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리는 간이침대에 누워 아이들과 한 대화를 떠올리며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결백하다고 했을 때는 아무도 자기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자기가 신발을 훔쳤다고 말하는데도 아무도 믿지 않으니 말이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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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가 지하를 벗어나면서 차창 밖으로 산뜻하고 싱그러운 교외 풍경이 펼쳐졌다. 그들은 묵묵히 맞은편 차창을 바라보았다.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화창했다. 열차가 달리면서 내는 규칙적인 소음과 진동을 느끼며 베르타는 아련한 그리움에 잠겼다. 기차를 타고 이렇게 어디론가 멀리 가보는 것이 얼마 만인지 알 수 없었다. 베르타가 문득 얼마 전에 우연히 만난 고등학교 동창에 대한 얘기가 하고 싶어, 얼마 전에요, 하고 돌아보았을 때 마리아는 고개를 약간 늘어뜨린 자세로 눈을 감고 있었다. 베르타가 잠시 기다렸지만 마리아는 반응이 없었다. 베르타는 마리아를 물끄러미 지켜보다 아이를 재운 엄마처럼 푸근하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맞은편 창밖을 마음껏 구경하기 시작했다. 저 창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이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것이라는 만족감에 어깨가 움칠거릴 만큼 기뻤다. - P104

무엇에 홀린 듯 태극기의 매력에 사로잡히고 말았는데 그건 어쩌면 열아홉 살의 마리아가 미지의 나라인 독일로 출발하는 순간에 보았던, 태극기가 무수히 펄럭이던 장면의 뒤늦은 효과인지도 몰랐다. 현란한 태극 무늬와 검은 괘의 점선들은 그 당시 마리아의 가슴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희열과 공포를 그대로 찍어 인화해놓은 듯했다. 태극기가 더이상 팔리지 않아 팔려는 사람들이 다 떨어져나간 후에도 마리아는 혼자 태극기를 팔러 다녔다. 낯선 동네에 가서 하늘을 배경으로 자리를 잡고 주문 제작한 깃대 꽂이를 펼친 후 태극기를 꺼냈다. 접힌 깃대를 쭉 뽑아 깃발을 다양한 높이에 매달고 배치에 공을 들였다. 몇은 세우고 몇은 비스듬히 누이는가 하면 몇은 나란히 꽂고 몇은 꽃다발처럼 통으로 묶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살랑거리며 늘어져 흔들리다 바람이 불면 펄럭이고 바람이 잦아들면 가라앉고 그늘이 드리우면 은은하게 시름에 잠긴 듯한 깃발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리아는 불가해한 아름다움에 전율했고 마치 둘 사이에 어떤 필연성이라도 있는 듯 자연스레 첫아들의 청회색 눈동자를 떠올리곤 했다. - P105

한 계절이 가고 새로운 계절이 왔다. 마리아의 말대로라면 새로운 힘이 필요할 때였다.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들지요.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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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지키고 싶어서 그래. 관심도 간섭도 다 폭력 같아. 모욕 같고. 그런 것들에 노출되지 않고 안전하게, 고요하게 사는 게 내 목표야. 마지막 자존심이고. 죽기 전까지 그렇게 살고 싶어. - P75

근데 엄마, 내가 머리가 나빠서 잘 모르는 거야? 사랑하는 게 왜 좋고 기쁘지가 않아? 사랑해서 얻는 게 왜 이런 악몽이야? 사랑하지 않으면 이렇게 안 힘들어도 되는데, 미워하면 되는데, 왜 우린 사랑을 하고 있어? 왜 이따위 사랑을 하고 있냐고. 눈물도 안 나오고 숨도 못 쉬겠는, 왜 이런, 이런 사랑을 하냐고. - P77

지금껏 나는 무슨 짓을 하며 살아온 것일까, 반희는 생각했다. 두려워 도망치고 두려워 숨고 두려워 끊어내려고만 하면서. 채운과 이어진 수천수만 가닥의 실을 끊어내려던 게 채운에게는 수천수만 가닥의 실을 엉키게 하는 짓이었다면, 지금껏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아온 것일까. - P78

사랑해서 얻는 게 악몽이라면, 차라리 악몽을 꾸자고 반희는 생각했다. 내 딸이 꾸는 악몽을 같이 꾸자. 우리 모녀 사이에 수천수만 가닥의 실이 이어져 있다면 그걸 밧줄로 꼬아 서로를 더 단단히 붙들어 매자 함께 말라비틀어지고 질겨지고 섬뜩해지자. 뇌를 젤리화하고 마음에 전족을 하고 기형의 꿈을 꾸자.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들이 밑도 끝도 없이 샘솟았고 반희는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나기라도 한 듯 가슴이 뛰었다. - P79

