤경을 직시해야 해요. 그것은 추락할 것을 알면서도 뛰어 내리는 일이며 불가능의 혼돈 속에서도 가능하다는 열정으로 춤추는 일이에요.
이를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첫째, 인류가 지구와 동맹을 맺고 존속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공동체의 진보적 상상과 헌신을 바탕으로 변화해야 해요. 둘째, 우리가 사는 동안 빌려 쓰는 이 지구라는 행성을 아끼고 지키는 것이 우리의 임무임을 잊지 말아 야겠지요. - P371

현대 사회는 즐거움이 삶의 의미가 아니라 마치 모욕이나 사치 혹은 병이라도 되는 것처럼,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쾌락주의자hcdonist라 얕잡아 본다. 어찌 보면 우스운 일이다. 오래전 우리는 가능한 한 모두가 안전하고 행복하며 귀하게 여겨지는 사회를 만들고자 노력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배우기 위해 학교에 갔고 훌륭한 선생님들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우리는 경청하는 법과 끊임없이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법을 배웠으며 질문하는 법과 사과하는 기술을 배웠다. 우리는 모두 한낱 인간일 뿐이므로 늘 실수하고 의도하지 않아도 다른 이에게 상처를 줄 수 있으니 말이다. 계속해서 경외할 수 있도록 우리는 더욱 겸허해지는 법을 배웠다. - P395

사람들은 제각각 자신만의 신체적, 감정적, 심리적 고유성을 지니고 태어났으며 그것은 자신과 공동체 모두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가령, 과묵한 사람이 있다면 사람들은 그를 공동체의 선물로 여겼고 사회가 다양한 배려와 지원을 갖추도록 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공동체의 촉감과 후각, 소리, 관능의 감각을 정제했다. 이처럼 저마다의 감정적, 신체적 특성에 맞추어 서로를 위 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우리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였다. - P403

어차피 세상은 누군가 만들어 낸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힘을 가진 자들이 이야기의 등장인물과 시점, 형식을 정할 뿐. 나는 이름이 가진 힘을 믿는다. 성서가 되거나 찬사로 남거나, 회상이 되거나 주문이 되거나. 기억처럼 보이는 것이 예언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달렸다. 우리 모두에게. - P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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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성적으로 학대받고 매 맞으며 친족에 강간당하고 괴롭힘당한 여자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정의에 대해 물었습니다. 어떤 여자들은 가해자들이 법적 처벌을 받아 감옥에 수감되고 대중에게 신상이 공개되고 일자리와 경력을 잃기를 바랐습니다. 어떤 여자들은 가해자가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리기를 원했고요. 하지만 제가 이야기를 나누었던 많은 여자는 그 무엇보다, 자기가 저지른 범죄가 어떤 의미인지 가해자가 정확히 깨닫기를 바랐습니다. 여자들은 진정한 치유가 일어나 미래를 꿈 꿀 수 있기 위해서 그 일이 가장 필요하다고 대답했습니다. 여자들은 자신들이 온전한 인간이자 실재하는 인간임을 가해자가 깨닫기를 바랐습니다. 자신이 가한 폭력으로 인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닫고 진심으로 후회하고 마음 아파하기를요. 그들은 가해자가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고 자기가 저지른 폭력의 뿌리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들은 가해자가 깊은 반성의 시간을 거쳐 다시는 같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 했습니다. - P303

사과란 대체 무엇일까요? 사과는 자신을 낮추고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오만을 버리는 일입니다. 죄를 시인하는 일입니다. 항복입니다. 평형추입니다. 진심에서 우러난 교감입니다.
사과는 망각에 대한 해독제입니다. 망각은 편리하고 바로 그 점 때문에 분노를 삽니다. 이 망각이 국가와 우리의 가족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사과는 폭력의 서사를 존속시키는 거짓, 부정, 근거 없는 믿음, 망상을 걷어 치웁니다. 사과는 기억하는 일이며 어떤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음을 공적으로 인정하는 일입니다. - P305

제 아버지는 어느 책에서 잘못을 시인하는 남자는 남자들의 적이라고 배웠습니다. 한 명이 자기 잘못을 인정해 버리고 나면 모든 서사가 무너지기 시작할 것이라고요. - P306

