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으면 잊힐 것이고 눈을 감으면 잊힐 것이고 말을 하지 않으면 잊힐 것이고 시인하지 않으면 잊힐 것이고 죄처럼 말을 하면 그것들은 다 용서되어 잊힐 것이고 그리고 다 잊힐 것이다. - P26

목격해보지 않은 민족은, 이와 같은 억압으로 지배받아보지 않은 민족, 그들은 알지 못한다.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 특수 용어들: 원수, 악랄, 정복, 배신, 침략, 파괴. 그것들은 다만 한 적대 국가가 다른 나라의 인간성을 말살시켰다는 명백하고도 어김없는 기록, 즉 역사적 기록에 대한 커다란 지각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이것은 실로 실체적이 못 된다. 살과 뼈로 된, 골수까지, 각인된. 개입이 필요한 그 지점까지, 이 경험을, 이 결과를, 표현을, 새로 발명하는 한이 있더라도, 계속하기를 그치지 않는 그것과는 다르다. - P42

어머니, 당신은 아직도 어린아이입니다. 열여덟 살 난. 당신은 늘 아프기 때문에 더욱더 어린아이입니다. 당신은 고된 일상생활로부터 보호받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다른 사람들처럼 강제로 주어진 언어를 말합니다. 그것은 당신의 언어가 아닙니다. 비록 당신의 언어가 아닐지라도 당신은 그 언어로 말해야만 한다는 것을 압니다. 당신은 이중 언어 사용자입니다. 당신은 삼중 언어 사용자입니다. 금지된 언어는 바로 당신의 모국어입니다. 당신은 어둠 속에서 말합니다. 비밀 속에서. 바로 당신의 언어를 말입니다. 당신 자신의 언어. 당신은 아주 부드럽게, 속삭여 말합니다. 어둠 속에서, 비밀스럽게. 모국어는 당신의 안식처입니다. 당신의 고향입니다. 당신의 존재 그 자체 입니다. 진정으로. 말한다는 것은 당신을 슬프게 합니다. 그리움. - P55

당신은 똑같이 한 조그만 분자입니다. 당신은 떠나갔다가 다시 돌아옵니다. 오랫동안 비워놓았던 껍데기로. 그 공간을, 요구하기 위하여 되찾기 위하여.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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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을까. 갈등과 암투만을 먹고 사는 인간이. 새끼 오리 친구들에게 전화를 못하게 된 후로 나는 술 먹고 자주 다쳤다. 낯선 고립감이 이리저리 쏠리면서 신체의 균형을 망가뜨리는 것 같았다. 술에서 깨고 나면 어딘가 욱신거렸고 팔꿈치나 무릎에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어렸을 때의 다친 마음이 뒤늦게 몸으로 드러나는 것 같았다. - P16

삼십 년 전, 너는 왜 연극이 하고 싶어. 내가 물었을 때 정원은, 나는 왜든 연극이 하고 싶어, 라고 말했다. 어쩌면 나는 사슴벌레식 문답에 대해 심오한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말하는 사슴벌레의 대답이 나는 상대에게 구구절절한 과정이나 절차를 해명하지 않아도 되는 의젓한 방어의 멘트인 줄 알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그 문답 속에는 내가 읽어내지 못한 무서운 뉘앙스가 숨어 있었던 것 같다. - P28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대답하는 사슴벌레의 말 속에는, 들어오면 들어오는 거지, 어디로든 들어왔다, 어쩔래? 하는 식의 무서운 강요와 칼같은 차단이 숨어 있었다. 어떤 필연이든, 아무리 가슴 아픈 필연이라 할지라도 가차없이 직면하고 수용하게 만드는 잔인한 간명이 ‘든‘이라는 한 글자 속에 쐐기처럼 박혀 있었다. - P29

그날 새벽 경애는 강변을 걸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안개처럼 막막한 두려움에 휩싸여 얼마나 깊고 집요한 자책을 했을까. 자신이 저질렀을지도 모를 실수나 과오를 하나하나 되짚으며 그걸 만회하기 위해 얼마나 무거운 짐과 기나긴 고통을 감당해야 한다고 결심했을까. - P30

나는 주문을 외우듯 다시 사슴벌레식 문답으로 돌아간다.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대답하는 사슴벌레의 말은 의젓한 방어의 멘트도 아니고, 어디로든 들어왔다 어쩔래 하고 윽박지르는 강요도 아닐 수 있다. 그것은 어쩌면 감당하기 힘든 두려움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어디로든 들어는 왔는데 어디로 들어 왔는지 특정할 수가 없고 그래서 빠져나갈 길도 없다는 막막한 절망의 표현인지도. - P37