참 고귀하지를 않구나 이 사람들은, 하고 생각했다. 분명 자신도 고귀하다고 할 순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은 고귀하지를, 전혀 고귀하지를 않다고 베르타는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같은 생각을 반복했다. 이제 베르타를 괴롭히는 의문은 자신이 왜 이들과 계속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이들은 이렇게 해서 뭐가 만족스러운 건가, 베르타는 신음하듯 생각했다.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는 말을 떠들어대면서 도대체 어떤 기쁨을 느끼는 걸까. 가만히 듣는 것보다 열심히 말하는 게 그래도 뭔가 하는 것 같아서? 그나마 그게 더 살아 있는 것 같아서?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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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으면 잊힐 것이고 눈을 감으면 잊힐 것이고 말을 하지 않으면 잊힐 것이고 시인하지 않으면 잊힐 것이고 죄처럼 말을 하면 그것들은 다 용서되어 잊힐 것이고 그리고 다 잊힐 것이다. - P26

목격해보지 않은 민족은, 이와 같은 억압으로 지배받아보지 않은 민족, 그들은 알지 못한다.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 특수 용어들: 원수, 악랄, 정복, 배신, 침략, 파괴. 그것들은 다만 한 적대 국가가 다른 나라의 인간성을 말살시켰다는 명백하고도 어김없는 기록, 즉 역사적 기록에 대한 커다란 지각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이것은 실로 실체적이 못 된다. 살과 뼈로 된, 골수까지, 각인된. 개입이 필요한 그 지점까지, 이 경험을, 이 결과를, 표현을, 새로 발명하는 한이 있더라도, 계속하기를 그치지 않는 그것과는 다르다. - P42

당신은 똑같이 한 조그만 분자입니다. 당신은 떠나갔다가 다시 돌아옵니다. 오랫동안 비워놓았던 껍데기로. 그 공간을, 요구하기 위하여 되찾기 위하여. - P69

목적지는 없다. 또 다른 전쟁으로부터 또 다른 피난처를 향하는 것 외에는. 목적지를 향한 여러 세대의 교체와 역사의 행로에는 많은 기만들이 있다.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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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을까. 갈등과 암투만을 먹고 사는 인간이. 새끼 오리 친구들에게 전화를 못하게 된 후로 나는 술 먹고 자주 다쳤다. 낯선 고립감이 이리저리 쏠리면서 신체의 균형을 망가뜨리는 것 같았다. 술에서 깨고 나면 어딘가 욱신거렸고 팔꿈치나 무릎에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어렸을 때의 다친 마음이 뒤늦게 몸으로 드러나는 것 같았다. - P16

삼십 년 전, 너는 왜 연극이 하고 싶어. 내가 물었을 때 정원은, 나는 왜든 연극이 하고 싶어, 라고 말했다. 어쩌면 나는 사슴벌레식 문답에 대해 심오한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말하는 사슴벌레의 대답이 나는 상대에게 구구절절한 과정이나 절차를 해명하지 않아도 되는 의젓한 방어의 멘트인 줄 알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그 문답 속에는 내가 읽어내지 못한 무서운 뉘앙스가 숨어 있었던 것 같다. - P28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대답하는 사슴벌레의 말 속에는, 들어오면 들어오는 거지, 어디로든 들어왔다, 어쩔래? 하는 식의 무서운 강요와 칼같은 차단이 숨어 있었다. 어떤 필연이든, 아무리 가슴 아픈 필연이라 할지라도 가차없이 직면하고 수용하게 만드는 잔인한 간명이 ‘든‘이라는 한 글자 속에 쐐기처럼 박혀 있었다. - P29

그날 새벽 경애는 강변을 걸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안개처럼 막막한 두려움에 휩싸여 얼마나 깊고 집요한 자책을 했을까. 자신이 저질렀을지도 모를 실수나 과오를 하나하나 되짚으며 그걸 만회하기 위해 얼마나 무거운 짐과 기나긴 고통을 감당해야 한다고 결심했을까. - P30

나는 주문을 외우듯 다시 사슴벌레식 문답으로 돌아간다.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대답하는 사슴벌레의 말은 의젓한 방어의 멘트도 아니고, 어디로든 들어왔다 어쩔래 하고 윽박지르는 강요도 아닐 수 있다. 그것은 어쩌면 감당하기 힘든 두려움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어디로든 들어는 왔는데 어디로 들어 왔는지 특정할 수가 없고 그래서 빠져나갈 길도 없다는 막막한 절망의 표현인지도. - P37

어떻게든 미안하지가 않다는 말은 미안할 방법이 없다는, 돌이킬 도리가 없다는 말일 수도 있다. 우리가 지나온 행로 속에 존재했던 불가해한 구멍, 그 뼈아픈 결락에 대한 무지와 무력감의 표현일 수도 있다. - P37

