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나저러나 그들에겐 넘치는 게 시간이었다. 파트릭은 9시 30분이나 되어야 일을 시작했고, 인근 학교가 방학에 들어가 카페 안은 텅 비다시피 했다. 손님이라고 해 봐야 늘 오는 사람들, 그러니까 이발사, 파트릭 카사티, 나뮈르가 전부였다. 상이용사들을 위한 관사에 사는 뚱뚱한 사내 나뮈르는 늘 구석 자리에서 강아지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신문을 읽었다. 동네에 바보들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으나, 카페마다 단골 폐인들이 있었다. 반주정뱅이에 반장애인 특수 직업 훈련 대상자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문 닫는 시간까지 카페에 죽치고 앉아 술잔을 홀짝거렸다. - P327
처음에 파트릭은 도무지 해내지 못할 것 같았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었다. 그에게 술이란 필요하네 아니네를 떠나 신체의 일부나 마찬가지였다. […] 그렇지만 알코올 없는 인생의 문제는 사실 그런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권태. 느림과 사람들. 파트릭은 이십 년간 지속된 잠에서 깨어난 셈이었다. 그 동안 그는 우정, 이런저런 관심사, 정치적 견해, 각종 사회생활, 자기애와 권위, 수많은 일들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마침내 증오에 이르는 꿈을 꾸었다. 그런데 실상은 삶의 3분의 2를 취해 있었다. 맨정신일 때 그에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모든 것을, 삶 전체를 다시 알아가야만 했다. 그 즉시 사람들의 특징 하나하나가 그의 눈을 불사르는 것 같았고 그 무거움, 인간의 성질, 우리를 밑바닥까지 가라앉게 만드는 인간의 오욕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관계로 인한 익사. 타인의 진실에서 살아 남기. 근본적인 어려움은 이것이었다. - P328
그래서 초창기엔 집에 틀어박혀 지냈다. 아내와 헤어진 뒤 부랴사랴 손바닥만 한 원룸을 구했다. 정식으로 이혼 판결이 나면 제대로 된 집을 구하겠노라 계획했지만, 일 년 육 개월이 넘도록 파트릭은 여전히 같은 집에 살았다. 날이면 날마다 버거운 짐승처럼 느리고 투미하게 목적도 없이 힘만 충만해서 어슬렁거렸다. 이따금 욕실 거울 앞에 서서 두 손 듬뿍 뱃살을 쥐어 보았다. 지긋지긋한 마음에 모두를 향해, 삶에 치러야 하는 대가에 대해, 한심한 짓만 벌이고 다니는 앙토니를 향해, 천하에 몹쓸 전부인을 향해, 수많은 다른 모든 것을 향해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개천에 떠내려가 버린 청춘, 그 엄청난 낭비에 대해 유독 곱씹었다. - P329
호출기와 전화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갈수록 냉각되었다. 수백 년 동안 지속되어 온 연대 의식은 경쟁력이라는 말 속에 희석되었으며, 여기저기에 염치없고 보수도 변변치 않으면서 내내 굽신거려야 하는, 새로울지 몰라도 보람은 찾기 힘든 일거리들이 생겨나 옛날에 서로 공유하던 고된 노동의 자리를 치고 들어왔다. 생산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이제 사람들은 관계, 서비스 품질, 커뮤니케이션 전략, 고객 만족에 대해 이야기했다. 모든 것이 작아지고 소외되었으며 불확실해졌다. 파트릭은 동료가 없는 이 세계를, 행동부터 말까지, 육체부터 영혼까지 지배하던 규율이 없는 이 세계를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세상은 우리가 언제라도 일할 수 있는 상태인지, 돈이 될 만한 노동력을 가졌는지 따위는 기대하지 않았다. 앞으로는 이것을 믿어야 했다. 한 가지 생각이 곳곳으로 전달되고 헛바퀴를 돌다가 높은 데서 하달되어 검증받였다고 간주되는 어휘를 사용해야 했는데, 놀랍게도 그 어휘는 우리의 저항을 불법으로 만드는, 스스로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우리의 노력을 방어 불가능하게 만드는 효과를 창출했다. 그리하여 헬멧을 써야만 했다. - P338
이런 세상에서 블루칼라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블루칼라는 유행 지난 서사시였다. 사람들은 협상을 요구하는 그들의 노동조합을 한껏 비웃었다. 가엾은 노동자가 자기 처지가 덜 초라해질까 싶어 합당한 권리를 요구하면 어김없이 그의 욕망이 얼마나 비이성적인지를 증명하는 뻔한 대답만 돌아왔다. 먹거리를 해결하고 남들이 다 하듯 여유를 누리고 싶어하는 것만으로도 진보의 행진을 방해하는 위험 인물로 낙인찍혔다. 그의 소위 이기주의는 이해받을 수 있었다. 다만 그가 세계 정세를 파악하지 못할 뿐이었다. 그가 원하는 만큼 월급을 올려 주려면 그의 직장은 루마니아 부쿠레슈티로 이전해야 할 것이다. 개미처럼 일하고 애국심마저 넘치는 중국인들이 그의 자리를 꿰찰 것이다. 그는 이런 새로운 변화와 제재에 대해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 P339
아버지가 낡은 슬리퍼를 신고 수화기를 손에 든 채 어리바리하게 서 있었다. 그래, 그래. 그렇구나. 앙토니에겐 익숙한 자세였으나 아버지의 머리숱이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어두운 복도에 우두커니 선 아버지는 늙고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배가 튀어나왔는데도 말라 보였다. 그때부터 아버지의 입에서 그의 생각, 노인네의 내면생활, 쓰라린 감정, 놀라움 같은 예전에는 포착할 수 없었던 말들이 툭툭 튀어 나왔다. 균열이 시작되었다. - P345
