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걸
마이아로즈 크레이그 지음, 신혜빈 옮김, 최순규 감수 / 문학동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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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새들을 의식한다기보다 있는 그대로 흡수한다. 정원 모이통에 모여든 새든, 집 근처 호수나 안데스산맥에서 만나는 새든. 그리고 새들은 언제나 정확히 내가 필요로 하는 걸 준다.
탐조는 한 번도 취미처럼 느껴진 적이 없다. 원할 때 집어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을 수 있는 여가 활동이라기보다는, 내 삶의 무늬를 이루는 실과 같다. 너무도 단단히 엮여 있기에, 나머지 내 삶을 건드리지 않고 그것만 뽑아낼 수는 없는 것이다. - P41

이제 나의 불안감의 둥지를 떠날 때가 됐음이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 P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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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 일기 세라 망구소 에세이 2부작
세라 망구소 지음, 양미래 옮김 / 필로우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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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언젠가는 일기 쓰기를 멈출 수 있게 되는 날이 올까, 라고 내내 생각하며 읽었다.

내게 일기 쓰기는 (한 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지긋지긋한 숙제 같은 것이 아니다. 운동을 하거나 돈이 되는 일을 하거나 불운한 사람들을 돕는 데 시간을 쓰는 대신 나는 일기를 쓸 따름이다. 하나의 악습인 셈이다. - P14

하루 이상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고 시간을 그저 흘려보낸다면, 두렵지만 그렇게 해본다면, 나는 그 시간에 휩쓸려 사라질 것이고, 무언가를 지속하는 행위의 목적을 더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 P15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일만 기억하고, 그 일이 전부였다는 확신을 품고 싶다. - P25

내 행동은 시간에 완전히 휩쓸리기 전에 시간을 멈추려는 시도였다. 안전하게 지내려는 시도, 삶과 시간이 글로 써낼 수 없을 만큼 서로 뒤얽히기 전에 초연한 관찰자의 입장에서 내게 벌어진 일을 분리해 두려는 시도였다. - P27

내가 혹독한 시절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엄마가 된 것과 연관이 있고, 엄마가 된 것은 내가 질적으로 늙은 것과 연관이 있고, 내가 질적으로 늙은 것은 매분, 매시, 매일을 인식하고 곱씹으며 일기에 기록할 시간과 삶이 바닥나 버린 것과 연관이 있다.
이것은 내가 어느 정도 시간의 흐름에 익숙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더 이상 내게 일어나는 일에 특별히 신경쓰지 않는다. 어제와 비교해 달라진 점을 더 이상 결연하게 관찰하지 않는다. - P76

그때는 몰랐지만 진짜 문제는 질병, 지금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그 질병이 아니었다. 질병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문제였다. - P86

일기를 통해 나는 흘러가는 시간을 꼭꼭 씹어 소화하고 차곡차곡 정리해, 그 시간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게 만든다. 만일 내가 모든 시간을 과거에 대해 생각하는 데 써버린다면 미래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라는 문장을 쓴 적이 있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계속 나아갈 것이다. - P89

이제 나는 망각이 내가 삶에 지속적으로 관여한 대가임을, 시간에 무심한 어떤 힘의 영향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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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쓰기 - 나의 단어로
대니 샤피로 지음, 한유주 옮김 / 마티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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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 잔뜩 부푼 자아를 위한 공간은 없다.
- P96

나는 공공연히 망가져 있었고, 더는 순수하지도, 자각이 없지도 않았다. 내게는 할 이야기가 있었다. 말할 준비가 필연적으로 되지 않은 이야기였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 희미한 주름 하나하나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고, 내 경험을 배우고 번역하는 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과거에 도달하기 위해서. 원고를 통해 아버지와의 관계를 지속하고, 그를 살아 있게 하기 위해서. 그 길고 불가능한 시간 동안 죽은 사람 모두를, 할머니와 삼촌 두 사람을 포함해 전부 살아 있게 하기 위해서. 언어는 내가 항해하는 도구가 되었다. 이 모든 언어로 나는 심연에서 조금 멀리 벗어날 수 있었다. 이 모든 문장으로 내 초점은 예리해졌다. 이 모든 이야기로 나는 안에서부터 나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 P124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날까? 나는 숨을 참고 잠수해 들어간다. 그리고 헐떡이면서 빈손으로 수면 위로 나온다. 숨을 참고 다시 잠수한다. 아마도 이번에는. 나는 물속 풍경에서 보물들을 찾아낸다. 내가 볼 수 있는 것들만을. 내가 발견해야만 하는 것은 내 것이 될 것이고, 오직 내 것이리라. 이런 일에는 특정한 용기가 필요하다고 짐작한다. 하지만 용기와 두려움 없음은 같지 않다. 용기란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어찌되었든 하는 것이다. - P134

