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자가 태어나기 몇 년 전에 도시에선 세계 최초로 ‘어린이날’을 선포하여 몇 백 개의 소년 단체를 만들었다고 하나, 두자에게 어린이라는 말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외래어와 같았다. 두자는 단 한 번도 어린이인 적이 없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마땅히 일을 하여 살림을 불리고 한 살 어린 남동생을 보살펴야만 하는 어른이자 일꾼이었다.-17쪽
큰언니는 시집가기 전날 밤 걸레를 입에 물고 ‘엄마’란 말을 안으로 삼키며 꺽꺽 울었다. 두자는 언니가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영영 떠난다는 게 너무 슬프고 무서워 같이 울었다. 언니가 엄마를 부르듯 저도 엄마를 불러보고 싶었지만 두자 입에선 언니 울지 마, 언니 가지 마, 나도 데려가 언니, 소리만 줄줄 새어나왔다.-20쪽
할머니는 장수가 태어났을 때처럼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집안에 학자가 났다고 자랑을 해댔다. 두자는 장수가 흙바닥에 써놓은 글자에 걸레 빤 물을 뿌렸다가 할머니에게 나가 죽으란 욕을 일주일 내내 들었다.-24쪽
서쪽 하늘 언저리에 깊게 여윈 달이 박혀 있었다. 영영 겨울이 오지 않으면 좋겠다. 아직 따뜻한 손을 수줍게 흔들면서 두자는 생각했다. 늘 가을이면 좋겠다. 계속. 계속. 매일. 매일. 아무도 떠나지 못하게 시간이 그만 멈춰버렸으면 좋겠다. -27쪽
근데. 두자가 머릿수건을 고쳐 쓰며 물었다. 엄마는 이름이 뭐요? 새엄마는 오래전에 죽은 조상 이름 떠올리듯 기억의 사다리를 느릿느릿, 한참이나 올라갔다. 새엄마가 제 이름을 쫓아 입술만 달싹이는 걸 보고 두자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 이름은 두잔디. 장두자. -32-33쪽
새엄마는 괴성을 지르며 다짜고짜 괭이를 휘두르는 동시에,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지독한 저주를 폭포처럼 게워냈다. 아버지는 두 팔로 얼굴을 가리며 죽는 소리를 냈다. 검은 그림자로 뒤덮인 새엄마의 얼굴과 그 뒤로 타오르는 그을음이 두자의 온몸과 정신을 짓눌렀다. 귀신에 홀린 것 같은 새엄마의 모습이 무서웠지만, 한편으론 피가 거꾸로 치솟듯 흥분되었다. 두자는 떨리는 손으로 벌어지려는 입을 틀어막았다. 웃고 싶었다. 바닥에 너부러져 꿈쩍도 못하는 아버지를 내려다보며 통쾌하게 웃고 싶었다.-41쪽
……그럼 엄마는 좋소? 뭔 말이고. 서방 있고 자식 있고 남자 아는 엄마는 좋으나 이 말이오. 어데 좋아 사나. 새엄마가 두자의 말을 딱 자르며 대답했다. 그럼 여로 시집오기 전이 좋았소? 야야, 니는. 새엄마의 눈도 산 너머 노을로 향했다. 니는 지금이 좋은갑제. 술 취한 아버지가 사립문을 열고 비틀거리며 들어왔다. 새엄마가 거세게 맷돌을 돌리며 씹어뱉듯 말했다. 내는 단 한 번도 좋아 산 적이 읎다.-44-45쪽
니 아부지가 그랬는디. 새엄마가 목을 쭉 뽑으며 말했다. 니가 니 엄마를 젤 마이 닮았다 그랬다. 니 언니들보다 니가. 내사 보질 못해 모르겠다만. 니는 그거 알았나? 알고 살았나? 두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내도 엄마 얼굴은 모르니깐요. 새엄마가 낮게 혀를 찼다. 내는 엄마를 내 엄마라 생각하고 살았니더. 우리가 닮은 구석은 하나 없다케도.-48쪽
안 가고 뭐하노. 어여 가라. 새엄마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깊고 시꺼먼 낭떠러지로 떠밀리는 것만 같은데, 한 번 떨어진 발은 제 뜻과 상관없이 한 걸음, 두 걸음, 저절로 움직여 남자 뒤를 따르고 있었다. 살면서 새엄마와 가장 많은 말을 나누었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같이 밥하고 나물 캐고 바느질하고 밭 일구면서, 별 의미 없는 대화라도, 두자와 새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많은 마음을 나누었다. 그 사소한 말들의 무게가 두자의 어깨를 짓누르고 발목을 붙잡았다. 두자야. 새엄마가 낮은 소리로 두자를 불렀다. 또박또박, 두자라고 불렀다. 뒤를 돌아봤다. 잘 가래이. 가서 새 인생 살래이. 새엄마가 두 손을 꼭 잡은 채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 말을 듣자, 다시는 엄마를 못 볼 것만 같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엄마에게 무슨 말이라도 남기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고 비죽비죽, 지저분한 울음만 새어나왔다. -49-50쪽
