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나의 엄마가 디아나에게 다가온다. 손을 번쩍 들고 다가온다, 디아나를 때리려고. 나는 사랑 때문에 절망적으로 소리친다. 아니에요 선생님, 제가 그랬어요, 레코드판을 튼 건 저예요. 그러자 그녀는 어쩔 줄을 모르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른 채 그대로 멈춰 선다. 공중에 손을 높이 들고 있는 모습이 횃불만 없는 자유의 여신상 같다. 그녀는 자신이 나의 선생님이라는 것을 자각했고 선생님으로서 해서는 안 될 행동 —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집 안에서만 일어나는 일, 보는 눈이 없을 때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하는 일 — 을 하고 있는 걸 내가 봤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없이 방을 나간다. - P57

나는 디아나 부모님 침실 문을 연다. 방 안은 마치 농도 짙은 액체, 무슨 방부액 같은 것이 담긴 수족관 같았다. 공기 중에는 실밥 같은 먼지가 떠다니고 이상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시큼하면서 달큰한 썩은 내, 최루가스, 천 개쯤 되는 담배꽁초, 오줌, 레몬, 표백제, 생고기, 우유, 과산화수소수, 피 냄새. 빈방에서 날 수 있는 냄새도 아니고 부모님 침실에서 보통 나는 냄새는 더더욱 아니다. - P61

그것은 머리가 달린 괴물이다. 잔뜩 성이 난 누런 이빨. 그의 얼굴이 내 얼굴 가까이 붙어 있다. 썩은 고기에서 나는 악취가 풍긴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마구 내뱉고 짐승 소리를 내고 으르렁거리고 쌕쌕거리는 소리를 내고 내 얼굴에 침을 흘린다. 손으로 내 목을 한 대 치더니 목을 조르는데 그 붉게 충혈된 눈을 보니 나를 죽일 것 같고 나를 증오하는 것 같고, 그러니 나는 죽을 것이다. 나는 죽을 거야.
신이시여.
제발, 나는 속으로 말한다, 제발. - P63

고향에 돌아가는 일이란, 모두가 알고 있듯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포옹을 하고 눈물을 훔치고 나면 진정한 재회의 순간, 우리는 사실상 이미 달라진 사람들인데 예전처럼 서로를 마주하는 순간, 상대방이 누구인지 모르면서 상대방을 마주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아니면 아무도 제대로 마주하지 않는 순간. 아이고 예뻐라, 진짜 맛있네,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가식의 말들이 오간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없는 곳에서 우리를 찾고, 우리는 그들이 없는 곳에서 그들을 찾는다. 여기에서 비극이 시작된다. - P67

나는 이웃집, 그 이상한 오빠의 집 문을 두드린다. 왜냐하면, 우리 집과 불과 열 발짝 떨어진 곳으로 오면서 나는 혼잣말로 쌍둥이 자매들 소식이 궁금하다고 되뇌었지만, 사실 그의 소식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해외로 이민 간 가족의 잊힌 아들. 그 남자. 내 어린 시절의 그 소년.
[…]
그는 내가 누구인지 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건, 그가 누구인지 내가 안다는 것이다. 서로 얼굴을 마주하면서 우리는 결코 길을 벗어난 적이 없다고 느낀다. 나는 떠난 적이 없고 그는 남겨진 적이 없다. - P68

그 둘이 방에 없을 때 — 예를 들자면 화장실을 동시에 가거나 동시에 목이 마르거나 하니까 — 나는 복도에 나가 있곤 했는데 그런 어느 오후에 누군가 복도에 있는 방문 하나를 열고 나왔고 그렇게 나는 둘째 오빠, 그 이상한 오빠를 알게 되었다. 그는 뭐 하나 좀 보여줄까, 하고 내게 물었고 나는 네, 라고 대답했다. 왜냐하면 나는 평생 뭔가 보는 것을 좋아했고 남자들에게는 항상 네, 라고 말했으니까.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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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빛이 사람을 압도하고 두렵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한번은 폭설이 그친 무렵, 눈 덮인 논가 국도를 달리다가 가슴이 심하게 뛰고 숨쉬기가 어려워 갓길에 잠시 차를 세워둔 적도 있었다. 마음의 보호대 같은 것이 부러진 기분이었다. 덜 느낄 수 있도록 고안된 장치가 사라진 것 같았다. - P12