정원과 내가 삼십 년 전에 쳐놓은 괄호 밖으로 사슴벌레의 무시무시한 경련이 튀어나오는 듯한 환상이 나를 사로잡는다. 누군가 뒤집힌 채 버둥거리고 미친듯이 빙빙 돌며, 절대 과오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듯 무서운 속도로 어딘가를 향해 막무가내로 움직여가고 있다. 누구니······ 넌······ 혹시······ - P38

제발 잘 살라는 부영의 마지막 말이 제발 잘 좀 살아달라고, 더 천하지는 말고, 그런 말로 읽혔다. 이제 부영과도 완전히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며 내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묻다, 내가 어쩌다든 이 지경이 되었다고, 아니 애초부터 이 지경이었다고, 삼십 년이 넘고 사십 년이 되어도 나는 여전히 비틀린 내시와 상궁의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나는 진즉에 내가 그런 인간인 줄 다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언제까지 질질 끌래, 부영이 묻고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직시하지 않는 자는 과녁을 놓치는 벌을 받는다. - P39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 채 나는 삼십 년 전의 그 여행을 오로지 즐거웠던 추억으로만 채색하려 애써왔다. 그러나 기차가 사라진 기차여행처럼, 나의 기억은 어둠 속에서 바라보는 터널 끝 원환처럼 비현실적으로 밝게 동동 떠 있다. 그렇게 내 기억은 이미 오래전 알지 못하는 어느 경로로 잘못 들어가 돌아나갈 길을 찾지 못하고 동그랗게 갇혀버렸는지도 모른다. 기억의 내용은 동일해도 그 뉘앙스는 바뀐 지 오래인데 말이다. 사슴벌레식 문답처럼. - P41

갇힌 기억 속의 내 옆에 쌍둥이처럼 갇힌 지금의 내가 웅크리고 있다. - P42

반희는 채운이 자신을 닮는 게 싫었다. 둘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닮음의 실이 이어져 있다면 그게 몇천 몇만 가닥이든 끊어내고 싶었다. 그래서 결국 둘 사이가 끊어진다 해도 반희는 채운이 자신과 다르게 살기를 바랐다. 그래서 너는 ‘너‘, 나는 ‘나‘여야 했다. - P50

우리 있잖아, 아빠랑 오빠도 이름 부를까? 병석씨, 명운씨 이렇 게.
그러자. 그래야 내가 흥분해도 감정의 거리가 생길 것 같네.
세상 모든 사람에게 공평해지는 게 좋지. - P53

근데 울면서 뛰어는 왔는데 내 앞에 딱 서더니 고개를 홱 돌리더라.
와, 기가 막혀. 채운이 걸음을 멈췄다. 나 화났다 이거지?
그렇지. 그러고도 이십 분은 날 똑바로 쳐다보지도 않더라.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기는 하는데 얼굴 보려고 하면 보여주지를 않아.
초3이나 된 게 그게 뭐하는 짓이야.
서운한 게 안 풀려서 그런 거지. 난 그때 채운씨 마음 알 것 같았어.
근데 나는 그때 반희씨 마음을 몰랐던 거네.
몰랐어야지. 채운씨가 그 나이에 그런 것까지 알았으면 내가 더 비참했지. - P65

공기는 차고 주위는 어두웠다. 가끔 들리는 새소리, 나뭇가지가 부딪치거나 꺾이는 소리, 휙 바람이 몰아치는 소리 외에는 완전무결한 적막이었다.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시간도 멈춘 것 같았다. 어느 순간 아주 먼 곳에서 오옹 오옹 하는 희미한 소리가 들려 왔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채운이 오는 소리 같았다.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반희는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나기라도 한 듯 가슴이 뛰었다. 숲의 적막 속에 앉아 있는 늙은 자신만큼이나 차를 몰고 산길을 올라오는 젊은 채운의 존재도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이 곧 만나게 되리라는 것도, 이 어두운 숲속에서 함께 밤을 보내게 되리라는 것도 믿을 수 없었다. 반희는 이 순간을 영원히 움켜쥐려는 듯 주먹을 꼭 쥐었고, 절대 잊을 수 없도록 스스로에게 일러주려는 듯 작게 소리 내어 말했다.
채운씨가 오고 있어. 채운씨가 와. - P68

엄마, 우리가 먹을 거 놓고 마음껏 싸우지도 못하게 된 건 뭐 땜에 그런 걸까?
음, 반희가 생각하다 말했다. 그것도 물고기랑 같은 이유겠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세상 뭐 다 이렇게 슬픈 얘기야, 젠장. 채운이 맥주를 벌컥 마시고 말했다. 나는 원래 생겨먹은 데서 얼마나 많이 바뀌었을까.
반희는 뭐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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