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키즈의 생애 - 안은별 인터뷰집
안은별 지음 / 코난북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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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지금까지 해온 선택의 결과이지만, 그것은 ‘총합‘이라기보다는 ‘가능성‘을 제거하는 ‘감산‘에 가까운 법이다. (27)

‘n포 세대‘가 청년 세대의 지배적인 표상이 되고 n의 가짓수는 늘어가는 상황에서, 그래도 어떤 사람들은 경제적 안정이나 내 집 마련을 성취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원래 가족‘으로부터 ‘자기 가족‘으로의 전환을 완수한다. 물론 경제적으로는 그러한 삶을 충분히 살 수 있지만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성애-가부장제-가족주의의 틀 안에서 물리적인 보금자리를 포함한 ‘새로운 가정‘을 구축한 전자의 경우에만 한국 사회에서 진정한 독립, 어른 됨으로 인정된다. 그 ‘진정한 독립‘이야말로 대개 부모로부터의 지원이나 증여를 수반한다는 아이러니를 안은 채 말이다. (27)

근처 시립도서관에 자전거 타고 가서 일곱 시간 공부하고 돌아오곤 했는데, 그게 정말 평화롭고 모든 걸 다 잊을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남자 친구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거 외에는 사람도 하나도 안 만나고, 라디오에 정 주면서 새벽까지 듣곤 했어요. 그리고 디트 시험에는 생물 파트 비중이 큰데, 그 생물학이 주는 본질적인 아름다움, 그런 데서 행복을 느꼈던 것 같아요. (51)

어떤 사람을 가장 잘 알려면 함께 고생을 해봐야 한다는 말이 있다. 힘든 순간에 나오는 성격이 그 사람의 인격이라는 둥. 하지만 그런 궁지에 몰린 상황은 일시적인 예외일 뿐이라는 반대의 의견에 더 동의한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냉정하게 판단할 여력이 있을 때, 그때의 모습을 그 사람의 진실에 가깝게 봐주는 게 온당하지 않을까.
하지만 동시에, 한 사람의 역사 속에서, 힘들어서 아무거나 붙잡고 싶을 때의 감정과 모습과 행위들도 진짜이며, 그걸 벗어난 상태에서 ‘지금의 나라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겠지‘라고 약간은 후회하는 모습도 진짜라고 생각한다. 모든 감정은 진짜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라는 말은 변명이 아니라 진실에 가깝다. 김마리 씨의 일에 대한 생각은 첫 번째 인터뷰와 두 번째 인터뷰에서 크게 달랐지만, 어떤 모순 없이(혹은 모순이 있기 때문에) 그의 리얼리티를 보여준다. (59)

사이비 종교, 사기 범죄의 유혹은 이미 약해져 있는 사람들을 노린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어떤 종류의 위험이 잘 실감나지 않는다면, 과장되어 있다고 느낀다면, 그만큼 자신이 어떤 속성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는 사실도 함께 느껴야 할 것이다. (62)

"근데 사실 생각해보니까 ‘먹다보니 라지두판‘ 시절 이야기를 꺼내는 건 우리 가족 사이에서 지금껏 암묵적으로 금기시된 일이었다. 확실히 그건 가게 이름만큼 장난스럽거나 재미있었던 일은 절대로 아니니까. 그때는 모두가 힘들었던 만큼 서로 손톱을 세우고 상처를 주고받은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김재욱은 픽션 화자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자영업에 뛰어들었다가 실패를 경험한 베이비붐 세대 이야기를 클리셰지만, 그런 전형성 뒤에는 이렇게 대체될 수 없는 하나하나의 고유한 상처가 있었을 것이다. (95)

좀 교활한 얘기를 하나 하자면, 한국에선 제가 게이라는 거 말고는 소수자인 점이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삶에서 내 입장을 대변함으로써 의미 있는 일을 하고자 할 때, 그 점이 아니라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래서 한국에서 뭔가를 할 때는 제가 게이라는 것을 중추에 두게 될 텐데, 반대로 미국에서는 제가 한국인이라는 점을 가지고 뭔가를 할 것 같아요. 제가 한국인이라는 점이 저를 얼마나 만들었는지를 간과할 수 없고, 전 저를 만들어온 것들을 이용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면서 그것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거든요. ‘한국 사회가 나를 만들었다‘라고 한다면, ‘만들었기 때문에 만든 대로 갈 것이다‘에서 최대한 벗어나게 행동하고 싶은 거죠. 그렇게 하려면 한국이 나를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그것보다 똑똑한 방식으로 행동해야 되는 거잖아요. 그냥 ‘안 할래, 안 할래‘ 이렇게 해서 되는 건 아니죠. 전 그렇게 팔짱 끼지 않고 이 사회가 날 만들었다는 점을 최대한 이해하고 이용해서 그것에 대한 변화를 제 일로 삼는 거, 그런 게 하고 싶어요. (223-224)

4년제 대학 교육을 받고 안정적인 공직에 맞벌이로 종사하는, 학생 운동은 하지 않았지만 정치적으론 어느 정도 진보적인 스탠스를 가진, 아마도 자가를 소유한 도시 중산층. 인터뷰이에게 들은 약간의 추측을 조합해 그린 두 사람의 윤곽이다. ‘개인주의 성향‘도 영향을 주었겠지만 무엇보다 안정적인 경제력과 자녀가 없다는 변수는, 홍스시 씨를 아무런 보호망도 없는 극단적인 환경으로 내몰거나 예민한 시기의 감정적인 갈등이 너무 심해지진 않도록 보호해줄 수 있었다. 이 보호자-피보호자 관계는 다소 건조하지만 그 건조함 때문에 서로를 조금도 부식시키지 않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248)

"저는 늘 광주와 반목했다가 조금 화해했다가를 반복하며 살아왔습니다." (282)

개인에게 성장은 자신을 지켜보는 관객이 있느냐 그리고 어떤 관객을 두느냐에 크게 좌우된다. (298)

지난 시간은 선명하게 떠오르지만, 제 것 같지 않습니다. 기억을 소유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쓸쓸한 마음에 곰곰 따져봅니다. 다른 사람들은 과거와 현재를 자연스레 하나로 통합해 시간을 엮어가고 있을까요? 기억들은 매순간 무한히 갈라지기만 할 뿐, 저에게 돌아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한편, 위안하기도 합니다. 과거는 지나갔으니 저를 볼 수도, 해할 수도 없다고. (373)

인터뷰를 돌아보니, 각 시기마다 주위 상황도 많이 변했고 삶에 대한 제 해석도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시간과 기억에 대해 다르게 생각해볼 수 있겠네요. 한 발 내딛을 때마다 다른 풍경으로 옮겨가지만 지금 이 자리는 제가 디뎌온 걸음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시간이 흘러가고 또 축적된다는 의미를 처음으로 제대로 느낀 한 해였습니다. 미래를 그릴 때 현재를 그대로 연장하는 대신, 여지를 많이 두는 힘을 기르고 싶습니다. (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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