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구멍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44
켄 폴릿 지음, 김이선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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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이라는 렌즈를 장착한, 아니, 페미니즘 덕분에 개안한 이후로는 고전이라 칭송받는 수많은 작품들에 반기를 들게 된다. 예를 들어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사랑하면 성폭력해도 됩니까? 심지어 그걸 추억으로 미화하다니요? 여자를 도구로 쓰는 작품은 이밖에도 차고 넘쳐서 일일이 대자면 입만 아프다. 인류 보편의 가치를 담고 있기에 지금까지 살아남아 널리 향유되는 것이 고전이라는데, 여자도 인간이라는 놀라운(!) 발견 이후에는 수많은 작품이 우수수 쓰러져가는 것이다 . . . . .


미스터리 장르로 범위를 좁히면 살아남는 작품이 더더욱 적은데, <바늘구멍>은 스파이 스릴러라는 장르적 쾌감을 아낌없이 주면서도 벡델 테스트를 가뿐히 통과하는 반갑고도 고마운(고마워해야 한다는 현실이 슬프나) 작품이다. 심지어 여자가 주인공! 루시는 연합군의 '포티튜드 작전'을 저지하려는 독일 스파이와 사랑에 빠졌다가 이후 진상을 깨닫고 그와 정면으로 대립하는데, 남편과의 관계에서도 아주 당당하고 주체적이다. 강인한 여성 주인공이 부각된다는 점은 출간 40주년 기념 서문에서도 작가가 직접 한마디. 


루시는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변하고 있던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다. 나는 그 변화를 좋아하지만 그래서 그녀를 영웅으로 내세운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이라기보다 문학적인 이유였다. 두 남자가 끝까지 싸우는 책은 적어도 백 권은 읽은 반면 영웅적인 여성과 강인하고 사악한 남성이 격렬하게 충돌하는 이야기는 그때껏 본 적이 없었다. 그 흥미진진하고 매혹적인 아이디어가 마음에 쏙 들어 나는 어린 자식을 둔 젊은 여성을 만들어냈다.


당시로서는 전례가 없는 파격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남성 편향적인 작품이 주를 이루는 오늘날의 스파이 스릴러와 견주어봐도 확연히 다르다. 다행히 그런 설정을 훌륭하게 풀어낸 덕분에 <바늘구멍>은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었고, 그것을 발판으로 전업작가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고, 그렇게 나온 <대지의 기둥>이나 <거인들의 몰락> <세계의 겨울> <영원의 끝> 등등 최근 작품들에서도 매번 진취적인 여성 캐릭터가 나오고 있으니 실로 아주 잘 뿌린 좋은 씨앗이었던 셈. 


그렇다고 해서 이 작가에게 남성 팬이 없는가? 전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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