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라이프 1
한야 야나기하라 지음, 권진아 옮김 / 시공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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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은 자기실현의 시대다. 인생에서 가장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닌 일에 눌러앉는다는 것은 의지박약에, 고결하지 않은 선택이다. 언제부터인가 운명 같은 것에 굴복한다는 것이 고상한 게 아니라 비겁함의 징표가 됐다. (67)

그는 대학의 객이었고, 대학원의 객이었으며, 이제 뉴욕의 객, 아름답고 돈 많은 사람들의 삶 속에 들어온 객이었다. 그런 것들이 타고난 자기 몫인 척하려고 애쓰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자기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73)

근본적으로, 가장 부끄러운 점은 이것이었다. 섹스에 대한 빈약한 이해도, 불충스러운 인종적 관점도, 부모님으로부터 독립을 못 한다거나 돈을 못 번다거나 자율적 존재로 행동하지 못하는 무능력도 아니었다. 밤에 그와 동료들이 사무실에 앉아 모두 각자의 야심찬 꿈의 건축물에 깊이 몰두해 있을 때, 다들 있을 법하지 않은 건물들을 스케치하고 계획하고 있을 때,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무언가를 상상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매일 밤, 다른 사람들이 창조하고 있을 때, 그는 모방을 했다. 여행하면서 본 건물들, 다른 사람들이 꿈꾸고 건설한 건물들, 자기가 살았거나 들어가본 건물들을 그렸다. 이미 만들어진 건물들, 개선할 생각조차 없이 그저 흉내만 내면서 다시, 또다시 만들었다. 그는 스물여덟 살이었고, 상상력은 사라졌고, 모방꾼이었다. (100-101)

그는 여전히 약점을 들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옹색한 깐깐함을 증명하는, 사람들 앞에서 애써 가장하고 있는 인간이 될 능력은 근본적으로 만회할 길 없이 부족하다는 걸 증명하는, 차고 넘치는 파일에 증거가 하나 더 보태진 것이다.
하지만—다른 수많은 일들과 마찬가지로—어쩔 도리가 없었다. 자기가 이 인기 없는 리스페너드 스트리트에서, 자신의 방공호 저장품에서, 학위나 직업과 똑같은 만족과 안전함을 느낀다는 걸 누구에게 설명할 수 있겠나? 아니면 이렇게 부엌에 혼자 있는 순간들이 명상과도 같은 순간이라는 걸, 그와 세상, 그와 세상 사람들과의 모든 상호작용을 촉발하는 사실과 진실의 수천 개의 조그만 굴절과 오염들을 미리 계획하며 허우적허우적 전진하길 멈추고 정말로 편안히 휴식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라는 걸 누구에게 설명할 수 있겠나? 아무에게도, 심지어 윌럼에게도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몇 년에 걸쳐 자기 생각을 남에게 말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친구들과 달리 그는 자신과 타인을 구분하기 위해 자신의 기벽의 증거들을 공유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비록 친구들의 기벽을 공유하는 건 행복하고 뿌듯한 일이었지만.(131)

아무도 없다는 걸 그는 깨달았다. 방은 그의 것이었다. 마음속 짐승—홀쭉하고 꾀죄죄하고 여우원숭이처럼 반사신경이 뛰어나고, 미래의 위험에 대비해 늘 축축한 검은 눈으로 주위 풍경을 살피며 언제나 달아날 태세가 되어 이는 상상의 짐승—이 긴장을 풀고 바닥에 늘어졌다. 이런 순간이 그가 대학 생활에서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따뜻한 방 안에 있었고, 내일이면 세끼를 먹고 싶은 만큼 먹을 테고, 그사이에는 수업을 듣고, 그를 해친다거나 원하지 않는 일을 시킬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근처 어딘가에는 룸메이트들—친구들—이 있었고, 아무 비밀도 누설하지 않고 또 하루를 무사히 살아냈고, 과거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 사이에 또 하루를 더 집어넣었다. 그건 늘 잠잘 자격이 있는 성취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그는 세상에서 또 하루를 살아갈 준비를 하며 눈을 감고 잠들었다. (147-148)

