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상대와 익숙한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미리 짜맞춘 연극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맞장구칠 호흡과 웃을 타이밍이 정해져 있는 대화에서 말을 했다고 할 수 있는 걸까. 말을 들었다고 할 수 있는 걸까. _조련사와 돌고래는 친할까요. _친하겠지. _말이 통하지 않는데 친할까요. _말로 사귀지 않으니 친하겠지. _그저 먹이를 따르는 것 아닐까요. 먹이를 주지 않으면 떠나지 않을까요. 조련사들을 돌고래들에게 먹이를 주느라 분주했다. _굶어죽지 않기 위해 떠난다고 해도 그전의 일들이 전부 거짓이 되는 건 아니겠지. _아무것도 아니었던 게 될걸요. _아무것도 아니었던 게 될 거라고 해서 아무것도 아니었던 건 아니겠지. _그럴까요. 쇼가 끝나자마자 건물에서 빠져나왔다. 건물 밖은 비가 그치고 해가 나서 다른 세상이 되어 있었다.-20-21쪽
가위바위보. 나는 가위를 냈다. 그도 가위를 냈다. _비겼네. 그는 싱긋 웃었다. _에이 싱거워. _싱겁다, 싱거워. _어떤 소원 생각했어요? _하루 종일 같이 있어줘. 손목이 화끈거렸다. 드라큘라의 손이 매웠다. _네 소원은? _같은 거. 우리는 비긴 김에 서로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37쪽
관을 만들고 싶어졌다. 누구를 위한 건지는 모르지만 좋은 관을 만들고 싶었다. 쓸모가 없다고 해도 할 수 없다.-66쪽
_왜 말하지 않았지. 드라큘라가 말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나를 만나러 온 게 아니었다. 나와 있고 싶어서 머무른 게 아니었다. 그저 지나가던 중이었다고 왜 미리 말해주지 않았을까. 두번째였다. 동물원에서도 그랬다. 그가 하지 않았던 말 한마디가 우리가 나눴던 모든 말들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지나간 시간은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나는 너에게 무엇이었나. 민구를 내내 원망했다. 내가 했던 말들은 그냥 말이었다. 순간순간 나오는 대로 흘려보냈던 무의미한 소리들이었다. 그때에 우리는 서로가 필요했다. 나는 민구 곁에 있고 싶었다. 민구도 그랬다. 말보다 더 분명한 것들이 있었다. 마주 보며 웃는 순간들은 진짜였다. 그런 순간들을 내가 내뱉은 허황된 말들을 이유로 깨뜨리려는 민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말들을 무시하지 못하는 민구를 경멸했다. 그러나 이제는 알 것 같았다. -98쪽
그를 보자마자 나갔어야 했다. 나는 미적거리다가 그만 시비를 걸고 말았다. 누가 더 비겁한지, 비겁했었는지에 대해서. 누가 더 비참한지, 비참해지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미라가 뒷마당 벤치에서 일어나자 드라큘라는 황급히 방에서 나갔다.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이 초라했다. 드라큘라는 도망쳤다. 나도 그랬다. 속이 텅 비었다.-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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