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친구는 사적인 관계다. 이웃은 사회적인 관계다. 나와 친구는 개인으로서 만나지만, 나와 이웃은 이웃 사람과 이웃 사람으로 만난다. 친구들은 정서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전제로 한다면, 이웃은 물리적 가까움을 전제로 한다. 앗, 물리적 가까움! 그러니까 이웃은 나라는 존재가 실제로 어디에 있는지 알려준다. 어린이에게 이웃은 이 세상에 ‘진짜‘ 사람들이 산다는 걸 알려준다. 동네 마트에서 아이스크림을 살 때, 모자 달린 외투를 머리에만 걸친 도련님 차림으로 신발주머니를 무릎으로 쳐가면서 학교를 오고 갈 때, 어린이는 실재하는 사람들을 본다. 이웃인 어른들은 알게 모르게 어린이 삶의 배경에 이미 등장한 것이다. 어린이 자신도 이웃으로서 나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일상적으로, 날마다. - P60

이따금 어린이한테 잘 해주고 싶어도 주변에 어린이가 없어서 그럴 기회가 없다고 아쉬워하는 분들을 만난다. 우리가 실제로 이웃을 못 만나서 ‘이웃 어른‘이 될 기회가 적어진다면 동네의 범위를 점점 더 넓게 잡자. 길에서 카페에서 식당에서 만나는 어린이 이웃을 환대하면 좋겠다. 그냥 어른끼리도 되도록 친절하게 대하면 좋겠다. 어딘가에 ‘세상이 이런 곳이구나‘ 하고 가만히 지켜보는 어린이가 있다는 걸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어린이가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가올 세상이 달라질 거라는 당연한 사실을 사람들이 많이 생각해보면 좋겠다. - P64

나는 박물관이 좋다. 박물관의 전시물들은 공공의 유산이다. 나한테 그걸 볼 권리가 있다는 점이 좋다. 박물관에서 어린이가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아가 인류의 일원으로서 더 많이 환영받으면 좋겠다. 유산은 그렇게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고 믿는다. - P80

책 자체가 언어를 매개로 한, 문화 예술의 산물이다. 그리고 어린이에게 문화 예술은 세상을 배우는 길인 동시에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작품을 이해하고, 작가의 의도를 알고, 맥락을 이해하고, 다른 감상자를 만나는 것. 어린이 자신이 창작자가 될 때도 그렇게 전달되는 작품을 추구하게 해야 한다. 문화 예술은 사회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 P83

오늘날 교육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창의성‘을 중심으로 생각해보면 분명해진다. 창의적인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이 창의적인 것인지 알기 위해서는 먼저 이전의 것들을 배워야 한다. 비윤리적이거나 사회적 합의에 어긋나는 것을 창의성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표현의 기술을 익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다시 한번, 창작은 사회와 무관하지 않다. - P83

"선생님은 지금까지 본 것 중에 몇 권이 제일 재미있어요?"
"이번에 나온 게 제일 재미있네!"
현성이는 싱글벙글 웃으며 이렇게 대꾸했다.
"왜냐하면 제가 실력이 점점 늘고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다음에 나올 거는 더 재미있을 거예요!"
‘앞으로 점점 더 잘하게 된다‘는 확신은 어린이가 자신을 성장시키는 큰 동력이다. 그런 확신의 근거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현재의 자기 모습이다. 재작년보다 작년, 작년보다 지금 더 그림을 잘 그리고, 축구를 잘하고, 아는 게 많다. 앞으로도 지금보다 더 잘하게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열심히 공을 차고 공부도 한다. 그러고 보면 서툴다는 것도 어른들 생각이지, 어린이 입장에서는 연습을 거듭한 ‘지금‘이 가장 잘하는 때다. - P9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간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속도로 흘러간다. 나는 똑같은 속도로 나이를 먹어간다. 특별히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나름 대로 발전적으로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냥 계속 자라는 것으로 쳐도 되지 않나? 앞 문장에 부사를 너무 많이 썼다. 이렇게까지 부사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진술은 믿을 수 없다. 책임을 다해야 할 어른이 나도 아직 자라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 뻔뻔하다.
그럼 몇 살부터 ‘자란다‘가 아니라 ‘늙는다‘가 되는 걸까? - P20

사전적으로는 중년이라 할 수 있는 마흔 살 안팎부터라고 한다. ‘중년‘에 대한 표준국어대사전의 설명은 이렇다.