"세상은 나를 잊어가네 / 수많은 시간을 낭비했던 세상이." 그 곡은 어느 예술가의 삶에 관한 내용이었지만, 그는 절대 예술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세상을 잊고, 세상에서 벗어난다는 것, 다른 장소, 조용하고 안전한 어딘가로 사라진다는 개념, 탈출하고 싶으면서도 발견되고 싶은 뒤얽힌 갈망을 거의 본원적으로 이해했다. (164)

하지만 아무리 많이 원하고 아무리 많이 갈망해도, 그는 여전히 해럴드를 친구로 생각하기가 조심스러웠다. 때로는 두 사람 사이를 희망적으로 부풀리면서 친하다고 상상하고 있는 게 아닌지 걱정됐다. (중략) 그래도 늘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다. 이번 달이 끝일 거야, 그는 혼자 되뇌었다. 그리고 그달 말이 되면 생각했다, 다음 달이야. 다음 달이면 나랑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을 거야. 그는 언제라도 준비된 자세로 있으려고 애썼다. 그게 틀렸다는 게 증명되기를 갈망하면서도, 실망에 대비해 마음의 준비를 하려고 했다. (195-196)

"주드에게." 해럴드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됐다. "(필요없긴 해도) 아름다운 편지 고맙게 받았다. 그 편지에 쓰인 모든 말들 다 고맙다. 네 말이 맞아. 그 머그는 내겐 정말 소중한 거야. 하지만 너는 더 소중해. 그러니 더 이상 자기를 고문하지 마라.
내가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면, 이 모든 사고가 인생 일반에 대한 은유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물건들은 깨지고, 때로는 수리되고, 대부분의 경우엔 어떤 게 망가지더라도 삶이 스스로 변화하면서 그 상실을 보상해주지. 때로는 아주 근사한 방식으로 말이야.
사실, 어쩌면 나도 결국 그런 종류의 사람인지 몰라.
사랑을 담아, 해럴드." (199)

하지만 네가 그러고 있을 동안, 주드는 나를 봤어. 그때 주드의 표정이라니. 그 순간이 아니고서는 아직도 그 표정을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 내 안에서 뭔가가, 마치 너무 높이 쌓아 올린 축축한 모래탑처럼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어. 주드를 위해, 너를 위해, 나를 위해서도. 주드의 얼굴을 보며 난 나도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으리라는 걸 알았어. 다른 사람을 위해 그런 걸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우아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의 표정을! 주드를 봤을 때, 난 제이컵이 죽은 후 처음으로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는 말의 의미를, 뭔가가 가슴을 찢어놓을 수 있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했어. 늘 지나치게 감상적인 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순간 나는 그게 감상적일지는 몰라도 진실이라는 걸 깨달았지.
그때 알았던 것 같아. (234-235)

훗날 그는 그 일을 일종의 지레받침대,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관계 사이의 경첩 같은 걸로 돌이켜보곤 했다. 제이비와의 우정은 물론이고 윌럼과의 우정에 대해. 20대의 어느 순간, 친구들을 보고 있으면 너무도 순수하고 깊은 만족감이 들어서, 모든 것이 평형을 이루고 친구들에 대한 그의 애정도 완벽한 그 순간에서 누구도 움직이지 않아도 되도록 그 주위 세상이 그냥 멈춰버렸으면 하는 때들이 있었다. 하지마 한 박자 후에는 모든 게 움직이고, 그 순간은 고요히 사라져버린다.
이 일 이후 제이비가 그의 마음속에서 차지하는 자리가 영원히 줄어들었다고 말하면 너무 과장 같고, 너무 최종적인 느낌이 들 것이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믿게 된 사람들이 언젠가는 어떤 식으로든 그를 배신할지도 모른다는 걸 이해하게 됐고, 실망스럽긴 하지만 그런 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그래도 인생은 쉼 없이 나간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그를 실망시킨 사람이 나타날 때마다 적어도 절대 그러지 않을 사람이 하나는 있었기 때문이다. (262)