지우는 개새끼라는 말은 개의 새끼라는 뜻이 아니라고 했다. 여기서 개는 가짜라는 뜻이라고, 그러니까 ‘정상 가족‘이라는 테두리 밖의 ‘가짜‘ 자식을 뜻하는 멸칭이라고 했다. 지우는 거기까지 설명하더니 나쁜 말이네, 라고 말하고는 앞으로는 그 단어를 쓰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러더니 개새끼, 미친놈, 씨발놈 어느 것 하나 쓸 만한 말이 없다면서, 인간은 왜 이렇게 치졸하냐고, 왜 꼭 약한 사람을 짓밟는 식으로밖에 욕을 못 만드느냐고 했다. - P13

개새끼. 어원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로 그 말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나는 강아지를 떠올렸다. 자기에게 관심도 없는 사람의 바짓자락에 붙어서 꼬리를 흔드는 모습을.
왜 개새끼라고 하나. 개가 사람한테 너무 잘해줘서 그런 거 아닌가. 아무 조건도 없이 잘해주니까, 때려도 피하지 않고 꼬리를 흔드니까, 복종하니까, 좋아하니까 그걸 도리어 우습게 보고 경멸하는 게 아닐까. 그런 게 사람 아닐까. 나는 그 생각을 하며 개새끼라는 단어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나 자신이 개새끼 같았다. - P13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 P14

그때의 나는 사람이 싫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간절히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서울에서처럼 친구와 한참 이야기하고 싶기도 했고,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 하나만 있어도 좋겠다는 욕심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가깝고 끈끈해서 속까지 다 보여주고 서로에게 치대는 사이가 아니었으면 했다. 나에게 결혼은 그런 것이었지만, 더이상 그런 관계가 가능하리라는 믿음이 들지 않았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 추우면 창문을 닫고 목이 마르면 물을 따라 마시는 내가 보였다. 여전히 어려운 밤을 보내면서도, 예전처럼 몸을 쥐어짜며 울지는 않는 내가 보였다. 두 시간, 세 시간을 이어 잘 수 있는 내가 보였다. 그렇지만 ‘나아지고 있는 걸까‘라는 질문에 선뜻 그렇다고 답할 수가 없었다. - P14

"니 젊음이 아까워. 남자도 다시 만나야지."
엄마는 그렇게 말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몇 번이고 후후 불어 마셨다.
"남자 없이도 잘 살 수 있어, 엄마."
"너, 사람들이 이혼녀 얼마나 우습게 보는지 알아? 다들 뒤에서 뭐라 해."
나는 대답 없이 창밖을 바라봤다. 그건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아. 엄마. 사람들이 트랙터로 밭을 갈고 있네. 무언가를 심으려고 하나봐. 여름이랑 가을에는 바깥 풍경이 볼만하겠다. 재촉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잖아. 아무도 겨울 밭을 억지로 갈진 않잖아. - P16

‘그래도 김서방은 참 착해‘ 엄마는 늘 그렇게 이야기했었다. 남자는 여자 때리지 않고 도박 안 하고 바람만 안 피워도 상급에 든다고, 그 이상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전남편은 그런 의미에서 엄마에게 착한 남자였다. 그가 바람피운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엄마는 남자와 사는 삶에 희망이 있는 것처럼 말하곤 했지만, 그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도리어 엄마야말로 남자에 대한 희망이 없는 사람 같았다. 때리지 않고 도박하지 않고 바람피우지 않는 남자만 되어도 족하다니, 인간 존재에 대한 그런 체념이 또 어디 있을까. - P17

