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투 치는 고양이
이화경 지음 / 뿔(웅진) / 2011년 2월
품절


학교, 히읗과 기역이 들어가는 단어, 학교. 당연히 나는 학교가 싫었고, 기역과 시옷이 가시처럼 박혀 있는 교실이 무서웠다. 수업 중간에 배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조퇴를 하거나 그도 아니면 아예 교문 앞에서 등을 돌리기도 했다. 바깥으로는 볼품없고 안으로는 한없이 절망적인 날들이 흘러갔다. -16쪽

"묵을 것이 읎냐? 그라믄 바풍초똥팔삼 순으로다가 내놓으믄 된다." 쥐고 있는 화투 패와 바닥에 깔린 화투 패를 연신 들여다보며 고민하고 있는 내게 그가 말했다. 마치 내가 뒤고 있는 화투 패들을 투시하고 있는 듯했다. 먹을 게 없어 내놓을 것이 마땅치 아니할 때에는 비풍초똥팔삼과 같은 버려도 아깝지 않을 것을 던지는 것도 일종의 대책이 되며, 삶에는 우선순위가 있다는 심오한 비유를, 그때 나는 조금 알게 되었다.-22쪽

쥐 고기를 먹고 집으로 돌아온 뒤, 나는 손가락을 목구멍 깊숙이 집어넣어 토하기 시작했다. 몇 번을 토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처음에는 덩클거리는 쥐 고기가, 나중에는 누리끼리한 위액까지 쏟아져 나왔음에도 가슴뼈 아래 오목한 곳이 답답하고 아팠다. 다시 손가락을 집어넣어 남아 있는 쥐 고기를 파내기 시작했다. 쥐의 꼬리를 물고 가슴속 울혈이, 또 하나의 꼬리를 잡고 화병(火病)이, 슬픔이, 분노가, 및이, 국민교육헌장이, 순국선열이, 호국 영령이 줄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32쪽

쥐를 먹은 고양이답게, 5학년 열두 살 계집애는,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발톱은 세울 줄 알게 되었다. 말수는 없어도 더듬지는 않았다. 할아버지는 그 뒤로도 목숨을 이어 한 세기를 꽉 채우고 황천길에 오르셨다. 군용 담요를 깔고 화투 놀음을 하던 쪽마루는 어린 내 마음에 그들먹하게 차오르던 치욕과 부끄러움과 쓸쓸함과 분노의 쳇바퀴로부터 빠져나오게 해주었던 진정한 법당 마루였던 셈이다.-32쪽

삶의 밑바닥까지 가본 내가 관계의 환상을 가지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었소. 환상이 없으므로 무엇에도, 누구에게도, 잘 속지 않는다고 스스로에게 되뇌면서 지금까지 지내왔소. 껄끄럽고, 눅눅하고, 축축하고, 어두컴컴한 바닥에 뒹구는 자가 모두 참혹한 것만은 아닐 거요. 진창에 구를 때의 이중적인 감정, 뜻밖에 그 바닥에서조차 자신을 끌어올리는, 저열하기조차 한 어떤 힘을 느끼는 것이오. 하지만 불안이 없는 것은 아니오. 견고한 것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불안,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에 의해 생성되는 불안. 그것은 환상 없는 사람만이 치러야 할 대가 지불인 것이오.-99쪽

인간의 내면을 골똘히 들여다보면 악마나 짐승밖에 없다고 한 사람은 니체였다지요, 아마. 이상하게도 내면의 악마나 짐승을 보는 때, 그 추함을 보고 진저리를 치는 때, 오직 그때만이 비로소 내가 살아 있다는 것과 스스로가 얼마나 섬뜩한 존재인지를 발견하게 된다오.
그러한 경험, 참담함, 그런 것마저, 그 참담함에 대한 기억마저 스러지는 때, 아주 절망스러운 위기감이 드오. 뭐랄까. 스스로가 마모되어 가는 것 같은 위기감이라고나 할까. 그 날카롭게 쑤셔대던 감정들이 어느 사이에 스러져 아주 건조하고 팍팍하다는 생각이 들면 자신을 뭍들고 있던 과거로부터 놓여나는 해방감과 자유로움은 잠시뿐이고, 다시 모든 게 아주 막막해지오. 어쩌면 그때 가장 두려운 것은 그런 것이었을 것이오. 자신의 내면에서 추한 수성을 발견하는 게 아니라, 차라리, 그 참혹함 속에서, 그 자기 모멸감 속에서, 아주 엉뚱한 쾌감이 느껴지는 것. 맹렬한 적개심, 우월감, 자기 확인, 그리고 그것을 인정받고 싶어하는 유치한 현시욕, 그러면서 잊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이런 감정들이 뒤죽박죽이 되면서 다시 자기 모멸감에 빠져드는 것이 가장 힘들다고 할 수 있소.-110-111쪽

욕망은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작동하는가가 핵심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운명도.-137쪽

남자는 약하다. 그리고 지금 어느 때보다 더 약하다. 약하기 때문에 악한 것이라고 린은 생각했다. 약해질수록 더 강해지려고 노력하는 남자들을 린은 숱하게 봐왔다. 남자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린이 보기에 남자는 더 강해지기보다는 미쳐가고 있는 중이었다. 허술한 남자의 눈빛은 상대의 인정을 갈망하며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고 파멸로 가는 지점에서 자기를 버려달라고 단호하게 말했던 남자는 사실 버림을 받을까 봐 불안해하고 있었다. -158쪽

린이 보기에 남자는 아버지를 증오하면서도 사랑하고 있었다. 남자는 아버지 없이 살기로 결심하며 처절하게 투쟁하며 자기를 세우려고 했지만, 아버지 없이는 단 한순간도 자기를 규명하지 못했다. 린이 그랬던 것처럼 남자는 아버지를 버리면서, 매순간 아버지를 취하고 있었다. 린이 그랬듯이 남자는 아버지를 매순간 죽이면서, 수시로 복원했다. 린처럼 남자는 아버지 없이 살지 못하고, 아버지 없이 죽지 못했다. 린처럼 남자에게 아버지는 마약이자 구원이고, 하나님이자 악마이며, 현실이자 망상이며, 중독과 갈망의 대상이었다. 남자의 실존의 구멍을 메우고 있는 아버지.-161쪽

린은 집에 돌아와 휴대폰을 껐다. 마치 캄캄한 세상에 들어가기 위해 켰던 촐불을 나온 뒤에는 훅, 불어 꺼버리듯. 세상과의 마찰과 접속을 끝내고, 린은 온전히 자신만의 시간 속으로 들어갔다. -165쪽

그 시절, 나는 병에 도취되어 있었다. -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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