해럴드를 믿을 수 있을까? 가장 어려운 건 지식을 찾는 게 아니야. 예전에 그가 하느님을 믿기가 어렵다는 고백을 했을 때 루크 수사는 그에게 말했다. 가장 어려운 건 그걸 믿는 거야. (294)

지금은 모르고 있지만, 앞으로 그는 해럴드가 공언한 애정을 시험하고 또 시험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한결같은지 보려고 약속을 저버리게 될 것이다. 자기가 그러고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는 그렇게 할 것이다. 마음 한구석에서 절대 해럴드와 줄리아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러고 싶어도, 아무리 그렇다고 생각해도 그는 그러지 못하고 결국엔 그들이 그에게 지칠 거라고 늘 확신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시험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관계가 결국 끝나고 나면 그걸 돌이켜보면서 자기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을, 그뿐만 아니라 그 원인이 된 구체적 사건도 확실히 알게 될 테니까. 그러면 그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뭘 더 잘할 수 있을지 다시는 궁금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미래의 일이다. 지금 그의 행복은 완전무결하다. (310)

"그리고 대학에 갔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내 친구가 되어주기로 결심한 사람들을 만났어. 그 친구들이 내게 가르쳐줬어. 정말이지 모든 것을. 그 친구들이 나를 만들었고, 진짜 나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고 있어.
지금은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 내가 보기에, 우정의 오랜 요령은 너보다 더 나은 사람들—더 똑똑하다거나 멋진 사람들이 아니라 더 친절하고 더 아량 있고 더 관대한 사람들—을 찾는 거야. 그리고 그 친구들이 네게 가르쳐주는 것들에 감사하고, 친구들이 너에 대해 말해주는 것들, 아무리 나쁜—혹은 좋은—말이라도 경청하려고 하고, 그들을 믿으려고 노력하는 거지. 그게 제일 힘든 일이야. 하지만 가장 좋은 일이기도 해." (311-312)

하지만 사실은 둘 다 왜 그런 파티에 계속 다니는지 알고 있었다. 그 파티들이 네 사람이 함께할 수 있는 얼마 없는 기회였기 때문이고, 때로는 네 사람이 함께 나눌 수 있는 추억을 만들 수 있는, 다 꺼지다시피 한 모닥불에 불쏘시개 더미를 떨어뜨려 우정을 계속 살려놓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건 모든 게 다 그대로인 척하는 그들만의 방식이었다. (327-328)

최근 그는 상호의존성이 그렇게 나쁜 것인가 생각했다. 그는 친구들과의 우정이 좋았다. 그리고 그게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상호의존적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인가? 스물일곱일 때는 훌륭한 일이 서른일곱에는 왜 소름 끼치는 일이 된단 말인가? 왜 우정이 친족관계보다 못하단 말인가? 왜 심지어 더 낫지 않단 말인가? 그건 두 사람이 섹스나 육체적 끌림이나 돈이나 아이들이나 재산이 아니라 오로지 계속 같이 가자는 공동의 동의, 결코 성문화할 수 없는 결합에 대한 상호 간의 헌신에 의해 묶여 날마다 계속 함께 있는 것이다. 우정은 상대방의 더딘 불행을, 길고 긴 지루함을, 간간이 찾아오는 승리를 목격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가장 비참한 순간들에 함께 있을 수 있는 특권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그 대신 자기도 그 사람 옆에서 비참한 모습을 보여도 되는 것이다. (332-333)