어떤 말은 듣는 순간 영원히 잊히지 않으리라는 걸 알게 한다. 내게는 엄마의 그 말이 그랬다. 엄마는 내게 전화를 해서 나의 이혼으로 엄마가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얼마나 괴롭고 우울한지 호소했다. 심지어 내 전남편에게 연락해서 그의 행복을 빌어주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엄마의 눈에는 나의 고통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 P18

남자가 바람 한 번 피웠다고 이혼이라니 말도 안 된다. 김서방이 받을 상처를 생각해라. 마음을 넓게 먹어야지. 사람들 다 그러고 살아.‘ 이혼을 결심한 내게 아빠가 한 말이었다. 나보다 사위의 입장을 먼저 고려하는 아빠의 모습은 별로 놀라운 게 아니었다. 아빠가 내 편이 되어주리라는 기대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 P19

할머니에게 나는 손녀라기보다는 대하기 어려운 삼십대 초반의 여자로 보였을 것이다. 귀여워하고 예뻐하고 역성들어줄 손녀라기보다는 사이 안 좋은 딸의 나이든 자식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나는 우리 사이의 난감함, 어색함, 어려움이 나쁘지 않았고 그런 감정들의 바닥에 깔린 엷디엷은 우애가 신기했다. - P23

"맛있네."
할머니는 그렇게 말하고 웃었는데 진분홍빛 립스틱을 칠한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드라이를 했는지 짧은 머리카락에 볼륨이 살아 있었다. 할머니가 내게 잘 보이려고 신경을 썼다는 것이 느껴져서 놀라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박대의 살을 발라내어 할머니의 밥 위에 올려놓았다. 반건조된 살은 쫄깃했고 기름에 튀겨지듯 구워진 껍질도 고소했다. 예의를 차려서 조금씩 먹으려고 했는데 입맛이 돌아서 정신없이 먹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기분좋은 포만감이었을까. 그렇게 먹다보니 할머니와 별로 말도 나누지 못하고 밥 한 공기를 금방 다 먹어 버렸다.
"밥은 같이 먹어야 맛이야."
할머니의 말에 별로 동의하지는 않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밥은 어떤 사람과 먹느냐에 따라서 맛이 다 다르니까. 혼자 넷플릭스를 보며 밥을 먹는 게 훨씬 더 편한 적이 많았다. 그렇지만 할머니의 밥은 맛이 있었다. 할머니와 함께 먹는 밥은 맛이 있었다. - P27

"어떤 분이셨어요?"
"누구? 우리 엄마?"
"네."
할머니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말고, 다시 말을 하려다가 입을 열지 않았다. 얼굴에 내내 어렸던 미소가 사라졌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보였다.
"그냥······" 할머니가 그렇게 말하고 나를 바라봤다. "보고 싶지."
할머니는 내가 마치 할머니의 엄마라도 되는 것처럼 한참을 바라보다 입가에 힘을 줘서 웃었다.
"보고 싶은 사람이지 뭐."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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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나저러나 그들에겐 넘치는 게 시간이었다. 파트릭은 9시 30분이나 되어야 일을 시작했고, 인근 학교가 방학에 들어가 카페 안은 텅 비다시피 했다. 손님이라고 해 봐야 늘 오는 사람들, 그러니까 이발사, 파트릭 카사티, 나뮈르가 전부였다. 상이용사들을 위한 관사에 사는 뚱뚱한 사내 나뮈르는 늘 구석 자리에서 강아지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신문을 읽었다. 동네에 바보들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으나, 카페마다 단골 폐인들이 있었다. 반주정뱅이에 반장애인 특수 직업 훈련 대상자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문 닫는 시간까지 카페에 죽치고 앉아 술잔을 홀짝거렸다. - P327

