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통제와 맥주 한잔의 자유 - 치유와 자유의 경계에서 쓴 불온한 질병 서사
김도미 지음 / 동아시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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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든든한 지지자가 있어도 혼자 겪어야 하는 일이 반드시 있다. 사건을 회고하는 일 또한 마찬가지다. 보호자는 병자의 고통을 볼 수는 있지만 느낄 수는 없다. 상상된 고통은 죄책감으로 변한다. 병자는 보호자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 미안하고, 보호자는 아픈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미안하다. - P303

평화를 깨뜨린 원인이 질병이고 병자라는 점에서 병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사람들과 나누기 어렵다. 긍정의 힘을 확인하고 생존의 기쁨을 나누는 함박웃음의 뒤편에서, 의미 있게 공유되지 못한 시간은 뚜껑 덮인 맨홀처럼 덩그러니 남는다. 그것이 생존 후에 병자를 찾아오는 고통인지도 모른다. - P303

이제 와 문득 돌아보니 삶 자체가 우연으로 가득 차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사고는 정말 아무런 전조 없이 찾아온다. 질병의 인구학적 특성이라든가, 그것의 사회적인 원인을 제외하면 병자가 되는 것도 사고와 크게 다르지 않다. 통계는 통계일 뿐 치료에 따르는 후유증과 예후 중에서 나의 일로 예측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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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부장의 수첩 - 일기들 민음사 탐구 시리즈 11
최수근 지음 / 민음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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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에 읽었는데 이제야 갈무리해둔다. 올해 읽은 책 중 가장 좋았다. 출근길 버스에서 읽다가 내릴 정류장에 도착하면 끊기 싫어서 회사 건물까지 걸어가면서 읽고 사무실이 있는 6층까지 계단으로 올라가면서 읽었다. 그러고 나서도 한 달 내내 마음속 한편에 이 책의 자리를 두고 있는 듯했다. 알라딘 100자평 중 "남의 일기 몇 장 읽고 그의 됨됨이나 성정을 미루어 짐작하는 것이 저의 구린 면들 중 하나이지만 이분의 일기를 읽으면 존엄한 인간이 무언지 알 것만 같아집니다."가 곧 내 마음이다. 그리고 내가 쓰고 싶은 일기 또한 이런 것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노조를 설립하고, 지부장 자리를 맡기로 하고, 일기를 쓰고, 그것을 책으로 내기까지 개입된 모든 결정에 감사하게 된다.

나를 진심으로 위해서 하신 말씀이라고 믿지만 귀담아듣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지부장 임기 후에 나는 사람들에게서 버림받았다고 느낄지도 모를 일이다. 슬프다. - P36

나는 P의 제안이 타당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동시에, 무언가 타당하다는 감각이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도 여긴다. 사울 알린스키는 "사안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일수록 당위를 논한다."라고 지적했다. 무엇이 옳은지를 말하는 것은 쉽지만 실제로 그 길을 걸어가고 그 일을 되게 하는 사람은 당위를 넘어선 결단을 내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동조합 지부장으로서 나는 조합원들의 노동 조건을 개선할 수도, 악화시킬 수도 있는 당사자다. 당위도 중요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 P64

아, 저렇게 생각하는구나. 하지만 당신은 저희가 미워하고 자시고 할 만한 상대가 못 됩니다, 피해 의식은 스스로 해결하세요. 못되게 말하고 싶다가 참는다. 그럴 리가요, 미워하지 않습니다. 사실이 그렇다. - P82

점점 쇠약해 가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볼 때, 성장해 가는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지 못하고 지내는 부모처럼, 두 분의 소중한 시기를 놓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더구나 나는 이 소중한 시기에 엉뚱하게 노동조합 같은 것에 마음이 팔려 있다. 불안하고 부끄럽다. - P114

