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구판절판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어머니는 엄청나게 긴 주삿바늘을 심장에 꽂아야만 했다. 우리 세 남매는 울기만 했다. 어머니 몸에 그 정도 바늘이 꽂히는 것도 두 눈 뜨고 못 보는 우리 남매가 어머니 없이 어떻게 지낸단 말인가. 얼마나 울었을까? 어머니의 상태는 조금씩 호전되고 있었다. 어머니는 차츰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우리를 세상으로 불러준 당신의 아기집과 영영 헤어지는 일을 모두 끝마쳤다.-22쪽

정말 여름다운 여름이었다. 햇살을 받은 이파리들은 초록색 그늘을 우리 머리 위에 드리웠고 바람에 따라 그 그늘이 조금씩 자리를 바꿨다. 금방이라도 초록색 물이 떨어질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나무 그늘 아래를 달리면서 나는 "열무와 나의 두번째 여름이다"라고 혼자 말해봤다.-25쪽

사랑은 물과 같은 것인가. 그 큰사랑이 내리 내리 아래로만 흘러간다. 그런 줄도 모르기 때문에 아이들은 자라 집을 떠나고 어린 새들은 날개를 퍼덕여 날아가는 것이다. -29쪽

집이 있어 아이들은 떠날 수 있고 어미 새가 있어 어린 새들은 날갯짓을 배운다. 내가 바다를 건너는 수고를 한 번이라도 했다면 그건 아버지가 이미 바다를 건너왔기 때문이다. 나도 이제 열무를 위해 먼저 바다를 건너는 방법을 배워야겠다. 물론 어렵겠지만.-31쪽

그나마 삶이 마음에 드는 것은, 첫째 모든 것은 어쨌든 지나간다는 것, 둘째 한 번 지나가면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것. -34쪽

아마도 같은 해 봄이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내게 전화를 걸어 소설가 김소진 선배가 암으로 죽었으니 문상가자고 말했다. '절대로 가면 안돼!'라는 문장이 온몸으로 육박해왔다. 왜 가면 안되는데?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 그 느낌에 반항하듯 나는 장례식장을 찾아 책 날개에 실린 사진을 확대해놓은 영정에 두 번 절한 뒤,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며칠간 앓았다. 소설이 뭔데? 청춘이 뭔데? 다 귀찮아졌다. 지긋지긋했다. 남은 평생 소설 따위는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진관에 가서 증명사진을 찍은 뒤, 문방구에서 이력서 용지를 사와서 여기저기 취직원서를 냈다. 그리고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일산에서 장충동까지 매일 왕복 세 시간의, 여행에 가까운 출퇴근을 했다. 버스에 서서 창 밖을 내다보노라면 때로 김소진 선배의 영정이 떠올랐다. 겨울 버스, 빼곡히 들어찬 사람들의 입김이 어린 뿌연 유리창 위로 미끄러지는 한 줄기 물방울 흔적 사이로 청춘은 영영 빠져나갔다.-41-42쪽

다른 어떤 동물도 죽을 줄 아는 길로 걸어가지 않는데, 왜 사람만은 그게 자기를 파멸시키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눈을 찌르는 것일까? -49쪽

큰 얘기에만 관심을 두던 20대가 지나고 나니 삶의 한쪽 귀퉁에 남은 주름이나 흔적이 보이기 시작한다. 대다수 사람들은 그 주름이나 흔적처럼 살아가다가 사라진다. 머리로는 그걸 이해하지만, 마음으로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니 책을 읽다가 문득문득 목이 메는 구차한 짓을 되풀이하는 셈이다.-51쪽

완전히 소진되고 나서도 조금 더 소진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내가 누구인지 증명해주는 일,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일, 견디면서 동시에 누릴 수 있는 일, 그런 일을 하고 싶었다. -67쪽

내게 천냔 동은 없지만, 내게는 반드시 쓸, 하늘이 내린 재주만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황영조 마을 앞 해변에서 하늘에 박힌 별들을 바라보던 그날 저녁, 나는 내가 오만으로 똘똘 뭉친, 그러나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젊은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나는 하늘이 낸 사람도 아니고, 한꺼번에 3백 잔을 들이켤 수 있는 사람도 아니다. 더없이 아픈 일이지만, 나는 그 누구도 아닌 내가 먼저 나 자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84쪽