처음에 파트릭은 도무지 해내지 못할 것 같았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었다. 그에게 술이란 필요하네 아니네를 떠나 신체의 일부나 마찬가지였다.
[…]
그렇지만 알코올 없는 인생의 문제는 사실 그런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권태. 느림과 사람들.
파트릭은 이십 년간 지속된 잠에서 깨어난 셈이었다. 그 동안 그는 우정, 이런저런 관심사, 정치적 견해, 각종 사회생활, 자기애와 권위, 수많은 일들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마침내 증오에 이르는 꿈을 꾸었다. 그런데 실상은 삶의 3분의 2를 취해 있었다. 맨정신일 때 그에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모든 것을, 삶 전체를 다시 알아가야만 했다. 그 즉시 사람들의 특징 하나하나가 그의 눈을 불사르는 것 같았고 그 무거움, 인간의 성질, 우리를 밑바닥까지 가라앉게 만드는 인간의 오욕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관계로 인한 익사. 타인의 진실에서 살아 남기. 근본적인 어려움은 이것이었다. - P328

그래서 초창기엔 집에 틀어박혀 지냈다. 아내와 헤어진 뒤 부랴사랴 손바닥만 한 원룸을 구했다. 정식으로 이혼 판결이 나면 제대로 된 집을 구하겠노라 계획했지만, 일 년 육 개월이 넘도록 파트릭은 여전히 같은 집에 살았다. 날이면 날마다 버거운 짐승처럼 느리고 투미하게 목적도 없이 힘만 충만해서 어슬렁거렸다. 이따금 욕실 거울 앞에 서서 두 손 듬뿍 뱃살을 쥐어 보았다. 지긋지긋한 마음에 모두를 향해, 삶에 치러야 하는 대가에 대해, 한심한 짓만 벌이고 다니는 앙토니를 향해, 천하에 몹쓸 전부인을 향해, 수많은 다른 모든 것을 향해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개천에 떠내려가 버린 청춘, 그 엄청난 낭비에 대해 유독 곱씹었다. - P329

호출기와 전화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갈수록 냉각되었다. 수백 년 동안 지속되어 온 연대 의식은 경쟁력이라는 말 속에 희석되었으며, 여기저기에 염치없고 보수도 변변치 않으면서 내내 굽신거려야 하는, 새로울지 몰라도 보람은 찾기 힘든 일거리들이 생겨나 옛날에 서로 공유하던 고된 노동의 자리를 치고 들어왔다. 생산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이제 사람들은 관계, 서비스 품질, 커뮤니케이션 전략, 고객 만족에 대해 이야기했다. 모든 것이 작아지고 소외되었으며 불확실해졌다. 파트릭은 동료가 없는 이 세계를, 행동부터 말까지, 육체부터 영혼까지 지배하던 규율이 없는 이 세계를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세상은 우리가 언제라도 일할 수 있는 상태인지, 돈이 될 만한 노동력을 가졌는지 따위는 기대하지 않았다. 앞으로는 이것을 믿어야 했다.
한 가지 생각이 곳곳으로 전달되고 헛바퀴를 돌다가 높은 데서 하달되어 검증받였다고 간주되는 어휘를 사용해야 했는데, 놀랍게도 그 어휘는 우리의 저항을 불법으로 만드는, 스스로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우리의 노력을 방어 불가능하게 만드는 효과를 창출했다. 그리하여 헬멧을 써야만 했다. - P338

이런 세상에서 블루칼라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블루칼라는 유행 지난 서사시였다. 사람들은 협상을 요구하는 그들의 노동조합을 한껏 비웃었다. 가엾은 노동자가 자기 처지가 덜 초라해질까 싶어 합당한 권리를 요구하면 어김없이 그의 욕망이 얼마나 비이성적인지를 증명하는 뻔한 대답만 돌아왔다. 먹거리를 해결하고 남들이 다 하듯 여유를 누리고 싶어하는 것만으로도 진보의 행진을 방해하는 위험 인물로 낙인찍혔다. 그의 소위 이기주의는 이해받을 수 있었다. 다만 그가 세계 정세를 파악하지 못할 뿐이었다. 그가 원하는 만큼 월급을 올려 주려면 그의 직장은 루마니아 부쿠레슈티로 이전해야 할 것이다. 개미처럼 일하고 애국심마저 넘치는 중국인들이 그의 자리를 꿰찰 것이다. 그는 이런 새로운 변화와 제재에 대해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 P339