‘널 못 믿어서가 아니야.’ 그는 결코 이런 대화를 나누지 않을 윌럼에게 말한다. ‘내 진짜 모습을 네게 보여주는 걸 참을 수가 없어서야.’ 이제 노인이 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자, 그는 여전히 그린 스트리트에 혼자 있다. 그리고 그런 종잡을 수 없는 상상 속에서 윌럼은 녹음이 우거진 어딘가—애디론댁 산맥, 버크셔 지방—에 위치한 집에서 산다. 그는 행복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고, 아마도 1년에 몇 번은 그린 스트리트에 있는 그에게 놀러 오고, 그러면 그들은 오후 시간을 함께 보낸다. 이런 꿈에서 그는 늘 앉아 있어서 자기가 걸을 수 있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윌럼을 보면 늘 기뻐하고, 헤어질 때면 혼자서도 잘 알아서 할 수 있다고, 걱정 말라고, 그에게 감사기도라도 하듯 확신을 준다. 자기의 필요와 외로움과 소망으로 윌럼의 목가를 망치지 않을 기운이 있다는 게 그는 기쁘다. (379)

다음 날 일찍 일어났을 때, 그는 아직 소파에 있었고, 텔레비전은 꺼져 있었고, 몸에는 아직 이불이 덮여 있었다. 주드는 반대쪽에서 쿠션을 끌어안고 잠들어 있었다. 그는 자기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내놓으려 하지 않는, 내밀하고 비밀이 많은 주드의 방식에 마음 한구석 늘 모욕감을 느꼈지만, 그 순간만은 그저 감사와 경탄의 마음뿐이었다. 그는 옆의 의자에서 너무나 그리고 싶었던 얼굴을, 볼 때마다 그 복잡한 색감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물감을 섞었는지 떠올리게 되는 그 오묘한 색깔의 머리를 곰곰이 들여다봤다. (405)

공집합의 공리는 영0의 공리입니다. 그것은 무(무 한자)라는 개념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영이라는 개념이 분명히 있다고 말합니다. 무가치, 무항목. 수학은 무라는 개념이 있다고 가정하지만, 그것이 증명되었습니까? 아니요.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좀 철학적이 되어보자면—오늘 우리 기분은 그렇습니다—우린 삶 자체가 공집합의 공리라고 말할 수 있죠. 삶은 영으로 시작해서 영으로 끝납니다. 두 상태가 존재한다는 건 알지만, 두 경험 다 의식하지는 못하죠. 비록 삶으로서 경험될 수는 없지만, 두 상태는 삶에 필요한 부분들입니다. 우리는 무의 개념을 가정하지만,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래서 저는 월터가 죽은 것이 아니라 직접 공집합의 공리를 증명했다고, 영의 개념을 증명했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다른 그 무엇도 그를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없으리라는 걸 전 압니다. 고매한 정신은 고매한 끝을 바라고, 월터는 가장 고매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싶습니다. 그가 너무나 사랑했던 공리의 답을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421)

전에 이런 일을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우정을 끝낸다는 게 얼마나 느리고 슬프고 어려운 일인지 전혀 몰랐다. (429)

침묵은 보호책으로 시작됐지만, 세월이 가는 사이 거의 억압적인 것, 그가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조종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나가고 싶어도 나가는 길을 찾을 수가 없다. 두꺼운 얼음벽과 천장과 바닥으로 사방이 둘러싸인 조그만 물방울 안에 떠 있는 상상을 한다. 출구가 있다는 건 알지만, 그에겐 장비가 없다. 작업을 시작할 도구도 없어서, 그는 손으로 속절없이 매끄러운 얼음 표면을 할퀸다. 자기가 누군지 말하지 않으면, 더 바람직하고 덜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말하지 않은 것들로 인해 그는 이상한 사람, 동정, 심지어 의심의 대상이 된다. (438)