어떻게든 미안하지가 않다는 말은 미안할 방법이 없다는, 돌이킬 도리가 없다는 말일 수도 있다. 우리가 지나온 행로 속에 존재했던 불가해한 구멍, 그 뼈아픈 결락에 대한 무지와 무력감의 표현일 수도 있다. - P37

정원과 내가 삼십 년 전에 쳐놓은 괄호 밖으로 사슴벌레의 무시무시한 경련이 튀어나오는 듯한 환상이 나를 사로잡는다. 누군가 뒤집힌 채 버둥거리고 미친듯이 빙빙 돌며, 절대 과오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듯 무서운 속도로 어딘가를 향해 막무가내로 움직여가고 있다. 누구니······ 넌······ 혹시······ - P38

제발 잘 살라는 부영의 마지막 말이 제발 잘 좀 살아달라고, 더 천하지는 말고, 그런 말로 읽혔다. 이제 부영과도 완전히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며 내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묻다, 내가 어쩌다든 이 지경이 되었다고, 아니 애초부터 이 지경이었다고, 삼십 년이 넘고 사십 년이 되어도 나는 여전히 비틀린 내시와 상궁의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나는 진즉에 내가 그런 인간인 줄 다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언제까지 질질 끌래, 부영이 묻고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직시하지 않는 자는 과녁을 놓치는 벌을 받는다. - P39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 채 나는 삼십 년 전의 그 여행을 오로지 즐거웠던 추억으로만 채색하려 애써왔다. 그러나 기차가 사라진 기차여행처럼, 나의 기억은 어둠 속에서 바라보는 터널 끝 원환처럼 비현실적으로 밝게 동동 떠 있다. 그렇게 내 기억은 이미 오래전 알지 못하는 어느 경로로 잘못 들어가 돌아나갈 길을 찾지 못하고 동그랗게 갇혀버렸는지도 모른다. 기억의 내용은 동일해도 그 뉘앙스는 바뀐 지 오래인데 말이다. 사슴벌레식 문답처럼. - P41

갇힌 기억 속의 내 옆에 쌍둥이처럼 갇힌 지금의 내가 웅크리고 있다. - P42

반희는 채운이 자신을 닮는 게 싫었다. 둘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닮음의 실이 이어져 있다면 그게 몇천 몇만 가닥이든 끊어내고 싶었다. 그래서 결국 둘 사이가 끊어진다 해도 반희는 채운이 자신과 다르게 살기를 바랐다. 그래서 너는 ‘너‘, 나는 ‘나‘여야 했다. - P50

우리 있잖아, 아빠랑 오빠도 이름 부를까? 병석씨, 명운씨 이렇 게.
그러자. 그래야 내가 흥분해도 감정의 거리가 생길 것 같네.
세상 모든 사람에게 공평해지는 게 좋지. - P53

근데 울면서 뛰어는 왔는데 내 앞에 딱 서더니 고개를 홱 돌리더라.
와, 기가 막혀. 채운이 걸음을 멈췄다. 나 화났다 이거지?
그렇지. 그러고도 이십 분은 날 똑바로 쳐다보지도 않더라.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기는 하는데 얼굴 보려고 하면 보여주지를 않아.
초3이나 된 게 그게 뭐하는 짓이야.
서운한 게 안 풀려서 그런 거지. 난 그때 채운씨 마음 알 것 같았어.
근데 나는 그때 반희씨 마음을 몰랐던 거네.
몰랐어야지. 채운씨가 그 나이에 그런 것까지 알았으면 내가 더 비참했지. - P65

공기는 차고 주위는 어두웠다. 가끔 들리는 새소리, 나뭇가지가 부딪치거나 꺾이는 소리, 휙 바람이 몰아치는 소리 외에는 완전무결한 적막이었다.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시간도 멈춘 것 같았다. 어느 순간 아주 먼 곳에서 오옹 오옹 하는 희미한 소리가 들려 왔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채운이 오는 소리 같았다.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반희는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나기라도 한 듯 가슴이 뛰었다. 숲의 적막 속에 앉아 있는 늙은 자신만큼이나 차를 몰고 산길을 올라오는 젊은 채운의 존재도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이 곧 만나게 되리라는 것도, 이 어두운 숲속에서 함께 밤을 보내게 되리라는 것도 믿을 수 없었다. 반희는 이 순간을 영원히 움켜쥐려는 듯 주먹을 꼭 쥐었고, 절대 잊을 수 없도록 스스로에게 일러주려는 듯 작게 소리 내어 말했다.
채운씨가 오고 있어. 채운씨가 와. - P68