아버지가 낡은 슬리퍼를 신고 수화기를 손에 든 채 어리바리하게 서 있었다. 그래, 그래. 그렇구나. 앙토니에겐 익숙한 자세였으나 아버지의 머리숱이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어두운 복도에 우두커니 선 아버지는 늙고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배가 튀어나왔는데도 말라 보였다. 그때부터 아버지의 입에서 그의 생각, 노인네의 내면생활, 쓰라린 감정, 놀라움 같은 예전에는 포착할 수 없었던 말들이 툭툭 튀어 나왔다. 균열이 시작되었다. - P345

어쨌거나 전력을 다해 공부하면서 머릿속에 지름길, 서프라이즈, 번뜩이는 생각이 하나하나 생겨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스테파니는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들을 심심풀이나 시간 때우기쯤으로 여겨 왔다. 그런데 꾸역꾸역 지식을 욱여넣다 보니, 사물에 대한 관점이 바뀌어 갔다. 이 혁명적인 변화를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 스테파니는 아직 잘 알지 못했다. 확신이 들 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때로 강요된 것들 아래로 덧없는 생각이 유레카처럼 머리를 가로질렀다. 아니면 그와 정반대로 명증한 감각이 눈앞에서 끝나 버릴 때도 있었다. 세상이 그렇게 조각나고 가지가 제멋대로 뻗어 나가 끝을 알 수 없었다.
점차 스테파니는 공부를 즐기게 되었다. - P388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두 소녀는 은밀한 사생활에 대해 서로 털어놓고 들어 주는 사이였다. 둘 중 한 사람이 데이트를 하고 나면 꼬치꼬치 심문하고 브리핑했으며, 방광염이나 성병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정보도 아낌없이 주고 받았다. 급격히 달라지는 여학생의 신체 메커니즘은 두 사람이 감당하기엔 너무 버거웠다. 부인과에 관련된 내밀한 비밀은 점점 다른 모든 분야까지 뻗어 나가서 그들은 자신이 보낸 밤에 대해 논평하고 함께했던 남자들에 대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해부하는 데 열과 성을 다했다. 남자애들은 여자애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다. 여자들이란 자신들에 비해 극혐이다, 돈을 많이 밝힌다, 피도 눈물도 없다, 특히 끝을 모를 만큼 명확한 구조를 타고 났다······. 하지만 틀린 얘기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녀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에게 해부학적으로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다. 서로의 외모를 끝없이 탐색하고, 잡지에 실린 사진들과 자기 모습을 비교하며 촘촘한 모공을 뽐내고, 피둥피둥 살이 찌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 나이의 소녀들이었다. - P418

하신은 별수 없이 의자에 앉아 콜라를 주문했다. 저 아래 나라에서 태어나 순수한 생각들을 마음 가득 품고 프랑스까지 와서 짐승처럼 일하다가 구석에 처박힌 남자들 틈에 있는 것이 무척 불편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절대 입에 올리는 법이 없었지만 그건 꽤나 날카로운 가시였다. 그들은 모두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 속에 성장했다. 아버지들은 농담을 몰랐고, 아이들은 아버지 말을 안 들었다. 프랑스어를 잘 못해서 프랑스의 현실적인 규칙들을 대부분 이해하지 못하고 지나쳤다. 그들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는 계율들을 읊으며 살아갔고, 그 아들들은 의무적으로 주어진 존중과 자기도 모르게 자라난 멸시 사이에서 성장했다. - P428