축복은 상처 옆에 있다는 말이 있다. 살아오는 동안 나는 그 피막들을 벗겨내려고 시도해왔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눈물이 차오른다. 분노하는 마음이나 비난하고 싶어서, 복수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 모든 막 아래서 약한 아기 새처럼 잡을 수 있고 부드럽고 진실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서 그렇게 한다. - P139

인생은 귀중한 글쓰기 시간을 가지라며 멈추는 법이 없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삶은 멈추지 않고, 우리는 협상한다. 안정되거나, 보통이거나, 고정된 날 같은 건 없다. 방법을 찾으려고 시도할 뿐. - P146

"삶에서 가장 심각하게 공격당할 때는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예술조차도. 특히 예술이." - P153

사랑과 잠재적으로 수반되는 끔찍한 상실은 오랫동안 나의 유일한 주제였다. 나는 파국의 고비를 겪으면서 영원히 바뀌었다. 몸에 새겨졌다. 도구가 바뀌었다. 이제는 변화가 이어지리라는 걸 안다. 이전과 이후가 앞으로도 여러 번 있으리라는 것을. 맞서 싸우기는 부질없고, 불가능하다. 받아들이는 일, 심지어는 너그럽게 감싸는 일이 진정한 작업이다. 작가여서만이 아니라, 살아 있으므로. - P154

나는 작업중인 책이 끝나갈 때마다 내가 선택한 서사 구조 때문에 제약이 생겼다는 걸 느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한계 혹은 세계가 우리에게 부여한 한계와 마주할 수밖에 없다. - P286

우리는, 우리 각자는 언어 그리고 어떤 유형의 인간적 열변을 헛되이 찌르려고 하는 시도와 씨름한다. 우리는 고독하게 타고났지만, 원고란 다른 이들의 눈을 거치면서 좋아지므로 다른 이들과 함께하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자기 작품을 투명하게 볼 수 없으니까. - P294

이런 이유에서 나는 이제 막 첫걸음을 내딛은 작가들이 대체 언제쯤 쉬워지느냐고 물어볼 때마다 그럴 인은 없다고 대답한다. 절대로 쉬워지지 않는다. -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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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진료실에서 끝나지 않는다 - 어느 시골 의사와 환자 이야기
폴리 몰랜드 지음, 이다희 옮김, 리처드 베이커 사진 / 바다출판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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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골 의사가 이상주의자는 아니다. 불평등과 슬픔으로 가득 찬 세상에 거창한 만병통치약이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도 의사는 지역 사회를 이해하고 환자를 이해했을 때, 그리고 힘닿는 한 이 둘을 이어주었을 때 찬란한 빛의 순간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의사들은 이런 방식으로 환자가 맡겨둔 믿음을 활용할 수 있다. - P35

자신처럼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의사라는 직업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이라면 이해할 수 있는 비유일 테니까 말이다.) 의사는 모든 책꽂이에 매우 특별한 이야기들이 꽂혀 있는 아주 멋진 도서관을 뒤지는 사람이라고. 환자를 그 환자의 질병으로 축소해서 보는 행위, 가령 유선의 종양, 제 기능을 못 하는 심장 판막. 게으른 췌장 등으로 축소하는 행위는 책을 단지 종이와 잉크로 보는 태도와 같다. - P47

그 순간만큼 두 사람은 의사와 환자가 아니라 함께 겁에 질린 채 간절히 소망하는 두 여자였다. - P66

선생님은 사람들을 돌보는 행위, 그리고 의술이라는 것이 앉아서 약을 나눠주거나 배를 가르고 다시 꿰매는 입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가르치셨어요. 그야말로 예술이죠. 인간이라는 존재로 사는 것에 대해 훨씬 더 폭넓은 관념을 요구하는 기술입니다. 벽에 학위증을 걸어놓고 알약이나 나눠주는 일이 아닙니다. - P94

격렬한 감정은 여전히 남아 동력이 되어주었지만 의사는 어느새 위기 상황에서 필요한 행동과 감정 사이의 간극을 이용할 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우연한 발견이었다. 엄마의 신중하고 침착한 상태를 즉흥적이고 직관적으로 흉내 내보았는데 효과가 있었고 일하는 데 도움이 됐기에 이후 의사는 그 능력을 갈고닦았다. - P105