엄마, 우리가 먹을 거 놓고 마음껏 싸우지도 못하게 된 건 뭐 땜에 그런 걸까?
음, 반희가 생각하다 말했다. 그것도 물고기랑 같은 이유겠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세상 뭐 다 이렇게 슬픈 얘기야, 젠장. 채운이 맥주를 벌컥 마시고 말했다. 나는 원래 생겨먹은 데서 얼마나 많이 바뀌었을까.
반희는 뭐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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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선이 얽히며 나무들이 몸을 드러낸다.
잎이 없으니 그려야 할 잔가지가 많다.
눈이, 손이 나뭇가지를 좇아간다.
나무 하나하나가 사람들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가지와 가지 사이가 하늘이다.
줄기와 줄기 사이로 길이 열린다.

밟을라 조심스런 발자국을 따라,
누웠던 풀잎들이 일어선다.
누군가는 쌓고 누군가는 무너뜨렸을
돌무더기가 나타난다.
가만히 손을 얹어 본다.
체온에 녹은 눈물이 흘러내린다.

"아무런 이유 없이 억울하게 죽은 것이 아니라
죽어서 아무런 이유가 없어져 버린 것이 억울한 것이다!"

누군가는 동백꽃에 죽음을 떠올린다지만
내게는 종낭꽃이 그렇다.
수의도 입지 못하고 떠나야 했던
하얀 죽음들을 주워 한데 모았다.

소복이 쌓인 꽃들을 쪼그려 앉아 그린다.
그린다는 것은 기억하겠다는 뜻이다.

숲이 말을 걸어 온다.
"죽는 것이 더 슬펐을까? 잊히는 것이 더 슬펐을까?"

숲에서 돌아서는 길, 누군가 나무에 매어 놓은 팻말이 눈에 박혔다.
"우리 아직 죽지 않았네. 우리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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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차가 콘크리트 경사로를 따라 미끄러져 내려가며 자동차 바퀴에 모래 밟히는 소리가 나자 휴이는 자신이 기억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휴이는 이걸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차로 바닷가를 지나가는 느낌, 모래 위를 구르는 바퀴의 부드러운 느낌,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줄지어 선 파도들. 식물이 무성하게 자란 정원을 둘러싼 돌담, 갈라진 길, 회색 등을 한 딱정벌레로 가득한 별채, 하얗게 페인트 칠한 벽 옆의 침대, 잔디밭과 바다를 내려다보는 창문이 갑자기 마음에 떠오른다. 휴이는 저 기억나요, 저 이제 기억해요, 라고 말하고 싶지만 말하지 않는다. 그 말들을 머릿속에만 간직하고 가두어놓는다. - P401

생각을 해야만 한다. 세상에, 하지만 이 좁아터진 오두막 안에서 어떻게 생각이란 걸 할 수 있겠는가. 가족들이 다 있는 곳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풍겨 나오는 기운만으로 죄다 감지 해내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 P403

에이바는 최근 벌어지는 일들의 이유를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던 것을 그만두었다. 그런 일련의 생각은 아무 데도 쓸모가 없다. 전혀 쓸모가 없다. 벌어질 일은 벌어질 것이고 보통 거기에는 그 어떤 이유도 없다. 하지만 이건—이건 다르다. 이것은 태어나려고, 시작하려고, 이제 막 태동하려고 한다. 인생에서 수많은 인물이 멀어져가는 것 같은 바로 이 순간에.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 P411

에이바의 눈 뒤가 시큰해지더니, 재채기가 나올 것 같다. 와글거리는 느낌이 모여든다. 글자가 쓰여 있는 종이를 너무 오래 바라보며 정신을 집중하지 못할 때 드는 느낌처럼, 조심하지 않으면 바라보고 있는 것이 미끄러지고 빠져나가 무엇으로도 변형돼버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 P412