청년과 노년의 중간을 이르며, 때로 50대까지 포함하는 경우도 있다.

"때로"라는 말이 신경 쓰였다. 원래는 40대까지인데 넉넉하게 50대도 중년으로 친다는 걸까? 사실 나 자신은 아직도 ‘중년‘이라는 정체성을 외면하고 있는데, 만일 중년이 ‘50대까지 포함하지 않는 경우‘라면 나는 이미 중년도 끝나가는 것이 된다. 나는 꽤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언제나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있으니까 어디 가서 나이 타령 하지 말아야지, 하고 늘 생각해왔다. 스스로 ‘나이‘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어린이와 나란히 놓고 보니 내 연령대가 어디에 놓이는 건지, 다시 말해 내가 얼마나 나이가 많은지 깨달은 것이다. 달리 표현할 길이 있다면 좋겠지만 없기 때문에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다. 나도 나름대로 오래 산 것이다. - P20

윤서 덕분에 알게 된 것이 하나 더 있는데, 말수가 적은 어린이는 ‘말하기‘가 아닌 ‘듣기‘로 대화한다는 것이다. 내가 말하느라 애쓴 동안 윤서는 듣느라 애썼을 것이다. - P38

말하기를 좋아하는 어린이는 자기를 잘 드러낸다. 어른들도 이런 어린이는 한 번이라도 더 보게 된다. 그에 비해 말수가 적은 어린이는 눈에 띄지 않는다. 조용하기 때문이다. 내가 으레 ‘어린이는 떠들게 마련이다‘라고 생각했던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 P38

말수가 적은 어린이는 ‘표현력이 부족하다‘는 오해도 종종 받는다. 그런데 자신을 꼭 말로만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림이나 연주도 표현의 도구가 된다. 어떤 어린이는 무언가가 표현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평소에 속마음을 잘 표현하지 않는 어린이가 잠자리에 들면서 낮에 본 책 얘기를 하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그 어린이가 하루 동안 마음에 품고 있었을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물론 잊고 있다가 잠들기 전에 퍼뜩 그림책의 한 장면이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어린이가 말하지 않는 동안에도 어떤 느낌이나 아이디어는 어린이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책을 매개로 어린이를 만나기 때문에 책과 관련된 것만 겨우 엿볼 뿐, 어린이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헤아릴 방법이 없다. 그 마음속의 일을 바로 표현하지 않는다고 해서 어린이가 ‘답답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 P40

나 자신이 말하기를 좋아하고 말하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좋은 말하기가 말수에 달려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말수 적은 나의 ‘어른‘ 친구들이 그 증거다. 나는 그들이 내 말을 들어주는 것만큼이나 그 ‘적은 말‘을 내게 들려주는 것이 늘 고맙다. 솔직히 말수 적은 게 멋있어 보여서 따라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늘 실패한다. 그런 것은 타고나는 모양이다. 대신 이따금 그 친구들의 어린 시절을 상상해본다. 아마도 조용한 어린이였겠지. 오해를 받아 속상하고 답답할 때도 있었겠지만 대체로는 괜찮았을 것이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익숙한 고요함 속에서 자기를 키웠을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멋있는 사람들이 되었겠지. 그러니까 말수가 적은 어린이도 괜찮을 것이다. - P42