가난에서 벗어나길 원했던 아버지들은 과연 꿈을 이루었을까? 집에 컬러 TV를 들여놓았고 자동차를 샀으며 살 집을 찾았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냈다. 하지만 그런 물질적인 것, 만족감, 지금까지 이룬 것들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자신이 성공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생활이 아무리 안락해도 처음에 온몸으로 겪은 가난의 흔적을 지우기엔 역부족인 듯했다. 그것은 어디서 올까? 직장에서 경험한 분노, 사회적으로 미천하게 간주되는 일들, 소외, ‘이민자‘라는 한마디로 모든 것이 정리되지 않을까? 아니면 아무도 자발적으로 인정하려 들지 않는 무국적자 신세? 왜냐하면 이 아버지들은 두 개의 언어, 두 개의 강, 박봉, 존중받지 못하는 처지, 자녀들에게 물려줄 변변한 유산 하나 없는 뿌리 뽑힌 사람들이라는 균열 사이에 간신히 그리고 여전히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운명은 자녀들에게 치유할 수 없는 원통함과 경멸을 물려주었다. 그리하여 자녀들은 학교에서 공부 잘하고, 성공하고, 커리어를 쌓고, 원칙을 지키며 살아가는 일을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들 가족을 사회 현상 중 하나로 여기는 이 나라에서는 선의로 하는 최소한의 동작마저 일종의 협잡으로 보였다. - P429

여전히 몸을 반으로 접고 무릎을 꿇고 앉은 하신은 이제 한쪽 콧구멍으로만 숨을 쉬었고, 그래서 마치 보일러 배관처럼 다급하게 식식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치아 조각들이 혓바닥을 찌르자 하신은 다시 한번 침을 뱉었다. 그러면서 하신은 비로소 타일 바닥의 무늬를 눈여겨보았다. 흰색과 갈색으로 된 작은 타일은 우연한 배치가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고리와 소용돌이가 풍성한 꽃 무덤처럼 연결된 무늬는 고귀한 사람의 모습을 이루었다. 고통이 점점 타고 올라올수록 하신은 자신보다 훨씬 앞서 섬세한 모양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사람들의 발자국과 소변을 온몸으로 받기 위해 한 조각 한 조각 모여 여기 이렇게 무릎을 꿇고 앉은 타일 속 사람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 P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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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빈 잔을 돌려준 뒤 전찻길을 건넌다. 공원의 모래가 발밑에 밟히며 얼어붙은 눈처럼 저벅거린다. 나뭇가지들 사이에서 참새들과 꾀꼬리들이 목청을 돋워 노래한다. 유모차 몇 대가 보인다. 젊은 엄마들이 햇살 가득한 벤치에 앉아 머리를 젖혀 얼굴에 따스한 햇볕을 쪼인다. 나는 벌거숭이 아이들이 물놀이를 하는 타원형 풀 앞에 한참 동안 머물러 있다. 아이들의 배에 난 팬티 고무줄 자국에 마음이 동해서······ 갈리시아의 경건과 유대 인들은 밝고 선명한 색깔의 허리띠를 착용해 자신들의 몸이 둘로 뚜렷이 구분되게 했다지. 심장과 폐와 간과 머리는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고, 그 밖의 장과 성기는 그저 감내해야 하는 대수롭지 않은 부분이었다······ - P123

우리는 만신창이가 된 다음에야 최상의 자신을 찾을 수 있다. - P127

나는 ‘부베니체크‘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맥주 한 잔을 시킨 뒤 멍하니 앉아 있다······ 2톤의 책이 잠든 내 머리를 위협하며 호시탐탐 나를 덮치려고 한다. 스스로 걸어놓은 다모클레스의 검이다. 나는 형편없는 성적표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이다. 술잔 안의 거품이 도깨비불처럼 표면 위로 떠오른다. - P127

태어나는 건 나오는 것이고 죽는 건 들어가는 것이라고 노자가 말한 이유는 뭘까? - P129

압축기가 악사의 손에 들린 아코디언처럼 몸을 비튼다. 나는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복제화 한 점을 내 상자에서 꺼내놓고, 성화들의 둥지 속에 숨어 있는 책들을 추려 마침내 한 페이지를 고른다. 프로이센 여왕 조피 샤를로테가 시녀에게 말하는 부분이다. "울지 말거라. 네 궁금증을 풀어주려고, 이제 나는 라이프니츠조차 가르쳐줄 수 없었던 그걸 보러 갈 테니까. 존재와 무의 극한까지 갈 것이다······" - P130