하지만 이제 일과 삶을 합칠 기회가 생긴 것이다. 많은 일반의는 일부러 이렇게 살지 않는 쪽을 택한다. 자기 마을 사람들을 보살피면서 어항 속 금붕어같이 고립되어 사는 편보다 상당한 거리를 통근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경계"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의사는 어떻게 친구이자 이웃인 동시에 의사가 될 수 있을까? 동시에 다수의 역할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는 해도 그것이 과연 바람직할까? - P116

하지만 걺은 의사에게는 그동안 갈구했던 것이기에 어딘가 뿌리내렸다는 감각을 느낄 수만 있다면 그 정도 대가는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다. 긴밀한 공동체 안에 자리를 잡을 기회였다. 그곳응ㄹ 마음의 고향으로 삼는 동시에 의미 있는 일을 할 기회였다. 게다가 젊은 의사는 직업상의 이유로도 지속성을 간절히 원했다. 환자들을 더 잘 알수록 좀 더 온정적이고 인간적인 의료 행위를 제공할 수 있고, 이를 통해 환자들을 더 효과적으로 보살필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P117

의사는 이 직업이 주는 보람이 무탈한 순간에만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일에 대한 사랑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 P122

의사는 단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 환자는 그 서비스를 받는 사람에 그치지 않는다. 둘 사이의 관계는 거래 관계가 아니다. 의사는 그들의 일부이다.
이 또한 의사를 행복하고 온전하며, 회복력이 강한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 P156

의사가 슬퍼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골짜기 의사로 지낸 세월 동안 의사가 깨달은 것이 있다면 환자의 광범위한 삶에 어느 정도 정서적으로 공감하는 일은 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좋은 의사가 되기 위해 필수적인 사실이다. - P167

한편 표준화된 지침에 따라 위험을 관리하는 천편일률적인 방식은 의사 개인의 판단에 우선한다. 그로써 중점은 서서히 환자에게서 질병으로, 소통에서 거래로 옮겨간다. 게다가 환자의 숫자가 치솟으면서 어떤 의사라도 일단 만나는 것이 최우선이 되고 개인적인 관계는 변두리로 밀려난다. 의료의 지속성에 대해서 말은 많지만 실제로 달성되는 경우는 훨씬 적고, 측정이 매우 까다롭기 때문에 일반의들에게 주는 특별 수당 체계에 포함되지 안흔다. 어느 잣대로 보나 의사와 환자 간의 관계는 연이은 칼질을 당하며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 P187

모든 질병은 그 나름대로 잔인하다. 알츠하이머병이 잔인한 이유는 사람과 관계를 해체하기 때문이다. 마치 작은 톱처럼 인간의 영혼을 한 조각씩 잘라낸다.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가족을 돌보다가 한계에 부딪힌 남편이나 아내, 자식들에게 사람들은 환자가 그러는 게 아니라 병이 그러는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별다른 위로가 되지 못한다. 바로 그 사실이 가족이 느끼는 상실감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 P221

의사는 자신이 환자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시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알고보면 우리에게는 시간밖에 없다. 여기서 시간은 효과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그런 시간이 아니다. 회의 시간을 잘 지켜야 한다고 할 때 말하는 그 시간이 아니다. 삶을 연장하고 죽음을 지연시켜 확보다흔 시간과도 다르다. 의사는 시간이 우리 인생에서 유한한 축을 구성하며 우리가 그것을 경험하는 방식이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갖고 일에 임한다. 생의 모든 순간이 동일한 무게를 가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때로는 몇 주, 몇 달, 몇 년이 거미줄처럼 가볍게 지나간다. 하지만 고통이나 두려움, 불안 속에서는 10분도 1년처럼 무거울 수 있다. 그 순간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많은 것이 달려 있다는 사실을 의사는 안다. 의사는 무거운 시간을 맞들어 주기 위해 있다. 환자들이 다시금 가벼운 날들을 맞이할 수 있게 돕기 위해서 있다. - P265

의사와 환자 간의 관계가 단지 있으면 좋고 애틋한 어떤 것이 아니라 효과적인 의료 서비스의 핵심에 있는 것이며, 영국에서 NHS가 오래 생존하기 위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최종적으로 입증할 증거가 필요하다. - P283