어린이에게 친구란 단순한 ‘놀이 대상‘이 아니다. 경험과 지식수준이 비슷한 사람, 학교생활 같은 중대한 일상을 공유하는 사람, 사회적인 위치가 비슷한 사람이다. 친구들끼리는 비슷한 것을 알고 비슷한 것을 모른다. 자기들만 아는 순간과 농담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님은 물론이고 자매 형제와도 온전히 나눌 수 없는 다양한 감정과 생각을 친구와는 나눌 수 있다. 어린이가 ‘친구‘와 놀고 싶은 건 그래서다. - P4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낡은 집에 아직 남아 있는 작품 한 점은 피아노 옆에 걸려 있었다. 생논Saint-Non(1727-1791) 신부가 이탈리아 화가인 지오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Giovanni Battista Tiepolo의 데생을 보고 제작한 작은 애쿼틴트aquatint 판화였다. 이 판화에서는 풀치넬라Pulcinella(이탈리아 희극의 캐릭터로 교활하면서도 어리숙한 익살꾼을 풍자한다)가 밀라노의 브레라 미술관Pinacotheque de Brera에 전시되어 있는 만테냐Mantegna의 〈죽은 그리스도〉와 같은 자세로 술에 취해 모자를 옆에 둔 채 잠들어 있었다. 브리오니 왕녀로부터 지금은 사라진 이 컬렉션 이야기를 듣고 나는 한 가지 교훈을 얻었다. 열망해서 얻은 것들은 결국 우리의 손을 떠나버린다는 것을. - P2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너무 신중해져서 아무것도 믿지 못한다. 믿기 위해 계속 의심하는 삶이라니. 그냥 믿음 없이 사는 게 낫겠다, 하고 반은 농담으로 버무린 그 말이 이후 삶의 방식이 되어버리고, 그렇게 한참 살았는데 요즘 자꾸 간절히 믿고 싶은 것들이 생긴다. 믿음이 아니라 믿고 싶은 것들이 삶을 추동하는 모양이다. 그렇구나. 믿음 없이는 살 수 있어도 믿고 싶은 것 없이 사는 건 힘든 거였어. - P175

웃음으로 가릴 수 있는 게 많다는 걸 아는 사람들이 제일 어쩔 줄 모르겠다 싶은 곳이 병원 응급실과 장례식장이다. 눈물로 가릴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그러니까 웃자. 병원에 다녀왔다. 장례식장에는 가지 않았다. 대신 카페에 가서 한 시간 정도 앉아 있었다. 라테를 가져다주는 서버에게 고맙습니다, 인사할 때는 마스크 안에서도 활짝 웃는 입이었다. - P182

욕을 먹고 사과하고 용서받으며 배워야 하는 것도 있다. 서로가 짐작하는 관계의 불 완전성 여부는 공격해보지 않고는 모른다. - P183

외로움은 일반적인 생의 조건이고 결혼 유무 정도로는 벗어날 수 없다. 양갈래 혹은 그 이상의 갈림길 앞에서 혼자의 외로움이 여럿의 괴로움보다 견디기 쉬워서 한 선택들이 지금 나를 여기에 데려다놓은 것이다. 그동안 내가 익숙해졌다고 해서 그게 외로움이 아닌 건 아니다. 늙어도 외롭지 않다거나 살수록 인생이 더 재미있고 즐겁다는 말의 진짜 의미와 효용에 닿기도 전에 인간은 죽는다. 존재세(존재해서 내는 세금)적인 관점에서 보면 혼자도 외롭고 늙어도 외롭고 살수록 외롭다. 게다가 외로움이 우리가 감당해야 할 최악의 조건은 아니다. H와 L과 내 머리가 같이 움직인다. 끄덕끄덕. ‘혼자라는 상황에 대한 천편일률적 오해가 쌓아놓은 벽들이 더 곤란하다. 그래서 내가 수많은 너를 찾는다. 잡는다. 곁에서 꼬물거린다. 외롭지 않으려고가 아니라 계속 외로워야 해서. 외롭게 돌을 던져야 해서. 외롭지 않으려고 하는 모든 일 끝에 결국 외로움이 답이었다. - P190

무언가를 두려워 한다고 해서 그 두려움을 발생시키는 상황이나 대상에 대비하는 즉각적이고 능동적인 행동을 반드시 취하는 건 아니다. 그보다는 망각이나 외면이 효과가 좋았다. 어떻게 저렇게 얼렁뚱땅 말도 안 되게 살 수 있지, 에서 ‘저렇게‘에 해당되는 삶이었다. 이유를 게 없었다. 이유가 없다는 건 여유가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불편함은 참는 거지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었다. - P19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드로 파라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3
후안 룰포 지음, 정창 옮김 / 민음사 / 200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뜨겁고 건조하고 강렬하고 황량하고 찬란하고 비극적인 문학 작품. 전체적으로 암울한 느낌이면서 어쩜 이리 아름다울 수 있는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