어쨌거나 전력을 다해 공부하면서 머릿속에 지름길, 서프라이즈, 번뜩이는 생각이 하나하나 생겨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스테파니는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들을 심심풀이나 시간 때우기쯤으로 여겨 왔다. 그런데 꾸역꾸역 지식을 욱여넣다 보니, 사물에 대한 관점이 바뀌어 갔다. 이 혁명적인 변화를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 스테파니는 아직 잘 알지 못했다. 확신이 들 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때로 강요된 것들 아래로 덧없는 생각이 유레카처럼 머리를 가로질렀다. 아니면 그와 정반대로 명증한 감각이 눈앞에서 끝나 버릴 때도 있었다. 세상이 그렇게 조각나고 가지가 제멋대로 뻗어 나가 끝을 알 수 없었다. 점차 스테파니는 공부를 즐기게 되었다. - P388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두 소녀는 은밀한 사생활에 대해 서로 털어놓고 들어 주는 사이였다. 둘 중 한 사람이 데이트를 하고 나면 꼬치꼬치 심문하고 브리핑했으며, 방광염이나 성병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정보도 아낌없이 주고 받았다. 급격히 달라지는 여학생의 신체 메커니즘은 두 사람이 감당하기엔 너무 버거웠다. 부인과에 관련된 내밀한 비밀은 점점 다른 모든 분야까지 뻗어 나가서 그들은 자신이 보낸 밤에 대해 논평하고 함께했던 남자들에 대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해부하는 데 열과 성을 다했다. 남자애들은 여자애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다. 여자들이란 자신들에 비해 극혐이다, 돈을 많이 밝힌다, 피도 눈물도 없다, 특히 끝을 모를 만큼 명확한 구조를 타고 났다······. 하지만 틀린 얘기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녀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에게 해부학적으로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다. 서로의 외모를 끝없이 탐색하고, 잡지에 실린 사진들과 자기 모습을 비교하며 촘촘한 모공을 뽐내고, 피둥피둥 살이 찌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 나이의 소녀들이었다. - P418
하신은 별수 없이 의자에 앉아 콜라를 주문했다. 저 아래 나라에서 태어나 순수한 생각들을 마음 가득 품고 프랑스까지 와서 짐승처럼 일하다가 구석에 처박힌 남자들 틈에 있는 것이 무척 불편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절대 입에 올리는 법이 없었지만 그건 꽤나 날카로운 가시였다. 그들은 모두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 속에 성장했다. 아버지들은 농담을 몰랐고, 아이들은 아버지 말을 안 들었다. 프랑스어를 잘 못해서 프랑스의 현실적인 규칙들을 대부분 이해하지 못하고 지나쳤다. 그들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는 계율들을 읊으며 살아갔고, 그 아들들은 의무적으로 주어진 존중과 자기도 모르게 자라난 멸시 사이에서 성장했다. - P428
가난에서 벗어나길 원했던 아버지들은 과연 꿈을 이루었을까? 집에 컬러 TV를 들여놓았고 자동차를 샀으며 살 집을 찾았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냈다. 하지만 그런 물질적인 것, 만족감, 지금까지 이룬 것들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자신이 성공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생활이 아무리 안락해도 처음에 온몸으로 겪은 가난의 흔적을 지우기엔 역부족인 듯했다. 그것은 어디서 올까? 직장에서 경험한 분노, 사회적으로 미천하게 간주되는 일들, 소외, ‘이민자‘라는 한마디로 모든 것이 정리되지 않을까? 아니면 아무도 자발적으로 인정하려 들지 않는 무국적자 신세? 왜냐하면 이 아버지들은 두 개의 언어, 두 개의 강, 박봉, 존중받지 못하는 처지, 자녀들에게 물려줄 변변한 유산 하나 없는 뿌리 뽑힌 사람들이라는 균열 사이에 간신히 그리고 여전히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운명은 자녀들에게 치유할 수 없는 원통함과 경멸을 물려주었다. 그리하여 자녀들은 학교에서 공부 잘하고, 성공하고, 커리어를 쌓고, 원칙을 지키며 살아가는 일을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들 가족을 사회 현상 중 하나로 여기는 이 나라에서는 선의로 하는 최소한의 동작마저 일종의 협잡으로 보였다. - P429
여전히 몸을 반으로 접고 무릎을 꿇고 앉은 하신은 이제 한쪽 콧구멍으로만 숨을 쉬었고, 그래서 마치 보일러 배관처럼 다급하게 식식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치아 조각들이 혓바닥을 찌르자 하신은 다시 한번 침을 뱉었다. 그러면서 하신은 비로소 타일 바닥의 무늬를 눈여겨보았다. 흰색과 갈색으로 된 작은 타일은 우연한 배치가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고리와 소용돌이가 풍성한 꽃 무덤처럼 연결된 무늬는 고귀한 사람의 모습을 이루었다. 고통이 점점 타고 올라올수록 하신은 자신보다 훨씬 앞서 섬세한 모양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사람들의 발자국과 소변을 온몸으로 받기 위해 한 조각 한 조각 모여 여기 이렇게 무릎을 꿇고 앉은 타일 속 사람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 P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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