우리는 평생 진실이 밝혀지기만을 기다려 왔습니다. 나와 상관있든 아니든 진실이 모든 것의 중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진실은 우리 신경 체계 안에 있는 정지 신호와 같아서 이것 없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거짓은 차마 부정할 수 없이,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끈덕지게 남아 모든 것을 통제하고 정의합니다. 거짓은 암세포처럼 시스템 전체로 퍼져 나갑니다. - P307

사과는 방법인 동시에 실천입니다. 진정한 사과는 그 행위만으로도 변화와 해방의 가능성을 가져옵니다. 진정한 사과를 행하고 수용할 때 모든 공격과 원한, 증오, 악의, 고통이 용해되어 우리 신체와 정신과 심리 전체에 연금술적 반응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진실한 용서일 테지요. 엠마 골드만 Emma Goldman이 말했듯 "누군가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그를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 P310

오늘 내가 이 글을 쓰는 동안 트럼프 정부는 이라크, 시리아, 이란, 리비아, 소말리아, 수단, 예멘, 이슬람 7개국에 미국 입국을 금지하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미국을 가장 미국답게 만드는 것 중 하나는 국적을 막론하고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땅과 안전한 피난처를 기꺼이 제공하는,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나라다운 정신이다. 그러나 지금 미국을 지배하는 기업과 인종 차별주의자, 부자들이 이를 산산조각 내고 있다. 미국이 입국을 막은 대부분의 국가는 우리가 제국주의적 간섭을 통해 이미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곳이다. 이를 생각하면 상처 위에 모욕까지 더하는 형국이다. 우리는 오히려 우리가 책임져야 하는 나라에서 오는 사람들을 추방하고 있다. 이중 추방, 반이상적 추방이다. 추방에 추방을 더하는 격이다. - P324

우리 몸의 어떤 점 때문에 당신이 우리 몸을 침범하고 결정하고 통제하고 입법하고 폭력을 저지르고 우리 의지에 반하는 일을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아마도 당신들은 우리의 관대함을 나약함으로, 우리의 인내심을 수동성으로, 우리의 예민함을 여림으로 착각하고 있는 듯해요.
그래서 당신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군요. 우리가 과거로 돌아갈 일은 결단코 없으리라는 사실을요. 우리는 이 법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어요. - P338

자유와 선택할 권리가 주는 달콤함을 한 번이라도 맛보았다면, 내 몸을 진정 소유해 보았다면, 진실로 해방되어 내 몸의 무한한 가능성을 알았다면, 내 몸의 주체가 되어 내 모든 구멍에서 솟구치는 그 생명력을 느껴보았다면, 그것을 포기할 수는 없지요. 그 무엇이 가로막는다 해도요. - P339

우리는 당신들이 무엇을 하려는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서 피임과 평등한 결혼과 시민권, 투표권, 그 밖의 무수한 것을 빼앗으려는 사악한 계획의 시작일 뿐이겠지요. 이제 막 태동하기 시작한 미래를 막기 위한 당신들의 필사적인 노력이요. 과거를 올바르게 알고 반성하는 미래, 비판적 인종 이론과 백인 우월주의, 성 차별주의, 트랜스포비아에 관해 진실을 가르치는 미래와 지구를 염려하고 공기, 물, 숲, 동물, 모든 생명체를 지키는 데 삶을 헌신하는 미래와 사람들이 주체적으로 자기 몸과 자궁, 젠더를 결정하는 미래, 원하면 결혼하고 원하지 않으면 결혼하지 않으며, 아이를 원하면 아이를 갖고 원하지 않으면 갖지 않는 미래, 이 모든 미래를 막기 위해. 당신의 그 모든 거짓과 술수, 기만적인 책략에도 당신들은 우리를 멈추지 못해요. 그냥 사실이 그래요. 당신들이 우리의 분노와 연대와 단합을 불러일으켰어요.
우리는 우리의 미래와 기나긴 세월 동안 싸워온 모든 것이 위태로운 때를 맞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나는 내 몸의 자유를 위해서라면, 이 모든 자유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내 몸을 바칠 거예요. 그리고 나는 알고 있어요. 나와 같은 사람들이 아주, 아주 많다는 것을요. - P340