협상 과정에서 나 자신이 떳떳한 위치에 있다는 느낌, 누구에게든 당당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느낌이 나에게는 우월감을 준다. 하지만 현실은 그에 걸맞게 개선되지 않을 것이고, 나의 노동 가치를 깎아내리려 애쓰는 사람들을 앞으로 오래 만나게 될 것이라 이 우월감이 힘이 될지 짐이 될지 모르겠다. - P137

조직의 대표자로서 이처럼 나와 다른 입장을 묵살하고 나의 의견을 명문화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과 통쾌함을 동시에 느낀다.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는 해당 사안에 대해 조합원 투표를 거칠 수도 있지만 나는 그러지 않기로 한다. 내가 결정을 하고, 사후에 비난을 받기로 한다. - P158

그러니 이 결과는 승리라고 선제적으로 선언하고 자축하며 서로를 칭찬하고, 아쉬운 점은 앞으로의 투쟁에 맡기며 그때의 진전을 위해 계속 단결하자고 설득해야 한다. 이번 교섭은 너무 길었고, 어느새 다음 교섭을 준비할 때다. - P200

분회장님은 유난히 환멸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환멸은 그저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꿈이나 기대가 꺾여 괴롭고 만사를 등지고 싶어지는 마음‘을 가리킨다. 노동조합 일을 하는 동안 숱하게 환멸을 느끼셨으리라. 그 마음을 어떻게 감당하고들 사시는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 P203

나는 사무실에 혼자 앉아 다시 한번 협약서를 검토한다. 조항 하나하나가 영광이기도 하고 실패이기도 해서 읽어 가는 마음이 복잡했다.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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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자의 사전
구구.서해인 지음 / 유유히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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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 두 리스트가 일목요연하다는 게 그 사람이 일을 깔끔하게 처리해낸다는 뜻은 아니다.
투 두 리스트가 예쁘다는 게 그 사람이 일을 아름답게 한다는 뜻도 아니다. - P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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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난 일을 하면 어떻게든 굴러간다 - 작은 회사가 지속 가능하게 일하는 법
미시마 쿠니히로 지음, 박동섭 옮김 / 유유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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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회사원으로서 단행본 편집자 일을 하는 것은 매우 힘듭니다. 도무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괴로움, 냉엄함을 두 군데 출판사에서 겪고 뼛속 깊이 깨달았습니다. 어떻게 하든 책 만드는 일은 힘든 일이라는 것, 게다가 앞으로는 책을 편집하는 일만으로는 살아남이 못한다는 것, 영업과 경영 등 모든 일을 해야 한다는 것. 내리막길을 점점 굴러 내려가고 있는 듯한 업계에서 말이죠. 그래서 적어도 매일 일을 하는 동안에는 ‘명랑‘하게 지내자고 생각했습니다. - P45

일이란 막상 겪어보면 생각보다 괜찮은 법입니다. - P71

종이 인쇄물과 디지털 데이터의 차이는 여기에 집약되는 것 같습니다. 무섭다는 것요. 일단 인쇄를 해 버리면 두 번 다시 없던 일로 할 수 없다는 공포. 물론 데이터라고 해도 로그인이나 다운로드 기록이 남긴 합니다만, 표면적으로는 바로 수정할 수 있습니다. 이 안이함이 긴장감과 집중력을 잡아먹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작은 실수 하나가 치명상이 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신중에 신중을 기합니다. 본래 종이든 데이터든 일 그 자체에 외경심을 가집니다. 역으로 말하자면 ‘일‘이라고 하는 것은 이 마음을 가진 시점에서 시작되는 것이죠. 아, 아! - P76

경영 측면에서 말하면 너무, 자주, 사운을 걸면 안 되죠. 풍파를 일으키지 않고 묵묵히 매일매일 일과 마주해야 일을 괜찮게 할 수 있는 거죠. 잘 알고(는) 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는 작은 배니까요. 그럼에도 때로 대형선이 하는 항해(대량 부수)에 도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이런 대항해는 원해서 그렇게 되는 면과 흐름을 타다가 문득 자각해 보니 그렇게 되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 P102