우리 삶이란 눈 구경하기 힘든 남쪽 지방에 내리는 폭설 같은 것. 누구도 삶의 날씨는 예보하지는 못합니다. 그건 당신과 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잠시 가까이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나면 우리는 아마 다른 유형의 인간으로 바뀔 것입니다. 서로 멀리, 우리는 살아갈 것입니다.-97쪽

사방팔방 하늘과 땅 위에 그 무엇도 없었다. 정말 무시무시한 공허였다. 그 공허 속으로 나란 욕구와 들어가면 안된다는 생각이 함께 들었다. 나는 결국 그 환희에 찬 공허를 거부하고 부대로 돌아왔다. -124쪽

나는 참 많이도 흘러 내려왔구나. 항상 삶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오래 지속되는구나. 스무 살, 그 무렵에 나는 '이제 그만 바라보자/저렇게 멀리서 반짝이는 섬들을'이라는 내용의 시를 썼지만, 이제는 그렇게 멀리서 바라보는 빛이, 마치 새로 짠 스웨터처럼, 얼마나 따뜻한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 것 같아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인다. 이따금 마음에서 울리는 그 소리를 들으며 가만가만.-125-126쪽

본디 나는 내가 경험하는 세계의 바깥에 무엇이 있는지 잘 모르는 종류의 인간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건 내가 경험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뜻이었다. 뭔가에 빠진다면 그건 내 안에 들어온 그 뭔가에 빠져든다는 뜻이었다. 그런 까닭에 나는 소통의 인간이 될 수 없었다. 전적으로 내 경험의 공간 안에서 모든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도, 증오도, 행복도, 슬픔도, 모두 내 세계 안쪽 창에 맺히는 물방울 같은 것이었다.
그러다가 제대하면서 나는 소통이 과연 어떤 것인지 여실하게 느낄 수 있게 됐다. 그러니까 한 여자애와 헤어지면서 그 어마어마했던 나만의 세계가 완전히 무너져내린 것이다. 나는 내 세계 안쪽 창에 맺힌 슬픔만으로는 부족했다. 비로소 나는 그 바깥의 슬픔에까지도 눈을 놀리게 됐다. -139쪽

내 나이 스물한 살에 만화방에서 밤을 지새며 불법복제한 일본만화를 윤문하다가 잠들어서는 기소중지자를 사냥하고 다니는 형사에게 신분증을 제출하기 위해 잠을 설치는 따위의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삶이란 내가 원한다고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150쪽

그로부터 6년 정도가 지난 뒤의 일이었던 것 같다. 문인들이 모이는 어느 술자리에 갔다가 나는 '너는 이제 끝났어'라는 말을 들을 지경이 됐다. 그 무례한 말에 있는 힘껏 항변했지만, 그건 내가 정말 끝난 것인지도 모르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니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때 그 스님의 말이 생각났다. 10년이라고 했다. 아직 한 4년은 더 남아 있었다. (……) 10년 전 그 스님은 농담하느라 내게 그런 얘기를 했던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가장 어려울 때, 내게는 그 얘기가 있었다. 고마웠다. 어려워 당장 그만둬야 했을 때, 스님은 내게 4년을 더 준 셈이니까. -180-181쪽

김시습이 맞닥뜨린, 어둡고 어두울 정도로 어두운 밤은 아니었지만 중학교 2학년 시절 나도 어둡고 어두운 어둠을 본 적이 있었다. 그 어둠을 보지 못했더라면 나는 아주 하찮은 조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어둠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면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제 몸으로 어둠을 지나오지 않으면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어둡고 어두울 정도로 가장 깊은 어둠을 겪지 않으면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그건 중학교 2학년생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수업이었지만, 또 내 평생 잊히지 않는 수업이기도 했다.-201-202쪽

봄빛이 짙어지면 이슬이 무거워지는구나. 그렇구나. 이슬이 무거워 난초 이파리 지그시 고개를 수그리는구나. 누구도 그걸 막을 사람은 없구나. 삶이란 그런 것이구나. 그래서 어른들은 돌아가시고 아이들은 자라는구나.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까 온 곳을 하염없이 쳐다보는 것이구나. 울어도 좋고, 서러워해도 좋지만, 다시 돌아가겠다고 말해서는 안되는 게 삶이로구나. -24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