가정의학 현장에서 개인의 생리biology와 개인의 일대기biography는 서로 얽혀 있고 이에 대해서는 많은 저술이 남아 있다. 만약 이것을 정책 형성과 맞물리게 정량화, 체계화할 수 있다면 마침내 과학과 이야기는 힘을 합칠 수 있을 것이다. - P286

주어진 것과 의도한 것이 적절히 어우러졌다고 할 수도 있다.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 본인을 행운아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의사의 대답이다. -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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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실험실 - 될 때까지 그저 반복 또 반복 아무튼 시리즈 66
김현정 지음 / 코난북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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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에 참고하기 위해 펴든 책은 대개 숙제처럼 읽게 된다. 장단점, 배울 점, 반면교사로 삼을 점을 생각하느라 깊숙이 들어가기가 쉽지 않은데 이 책은 첫 페이지만 보고도 이미 알았다. 이건 자연인의 내가 나올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그 독서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참고든 뭐든 다음 단계로 나갈 수 없다.


*

보통은 책을 다 읽은 뒤 좋은 문장들을 갈무리하기 위해 그때그때 페이지를 기록해두지만, 이번에는 그러기 위해 잠깐 멈출 수도 없이 빠져들어 페이지를 넘겼다. 끝에서 두 번째 꼭지, 그러니까 <흑갱> 꼭지를 읽으며 어, 어, 어, 하던 것이 <세 번째 여행의 끝>에서 확인되었을 때는 대책 없이 울고 있었고 그제야 이 문장들을 남겨둬야 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것들을 옮겨 적으며 또 울고 만다.


*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이야기였고, 책과 함께한 그 시간이 이토록 소중하게 느껴지는 경험은 정말 오랜만이다. 어디서 이런 분을 알게 되었을까. 담당자가 어디든 꼭 후기를 써주시면 좋겠다.


*

이 책을 추천하기 위해서라도 누군가 요새 잘 읽은 책 없는지 물어봐주길 기다리게 된다.

온통 쌀이었다. 내 20여 년 인생에서 쌀과 관련되지 않는 건 없었다. 실험실 동료는 모두 쌀을 연구했다. 여기저기 놓인 논문, 책, 실험 기기 모두 쌀이 주인공이었다. 실험실 주변이나 밖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실험실에 속한 논과 온실과 창고와 배양기에, 벼로건 쌀로건 여러 모습으로 내 주변에 있었다. 하루 24시간, 1년 내내, 어느 때라도 나를 반겼다. 가족이나 친구보다도 훨씬 더 자주 그리고 오래 나는 쌀과 만났다.
실험실에서 쌀은 주인공이고 나는 쌀의 팬이었다. - P142

그렇다면 세 번째 여행이 무슨 소용인가. 벼를 연구하지 않는 벼 연구자의 실험실 이야기가 무슨 의미인가. 나와 달리 여전히 벼를 연구하고 있는 동료들에게 경외감을 가지고 그들의 건투를 빌면서도 속으로는 질투하고 있는 내가 벼에 대해 글을 쓰는 게 옳은가. 여행은 거기서 멈췄다. - P157

제법 긴 시간을 보낸 뒤에야 다시 글을 썼다. 고민은 글을 쓰고 일을 하며 해결됐다. 내 인생의 시간의 주인은 벼인 줄 알았는데. 바로 나였다. 새로운 분야를 배우고 연구하는 게 쉽진 않았다. 그래도 생각보단 훨씬 재미났다. 벼 실험실에서 쌓은 지식과 경험이 미생물, 동물 연구에 아이디어를 주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당장 필요한 연구를 하는, 기업이라는 곳의 속성도 잘 맞았다. 도움이 되고 싶었던 마음. 처음 실험실을 동경했을 때의 마음이다. 그제야 세 번째 여행을 다시 출발할 수 있었다. - P158

5년 만에 다시 만난 지도교수님께 현재 어떤 연구를 하고 있는지 설명할 때 다시 심란해지긴 했다. 혹시 나에게 실망하시진 않을까. 그러나 교수님은 재미나 보인다고, 내가 자랑스럽다고, 나를 격려해주셨다. 무력감에 허우적대며 울던 학생 시절의 나에게 그러셨듯이.
세 번째 여행으로 확실해졌다. 지금의 나는 대전과 수원, 이타카와 데이비스의 실험실을 거쳐 만들어졌다. 내 과거에는 힘이 있다. 그 힘으로 나는 또 다른 실험실 여행을 시작해보려 한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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