한 손에 들린 나의 노발리스를 꽉 쥔다. 내가 좋아하는 글귀에 손가락이 올라가고, 입술엔 지복의 미소가 떠오른다. 나는 만차와 그녀의 천사를 닮기 시작했으니까······ 이제 완전한 미지의 세계로 진입한다. 책을, 책장을, 쥐고 있다······ 사랑받는 대상은 모두 지상의 천국 한복판에 있다, 라고 쓰여 있다······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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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천사가 그녀 앞에 나타났었고, 그 천사의 조언대로 그녀는 한 토목공을 유혹 했노라고. 그리고 가진 돈을 털어 전원에 땅을 샀는데, 토목공이 그녀와 함께 텐트에서 밤을 보내며 낮에는 이 땅에 집을 지을 기초공사를 했다고. 하지만 그녀는 이 토목공을 차버리고 석수와 살았고, 이 석수 역시 텐트 아래서 그녀와 사랑을 나누며 사방 벽을 쌓았다고. 뒤이어 그녀는 목수와 살았는데, 그는 이미 그녀의 방과 침대를 함께 썼다고. 그다음은 배관공이자 아연공인 남자의 차례였는데 해당 작업이 마무리되자마자 이 남자 역시 차버렸고, 그다음으로 함께 살게 된 기와공이 시멘트 기와지붕을 올려주었다고. 그다음엔 화가가 그녀와 밤을 함께하며 천장과 벽에 칠을 하고 집 정면에 초벽을 발라주었고, 마지막엔 소목장이가 그녀에게 가구를 만들어주었다고. 그렇게 만차는 사랑과 온전한 의지로 자신의 집을 가졌고, 노예술가까지 덤으로 얻게 된 것이었다. 정신적인 열정으로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 신의 작업을 이어가며 그녀를 천사의 모습에 담아 조각하는 남자였다. 우리는 이렇게 만차의 삶을 한 바퀴 돌아본 뒤 정원으로 되돌아왔다. - P102

만차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상도 하 지 않았던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 평생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멀리까지 간 사람이 만차였다. 책들에 둘러싸인 나는 책에서 쉴새없이 표징을 구했으나 하늘로부터 단 한 줄의 메시지도 받지 못한 채 오히려 책들이 단합해 내게 맞섰는데 말이다. 반면 책을 혐오한 만차는 영원토록 그녀에게 예정된 운명대로 글쓰기에 영감을 불어넣는 여인이 되어 있었고, 심지어 돌로 된 날개를 퍼덕이며 비상했다. 깊은 밤 환히 불밝혀진 왕성의 두 창문처럼 부드러운 빛을 발하는 날개였다. 리본과 장식 줄, 황금산 산등성이에 자리한 레너 호텔 앞에서 그녀가 신고 있던 스키를 장식한 똥, 그 모든 사연이 담긴 우리의 러브 스토리를 그 날개는 멀리멀리 사라지게 만들었다. - P104

소장은 나더러 마당에 나가 비질을 하라고 했다. 일손이 필요한 곳에 가서 거들든지, 그것도 내키지 않으면 아무 일 안 해도 좋다고. 다음 주면 나도 그곳을 떠나 멜란트리흐 인쇄소 지하실에서 백지를 꾸리도록 되어 있다고.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삼십오 년을 잉크와 얼룩 속에서 일해온 내가, 더럽고 냄새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선물과도 같은 멋진 책 한 권을 찾아낼지 모른다는 희망으로 매 순간을 살아온 내가, 이제 비인간적인 백색 꾸러미들을 만들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다니! 이런 통고를 받자 나는 평정심을 잃고 벌렁 나자빠졌다. 흐느적대는 꼭두각시처럼 계단 맨 아랫단에 주저앉았다. 소장의 통고에 마음이 몹시 갑갑해졌고, 입가에는 실성한 미소가 떠올라 사라질 줄 몰랐다. - P106