작은 배로 대항해를 하려고 하면 리스크가 아주 커지는데, 그것은 피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이럴 때는 필연적으로 사운을 걸게 되죠. ‘팔리지 않는‘ 일이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배수진을 친 나날이 시작됩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입니다.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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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방문
장일호 지음 / 낮은산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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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를, 동생을 버리지 않았냐고, 따지듯 물었던 날도 있었다. 정말 궁금했다. 한 사람의 삶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희생되어도 좋은지.
나는 여전히 궁금했다. 엄마의 스물일곱을 내가 방해하고 어쩌면 훼손했다는 생각이 들 때면 견디기 힘들었다. - P17

하지만 이 ‘지식인‘ 세계에 진입했을 때 나는 그들과 되도록 최대한 비슷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게 가난을 이해하고 싶은 게 아니라 벗어나고 싶은 것이었음을 그제야 알았다. 새로운 세계에서 좌불안석하면서도 나는 안도했다. 물론 나는 지금도 가난으로 인해 어딘가 부서지고 망가진 내면이 언젠가는 사고를 치고 말 것이라고 긍긍한다. - P69

내 마음에는 할머니 무덤도 있고, 아빠 무덤도 있고, 종현의 무덤도 있다. 살아 있는 일은 마음에 그렇게 몇 번이고 무덤을 만드는 일임을, 슬픔은 그 모든 일을 대표하는 감정이되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이제는 안다. - P84

많은 일이 일어나지만 제대로 한 일은 없는 긴 하루들의 반복 속에서 나는 자주 일을 좋아하는 건 역시 조금 슬프고 쓸쓸하다고 여긴다. - P114

염색공예 작가 유뇌 사미로는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그림은 죽었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충격이었습니다. 그럼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건 묘지에서 하는 운동회 같은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묘지에서 하는 운동회‘라는 유노키의 말에 밑줄을 그으며 내가 하는 일도 꼭 그와 같다고 생각했다. 잡지야말로 ‘죽어 가는 종이‘에 가까운 것 아닐까 생각하면서. - P163

많은 사람이 단언한다. 언젠가는 종이 매체가 사라질 거라고.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다짐한다. 그 시대의 안과 밖을 잘 쓸고 닦다가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초 단위로 기사가 쏟아지는 시대에 나는 뒷북이나 다름없어 보일 때도 있는 주간지의 느린 박자가 좋았다. 사수는 단독 기사의 의미를 몇 번이고 다시 짚어 줬다. 제일 처음 쓰는 것도 의미 있지만, 마지막까지 쓰는 것도 단독만큼이나 중요하다고. - P163

다짐이 아니라 결과로 증명되는 쓸모란 얼마나 무서운가. 일을 잘하고 싶다는 바람과 잘할 수 없을 거라는 낙담은 단짝이라, 내가 나인 게 싫어지는 시간만 성실했다. - P203

어떤 직업을 좋은 일, 필요한 일로 만드는 힘과 책임은 그 직업군에 속한 사람에게도 있다. 내가 하는 일을 뒤에 오는 사람에게 권할 수 있으려면 내가 선 땅이 좋아지도록 부지런히 일궈야 한다. 저 짧은 두 문장을 자신 있게 건네려면 그만큼 스스로를 담금질해야 한다. 일의 조건과 환경을 바꾸는 일을 게을리해서도 안 된다. - P209

선배들은 선배가 베푼 것은 선배에게 갚으려 하지 말고 후배에게 갚으라고 당부하곤 했다. 나는 선배들을 통해 마음은 정확하게 셈해 갚는 게 아니라 흐르는 것임을 배웠다. 고마워하되 미안해하지 않고, 받은 마음을 아직 서툰 타인을 위해 내어 주는 법도 함께 익혔다. -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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