그는 사람을 사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고, 그런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 친구들의 연인을 부러워해본 적도 없었다. 그건 고양이가 개 울음소리를 탐내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부러워한다는 생각마저 들지 않는 일이다.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라는 종족에게는 그냥 이질적인 일이니까. 하지만 최근 사람들은 마치 그게 그가 가질 수 있는 일인 것처럼, 원해야 하는 일인 것처럼 행동했고, 그게 어느 정도는 애정에서 나온 말이라는 걸 아는데도 마치 조롱처럼 느껴진다. 그건 그에게 10종경기 선수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처럼 똑같이 무디고 잔인한 말이다.
누군가 자기에게 명령하고, 그의 결정들에 실망하고, 그에게 기대를 갖고, 그를 소유하는 책임을 떠맡을 정도로 관심을 가진다는 건 감동적인 일이다. (443)

너무 외로워서 때로는 육체적으로 느껴진다. 축축하고 더러운 빨랫감이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것 같다. 이 느낌을 알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마치 원한다는 결정이 그 과정에서 가장 힘든 부분인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그는 그 이상을 안다. 누군가와 사귄다는 건 자신을 보여줘야 하는 것인데, 그는 이제까지 앤디를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자신을 보여준 적 없다. 그건 적어도 10년은 옷을 벗고 본 적 없는 자기 육체와의 대면을 의미할 것이다. (447)

하지만 그와 그의 친구들은 아이가 없고, 그 부재 속에서 세상은 그들 앞에 마구잡이로 펼쳐진다. 그 수많은 가능성에 숨이 막힐 정도다. 아이들이 없으면, 성인으로서의 지위는 절대 튼튼하지 않다. 아이 없는 어른은 혼자서 성인기를 창조하고, 그건 종종 유쾌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영원히 불안정한 상태, 영원한 회의의 상태이기도 하다. (452)

그는 자기가 얼마나 둔하고 조심스러운 사람인지 잘 알고 있고, 그 둔감함과 경계심 덕분에 어떤 공간에서도, 어떤 모임에서도 가장 흥미롭거나 도발적이거나 반짝거리는 사람이 될 일은 절대 없겠지만, 그래도 그 덕에 지금까지 안전하게, 불결함과 더러움으로부터 자유로운 성인기를 보냈다. 하지만 때로는 자신을 너무 격리시킨 나머지 인간으로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무시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는 누구와 함께 있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시간이 충분히 지나서 이제는 다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가 틀리고 윌럼이 맞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게 그에게 영원히 금지된 경험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는 자기 생각보다 덜 역겨울지도 모른다. 어쩌면 정말로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결국 상처를 안 받을 수도 있다. (461)

윌럼에게 정상이라는 걸 증명할 필요가 정말로 그를 더 정상으로 만드는 것 같았다. 절대로, 언제까지나 자기에게 상처 주지 않을 사람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고, 그는 마음을 진정하고 잠들 수 있었다. 하지만 감사하는 마음이 들수록 스스로가, 자신의 의존성이, 자신의 약함이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그의 요구에는 끝이 없단 말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난 세월 동안 그를 도와줬으며, 왜 도와줬나? 왜 그는 그걸 허락했나? (566-567)

그는 윌럼이 의자에 기대앉아 그를 쳐다보며, 한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물을 수 있어야 하는, 하지만 절대 질문을 허락받지 못했던 수백 가지 질문들 중 무엇을 고를 건지 고심하는 모습을 봤다. 그러자 눈물이 고였다. 자기가 이 우정을 이렇게 치우치게 만들어서, 그가 달아날 때도, 근원을 밝힐 수 없는 문제들로 도움을 요청할 때도 한 해 또 한 해 윌럼이 너무나 오랫동안 그의 옆을 지켜줘서 눈물이 났다. 새 인생에서는 친구들에게 덜 요구하겠다고, 더 베풀겠다고 그는 다짐했다. 친구들이 무엇을 원하든 줄 것이다. 윌럼이 정보를 원하면 받게 될 거고, 그 정보를 어떻게 줄지 궁리하는 건 그에게 달린 일이다. 그는 상처 받고 또 상처 받겠지만—모두가 그렇다—노력하려면, 살아 있으려면, 더 강해져야 했다, 준비해야 했다, 이게 삶이라는 거래의 일부라는 걸 받아들여야만 했다. (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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