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죽음‘과 ‘사랑‘이 찾아오는 시기를 알 수 없다. 그저 그 순간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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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기차는 그때 이미 편안하게 터널에서 미끄러져 나와 마른 풀로 덮인 산과 산사이에 끼어 있는 어느 빈민촌 변두리의 건널목을 마침 지나가고 있었다. 건널목 근처에는 어디에나 초라한 초가집과 기와집이 너저분하고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데, 아마 건널목 간수가 흔드는 것이리라. 오직 한 폭의 허연 깃발만이 귀찮다는 듯 어스름에 흔들리고 있었다. 드디어 터널에서 나왔구나 하는—그 순간, 그 쓸쓸한 건널목 울타리 저쪽에, 나는 볼이 새빨간 사내아이 셋이 밀치락달치락하며 나란히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아이들은 모두 이 흐린 하늘에 짓눌려버렸나 싶을 만큼 하나같이 키가 작았다. 그리고 또 이 마을 변두리 음산한 풍경과 똑같은 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아이들은 기차가 지나는 것을 올려다보면서 일제히 손을 치켜들더니 애처로운 목소리로 크게 뭐라는지 뜻 모를 환성을 힘껏 내질렀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창문으로 반이나 몸을 내민 그 계집아이는 저 부르튼 손을 쑥 내밀고 힘차게 좌우로 흔드나 싶더니, 갑자기 마음을 들뜨게 할 만큼 따뜻한 햇빛 색으로 물든 귤이 대략 대여섯개, 기차를 배웅하는 아이들 머리 위로 후두두 하늘에서 떨어졌다. 나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그리고 찰나에 모든 것을 이해했다. 계집아이는, 필시 이제부터 식모살이를 하러 떠나려는 계집아이는, 그 가슴에 품고 있던 몇 알인가의 귤을 창문으로 던져서,
애써 건널목까지 배웅을 나온 남동생들의 수고에 보답한 것이다.
어스름을 딴 마을 변두리 건널목과 아기 새처럼 소리를 높이는 아이들 셋과 그리고 그 위로 어지러이 떨어지는 산뜻한 귤의 색깔—모든 것은 차창 밖으로 눈 깜짝할 새고 없이 지나갔다. 하지만 내 마음결 위에는 애달프리만치 선명하게 이 광경이 아로 새겨졌다. 그리고 거기에서 어떤 정체 모를 밝은 기운이 솟아오름을 느꼈다. 나는 기분 좋게 고개를 들어 마치 다른 사람을 보듯 그 계집아이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계집아이는 어느새 벌써 내 앞자리로 돌아와 변함없이 잔뜩 튼 볼을 연두색 털실 목도리에 묻고, 커다란 보따리를 안은 손으로 삼등석 표를 꼬옥 쥐고 있다. 나는 이때 비로소 뭐라 형언할 길 없는 피로와 권태를, 그리고 불가해한, 하등한, 따분한 인생을 겨우 잊어버릴 수 있었다.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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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은 적어도 우리와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는 ‘구린’ 것이었다. 나라가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해 온 대부분의 것들이 구렸고, 나라가 애국이라는 이름을 들먹이는 경우 대부분 뒤가 구렸다. 그랬기에 축제에 오기 전 김혼비는 마뜩잖았고 박태하는 다소 심술궂었다. 미안했다. 의병 개개인의 삶의 결을 추상적 가치로서의 ‘애국‘으로 뭉뚱그려 버리는 게 K-민족주의라면 그에 대한 반발심으로 그 어떤 진심들마저 ‘구림‘으로 뭉뚱그려 버린 게 우리가 한 일이었다. 애국이니 민족주의니 하는 것도 어디 따로 뚝 떨어져 존재하는 가치가 아니라 결국 우리와 비슷한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주변의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나선 싸움과 마음의 합이라는 걸 느낄 때 평소 ‘쿨함’으로 덮어 둔 마음 한쪽이 열려 버린다. 이 분분하고 분연한 마음들을 어떻게 쿨하게만 넘길 수 있을까.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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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위대한 제우스도 복수의 신에게는 못 당합니다……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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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사실은 알고 있었다. 때로는 어설프고, 때로는 키치하고, 때로는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이 혼잡한 열정 속에 숨어있는 어떤 마음 같은 것을 우리는 결코 놓을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그마저도 낡고 촌스러워진 ‘진정성‘이라는 한 단어로 일축해 버리기에는 어떤 진심들이 우리 마음을 계속 건드린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도 남들 못지않게 거기에 절망하고 슬퍼하고 화내고 또 때로는 비웃는 ‘K스러움‘도 결국은 그 마음들이 만들어 낸 것이라는 사실을.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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