우리의 낙원에 신화적이며 기업 친화적인 아버지와 군대는 필요하지 않음을 이브는 알았습니다. 그들은 신의 이름으로 우리의 상상력과 일상을 지배한 뒤 재물을 약탈해 부를 쌓았고 우리에게는 얌전히 기다리라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백마 탄 왕자가 우리에게 낙원을 가져다주기를, 눈부시게 빛나는 구름 속에서 낙원이 내려오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브는 알고 있었어요. 왜냐면 낙원은 줄곧 여기에 있었으니까요. 누군가가 낙원을 가져다줄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브는 이미 존재하는 낙원을 발견하고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눈과 능력과 열망이 필요함을 알았던 거예요. 낙원은 계층이나 경쟁, 지배, 탐욕에 기반하지 않습니다. 연대와 공조에 뿌리를 두고 있어요. 낙원은 이 땅에 태초부터 있었으며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과 인간이 꿈꾸는 것 그 이상을 줄 수 있습니다. - P349

오드리 로드 Audre Lorde는 《에로틱의 용도 The Uses of the Erotic》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여성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비합리적 지식에서 솟아오르는 그 힘을 줄곧 신뢰하지 못했다. 남성들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쩐지 그것에 반감을 갖도록 평생 경고받아 왔다. 그들의 세상은 여성이 남성을 위해 봉사할 수 있을 정도까지만 느끼는 것을 인정하나, 그 정도 깊이의 감정도 너무 두려운 나머지 자기들 안에서는 그 가능성을 검토하지도 못하고 있다. 물론, 권한을 지닌 여성들은 위험하다. - P352

이브는 우리 안에 살아 있습니다. 그녀는 기억을 소환하기를 간구합니다. 그녀는 우리 어머니의 몸 안에 있으며 우리는 그 기억을 소환하기 바로 직전에 있지요.
기억을 어떻게 소환할 수 있을까요? 무엇이 우리 회상과 이미지, 감각을 방해할까요? 우선, 우리는 당당하고 거리낌 없이 열매를 베어 물어야 합니다. 열매는 우리에게 비전과 상상을 불러일으킬 거예요. 열매를 먹는 일 은 현존하는 권력이 설계해 영속시키는 이야기와 신화들을 들여다보고 우리 스스로 다시 배우는 일입니다. 의례와 시, 시간, 교류, 식물 의학을 다시 가져오고, 상자를 열어 그 안에 든 것을 배우고, 신비를 쓰다듬고, 춤을 추고, 성교하고, 우리의 지식을 신뢰하고, 허락을 구하지 않고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들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 P353

우리는 지금 가부장제로 오염된 자본주의자들의 황폐한 정원에 갇혀 기업이라는 아버지 신에 순종하며 살고 있습니다. 마치 그들이 우리를 진짜 염려하기라도 한다는 듯이요. 성찰도 깨달음도 없이 나른한, 자기들끼리 낙원이라 부르는 이곳이 마치 진짜이기라도 한 것처럼요. 유혹적인 소비지상주의와 전체주의적 감시, 기업이 소유한 미디어, 공허하기만 한 셀러브리티 문화, 인터넷 관음증과 괴롭힘으로 뒤범벅된 이곳이 우리를 지켜준다고 착각한 채로 말이에요. 이브는 이것들이 신기루임을 알았습니다. 그녀는 진짜 정원, 태초의 정원을 갈구했어요. 그러니까 하느님 아버지가 정원을 유지하기 위해 이 땅에 자기 질서와 폭력, 징벌을 심기 이전의 정원을 원한 거예요. - P358

제임스 볼드윈James Baldiwin은 이렇게 멋진 글을 남겼어요.

그가 니그로의 지배적인 힘에서 풀려날 유일한 방법은 합의, 바로 흑인이 되는 것이다. 지금처럼 자기만의 고독한 권력의 정점에서 자아를 지키기 위한 장벽을 쌓고 애석한 눈으로 그들을 지켜보다가 어두운 밤이 되면 남몰래 찾아오는 것으로는 안 된다. 그 고통으로 가득 찬, 춤추는 나라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 P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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