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전공에 대해 고백해야 하는 순간은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굳이 ‘고백’이라는 거창한 말이 동원될 만큼 어떤 결의 같은 것이 필요한 나는, 무늬만 사학도였다. 어렸을 때부터 재미있는 이야기라면 사족을 못 쓰던 나는 아마 역사학 수업에서 파란만장하고 깊은 서사를 기대했던 것 같다. 하지만 웬걸, 그 세계로 진입하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재미없는 이론, 숙지해두어야 할 여러 사실(史實), 수치와 통계. 사람의 흔적 없이 어딘가 무채색의 과학에 가까워 보였던 그 문턱을 넘지 못하고 대학시절 내내 교양만 열심히 쌓았다.


그래서 『거인들의 몰락』으로 시작되는 이 시리즈를 맡게 되었을 때는 지레 걱정이 앞섰던 것이 사실이다. 본격 역사소설이라니, 재미없으면 어쩌지. 그리고 그 우려는…… 몇 페이지 읽기도 전에 불식되었다. 이거 정말 진진한 드라마잖아! ‘인류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하고 폭력적인 세기’를 그리며 켄 폴릿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하나하나의 인간에 집중한다. 앞선 두 권에서 양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얽히고설킨 다섯 가족은 이제 세번째 세대가 전면에 등장하고, 공민권운동, 쿠바 미사일 위기, 베트남전쟁, 워터게이트 등 굵직한 사건을 목격하는 각계각층의 수많은 캐릭터는 이상적인 사회뿐 아니라 자신의 꿈과 사랑을 위해 고뇌하고 때로는 좌절을 맛보며, 단순한 역사의 전달자가 아닌 피와 살을 지닌 인간으로 시종 생생히 살아 움직인다. 


이야기는 20세기의 가장 상징적인 순간인 베를린장벽 붕괴를 조명하며 한 시대의 막을 내리고, 훗날 이번 세기의 가장 극적인 장면으로 손꼽힐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취임 연설로 끝을 맺는다. 이름만 사학과 학생이었던 2008년 당시 영상을 찾아보면서 ‘와, 멋있다’ 하는 막연한 감상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던 나도, 미국의 인종평등을 위해 평생을 바쳤던 한 주인공이 TV 중계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대목에서는 별수없이 울어버리고 말았다. 그 순간의 묵직한 감동은 아마 온몸으로 백 년의 세월을 살아낸 그들과 함께 치열하게 고민하고 울고 웃었던 시간들이 쌓인 결과일 테다. 그리고 이 3대에 걸친 가족들의 이야기가 내게 그랬듯, 이 장대한 서사시는 누구에게나 역사란 원래 이렇게 재미있는 거라는, 온기가 도는 인간들의 드라마라는 사실을 일깨워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