난데없이 철학 교수가 곁에 와 섰다. 그가 낀 안경알이 두 개의 유리 재떨이처럼 햇빛에 반짝였다. 그는 늘 들고 다니는 가방을 손에 든 채 얼빠진 사람처럼 내 앞에 남아 있었다. "젊은이는 잘 있나요?" 내가 모자를 쓰고 있을 때면 그가 어김 없이 하는 질문이었다. 나는 잠시 생각해본 뒤, 젊은이는 없다고 대답했다. "이런, 그래도 아픈 건 아니겠죠?" 그가 놀란 표정으로 받았다. "네, 아픈 건 아니죠." 내가 모자를 벗으며 말했다. "아픈 건 아닙니다. 그래도 솔직히 말씀드려야겠군요. 이젠 끝장입니다. 루테의 기사도, 엥겔뮐러의 비평도 말이죠." 교수는 깜짝 놀라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으로 나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당신이 그 영감이고 그 젊은이군!" 나는 모자를 다시 눈 위까지 당겨 쓴 뒤 가시 돋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국내 정치』 지난 호도, 『국가 소식』도 끝장입니다. 그 사람들이 나를 지하실에서 내쫓았어요. 아시겠어요?" - P112

나는 이웃집까지, 지난 삼십 오 년간 뼈빠지게 일해온 작업장 입구까지 걸어 갔다. 곁에서 교수가 겅중겅중 걸어오며 내 옷소매를 잡아당겨 손안에 10코루나짜리 지폐를 밀어 넣더니 다시 5코루나짜리 지폐를 쥐여주었다. 그 지폐를 내려다보며 나는 서글프게 물었다. "더 잘 찾아보라고요?" 그는 내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두꺼운 안경알 너머로 말처럼 휘둥그레진 눈을 뜨고 안경을 만지작거리면서 말을 더듬었다. "그렇소. 더 잘 찾아보라고······"
"찾으라니." 내가 받았다. "대체 무얼 말이죠?" 그러자 그는 알아듣기 힘든 소리로 중얼거렸다.
"또다른 기회를, 다른 데서." 그는 몸을 숙여 인사한 뒤 뒷걸음치며 돌아서서 불행의 본거지를 막 벗어난 사람처럼 사라져갔다. - P112

카페 ‘검은 양조장‘ 카운터에 기대앉아 나는 맥주 한 잔을 마신다. 이봐, 오늘부터 넌 혼자야. 홀로 세상에 맞서야 해. 마음이 안 내키더라도 사람들을 보러 나가 즐기고 연기를 해야 할 거야. 이 땅에 발붙이고 있는 동안은 말이야. 오늘부터는 수심에 찬 원들만 소용돌이치는군······ 전진이 곧 후퇴인 셈이지. 그래, 프로그레스 아드 오리기넴과 레그레수스 아드 푸투룸은 같은 말이야. 너의 뇌는 압축기에 짓이겨진 한 꾸러미의 사고에 불과하지. - P119

하지만 나는 한 발짝도 떼지 않고 조용히 눈을 감는다. 그렇다, 난 아무데도 가지 않을 것이다. 계속 술을 마신다. 참담했던 그 보라색 양말 사건이 있고 이십 년이 지난 뒤 스테틴의 변두리 동네와 벼룩시장이 열린 골목길을 성큼성큼 걷고 있는 내 모습이 다시 보인다. 맨 끝자리에 앉은 초라한 행상인의 좌판에 오른쪽 샌들과 보라색 양말 한 짝이 놓여 있다. 틀림없는 내 샌들, 내 양말이었다. 발 치수도 41, 내 치수였다······ 나는 깜짝 놀라서, 불가사의한 출현을 목격한 사람처럼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 고물상은 세상 어딘가에 발 치수가 41인 외다리 남자가 존재할 거라 믿었을 뿐 아니라, 이 남자가 멋을 내려고 스테틴까지 와서 오른발에 신을 샌들과 보라색 양말 한 짝을 살 거라 믿었던 것이다! 그 놀라운 장사꾼 옆에서 한 노파가 월계수 잎 두 장을 손에 들고 사라고 졸라댔다. 나는 망연자실했다.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내 샌들과 보라색 양말이 세상의 수많은 고장을 보고 난 뒤 어느 날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질책하듯 내 길을 막아서며. -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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