전화선을 따라 정적이 흐른다. 거대한 침묵의 바다가 둘 사이에서 펼쳐지고, 높이 솟았다가, 굽이친다. - P417

그 말이 공기 중에 터져 나왔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것 같다. 그 말은 좁은 전화박스 공간의 뜨거운 공기를 날아 머리 위를 맴돈다. 에이바는 문을 슬쩍 열어 그 틈새로, 벌 떼가 벌집에서 날아가듯, 그 말이 빠져나가 저 바깥세상으로 나가버리게 만들고 싶다. - P418

이제 둘은 함께 발을 맞춰 걸으며 오두막집으로 돌아간다. 모니카는 자신과 에이바가 이럴 수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완전히 똑같이 발맞춰 걷는 것. 이처럼 똑같이 규칙적인 움직임을 함께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함께 걸었던 그 모든 세월에서 비롯된 걸 거다. 학교에 갔다 돌아오고, 가게에 갔다 돌아오고, 버스 정류장에, 지하철에, 도서관에. - P425

모든 잎사귀 사이사이에 잔물결이 일듯 둘 사이의 공기가 가장 혼란스럽게 동요한다. - P426

"피곤해서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에이바가 묻는다. 눈은 이미 감겨 있다.
"몰라." 모니카가 말하며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간다. "그치만 네가 이미 시험해봤을 거라고 생각해." - P428

그레타가 일어난다. 할 일이 생겨 기쁘다. 그레타는 일상에서 뭐가 잘못돼가고 있거나 말거나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게 싫다. 누구나 눈앞에 할 일이 있는 게 도움이 된다. 그 일이 얼마나 사소한지와는 관계없이. - P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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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바는 이제 물속에 있다. 에이바의 외침이 들린다. 비타는 에이바를 따라가겠다는 일념으로 파도와 정면으로 부딪치며 나아간다. 같은 유의 사람이 둘,이라고 모니카는 생각한다. 클레어는 저 아이의 앞날에 말썽이 있으리라는 걸 알고 있을까? 마이클 프랜시스는 파도가 딸을 집어삼켜버리기 전에 딸을 향해 돌진한다. 그는 공기 중에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발을 구르는 아이를 들어 올려 흔든다. 그러다 다시 모래 위에 올려놓자 아이는 웃는다. 아이의 화는 하늘 어딘가로 떠나간다. 모니카는 화가 저 하늘 너머로 산산이 흩어지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 P372

아내가 밀어내진 않을까, 받아줄까. 또 궁금해진다. 왜 그렇게 오래, 그렇게 오랫동안 이렇게 서지 못했을까. 언제가 마지막이었을까. 그리고 어떻게 해서 이렇게 서 있지 못하게 되었을까? 왜 항상 그러지 못할까?
클레어는 밀어내지 않는다. 그에게 팔을 두르기까지 한다. 그는 자신의 허리에 단단히 고정된 그녀의 양팔을 느끼며 눈을 감는다. 모든 게 완벽하다. 그는 마치 자신이 저 멀리서 이 장면을 돌아보고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에게 질투를 느낀다. - P373

가까이 어딘가에서 부스럭대는 발걸음, 수많은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이 발맞춰 걷고 있다. 열쇠 또는 날붙이 같은 무언가에서 딸깍 소리가 난다. 여분으로 남겨진 부분처럼 여기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발견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그녀는 앞으로 움직인다. - P385

누구라도 그걸 알 수 있다. 얼마나 끔찍하고 슬프겠는가. 30년 동안 보지 못한 남동생 외에 아무도 없는 사람이 혼자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면 말이다. 어떻게 이게 가능하단 말인가.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있는데, 누군가의 인생이 이렇게 충격적일 만큼 고독할 수 있을까? - P388

런던의 도로 한가운데 파헤쳐진 구멍 중 하나 같았다. 파헤 쳐진 구멍들은 죄다 너무 충격적으로 보인다. 포장도로에 난 갈라진 틈, 돌 부스러기와 상처, 노출된 토양과 진흙이 도시의 표면과 너무 가까이 닿아 있다. 사람들은 그 구멍을 채워 넣고, 그것을 덮는다. 그러면 그 자리는 주변과 부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표면이 된다. 까맣게 채워진 아스팔트는 기존에 있던 모래투성이 도로와 대비돼 반짝이고 봉긋 솟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러다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원래 있던 것들과 높이가 같아지고, 먼지투성이가 되고, 구분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누구도 더 이상 오래된 아스팔트와 새로운 아스팔트가 어디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된다. 거기에 적절하지 않은 무언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절대 알 수 없게 된다. - P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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