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삶은 마치 악보처럼 구성된다. 미적 감각에 의해 인도된 인간은 우연한 사건(베토벤의 음악, 역에서의 죽음)을 인생의 악보에 각인될 하나의 테마로 변형한다. 그리고 작곡가가 소나타의 테마를 다루듯 그것을 반복하고,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것이다. 안나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삶을 마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과 죽음의 테마, 사랑의 탄생과 결부되어 잊을 수 없는 이 테마가 그 음울한 아름다움으로 절망의 순간에 그녀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조차 무심결에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작곡한다. - P85
관능이란 감각을 최대한 동원하는 것이다. 상대방을 열정적으로 관찰하며 조그만 소리까지 듣는 상태다. 그러나 테레자의 비명은 감각을 마비시켜 보고 듣는 것을 차단하려 드는 것 같았다. 그녀 내면에서 악을 쓰는 것은, 모든 모순을 소거하고 영혼과 육체의 이원성도 소거하며 심지어 시간까지도 소거하기를 원하는 그녀 사랑의 순박한 이상주의였다. - P89
꿈들은 웅변적일 뿐 아니라 아름답기까지 하다. 프로이트가 그의 꿈에 대한 이론에서 놓쳤던 것이 바로 이런 측면이다. 꿈은 커뮤니케이션(암호화되긴 했지만)일 뿐 아니라 미학적 활동, 상상력의 유희이며, 이 유희는 그 자체가 하나의 가치다. 꿈은 상상하는 것, 없는 것을 희구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심층적인 욕구 중 하나라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다. 바로 그 점이 꿈속에 철면피한 위험이 은폐된 이유이기도 하다. 꿈이 아름답지 않다면 쉽게 잊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테레지는 쉴 새 없이 자신의 꿈으로 되돌아가며 꿈을 머릿속에서 되풀이하고 전설로 만들었다. 토마시는 테레자의 꿈이 지닌 처절한 아름다움의 최면적 매력 속에서 살았다. - P96
현기증이란 무엇인가? 추락에 대한 뒤려움? 하지만 튼튼한 난간을 갖춘 전망대에서 우리는 왜 현기증을 느끼는 것일까? 현기증, 그것은 추락에 대한 두려움과는 다른 그 무엇이다. 현기증은 우리 발밑에서 우리를 유혹하고 홀리는 공허의 목소리, 나중에는 공포에 질린 나머지 아무리 자제해도 어쩔 수 없이 끌리는 추락에 대한 욕망이다. - P98
그녀는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짓을 저지르고 싶었다. 지나간 칠 년을 단번에 지워 버리고 싶었다. 그것은 현기증이었다. 머리를 어지럽히는, 극복할 수 없는 추락 욕구. 현기증을 느낀다는 것은 자신의 허약함에 도취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의 허약함을 의식하고 그에 저항하기보다는 투항하고 싶은 것이다. 자신의 허약함에 취해 더욱 허약 해지고 싶어 하며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백주 대로에 쓰러지고 땅바닥에, 땅바닥보다 더 낮게 가라앉고 싶은 것이다.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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