아무도 자기의 생존을 기원하지 않았다는 사실. 그 사실 때문에 두자는 더 비참했다. 누군가를 위해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해본 적 없지만,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일하고 먹고 산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눈물이 났다. -86쪽
만석이를 품에 안았을 때. 그 아이가 수없이 내뱉던 옹알이. 숨소리. 그 아이의 침과 똥과 오줌. 죽은 자식을 생각할 때마다 혀를 깨물고 죽고 싶었다. 시어머니가 그 아이를 밤낮 끼고 살았다. 제 배를 빌려 나온 시어머니 아들 같았다. 시어머니처럼 유난스레 만석이를 예뻐하고 아끼진 못했지만, 마음만은 시어머니보다 더 애틋하고 뜨거웠다. 사랑을 표현하는 게 익숙지 않아 다만 먹여주고 재워주고 안아준 게 전부였지만, 바로 그게 자기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 표현이었다. 우리 만석이는 그걸 알까. 알고나 갔을까.-87쪽
두자는 울다 한숨 쉬다 훌쩍이길 반복하며 분녀를 따라 걸었다. 문득 제 인생이 간장 종지에 담긴 까만 간장처럼 여겨졌다. 좁은 세상에 갇혀 그 바깥은 꿈도 꾸지 못하고, 짜고 어둡고 독한 맛이 세상 전부인 줄 알고 살아야만 하는, 아무것도 예상할 수 없고 감히 어떤 다짐을 내세울 수도 없는 존재.-100쪽
뿌연 먼지 너머로 손을 흔드는 그녀가 얼핏얼핏, 오랫동안 보였다. 고맙다는 말도 못 했는데…….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창락골에 이르러서야, 사장 아내가 들어준 작은 보따리 속에 신문지로 겹겹이 싸인 꾸러미가 끼워져 있는 걸 발견했다. 보따리를 풀고 얌전하게 포개어진 신문지를 한 겹 한 겹 벗겨냈다. 하얀 설탕 두 봉지가 들어 있었다. -113쪽
살아 있는 게 반갑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죽고 싶지도 않았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원치 않는 상태. 오늘도 살았으니 내일도 살겠지. 눈뜨면 일할 것이고 배고프면 먹겠지. 숨소리처럼 떨어지지 않는 허기가 두자를 계속 살게 했다.-117-118쪽
자들, 누구 씨여? (……) 꽃씨요. 두자가 옷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내며 대꾸했다. 들에서 젤로 예쁜 꽃만 따다가 씨 털어 먹고 맹근 애들이요.-125쪽
쌍둥이는 서로의 입게 음식 넣어주는 놀이를 하며 놀았다. 음식은 금방 바닥났다. 두자는 아이들의 놀이를 더 보고 싶은 마음에 말린 옥수수 두어 개를 급히 쪘다. 쌍둥이는 뜨거운 옥수수를 호호 불며 낱알을 하나씩 떼어 서로의 입에 넣어주었다. 그 놀이에 끼고 싶어 두자도 입을 벌렸다. 두 아이가 동시에 낱알을 두자의 입에 넣었다. 입을 벌린 모습이 꼭 웃는 모습 같았다.-129쪽
귀뚜라미가 울었다. 검게 탄 팔에 소름이 와륵 돋았다. 두자는 몸을 떨며 고개를 흔들었다. 벗어나고 싶었다. 탁하고 더러운 연못에서 벗어나 깨끗한 물에 몸을 씻고 싶었다. 찬란한 햇살에 몸과 맘을 모두 말리고, 맑고 밝은 오솔길 따라 휘적휘적 끝없이, 걸어가고 싶었다.-132쪽
분녀의 편지엔 우는 여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을 보자 울컥 눈물이 났다. 아주 오랜만에 소리 내어 울었다. 쌍둥이가 두자 눈치를 보다가 따라 울었다. 둘 중 하나가 말했다. 엄마 울지 마. 엄마 잘못했어. 엄마 울지 마. 한 명이 그 말을 하자 다른 아이도 따라했다. 가르치지 않아도 말을 하고, 돌보지 않아도 자꾸만 자라는 그 아이들이 무섭고 버거워 두자는 더 큰 소리로 울었다. -137쪽
다음 생에는 진짜 꽃으로 나라. 아무도 못 꺾고 못 밟게 깊고 깊은 산속 꽃으로 나라. 성냥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나는 니들 옆 떡갈나무로 날 것잉께. 커다란 나무로 나서……. 건초에 불을 붙였다. 가볍게 일렁이던 불꽃이 단숨에 마른 것들을 집어삼키며 몸집을 불려나갔다.-140쪽
길이 나는 대로 걸었다. 걷지 않고 머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랬다간 굶어 죽을 게 뻔하니까. 가난을 피해 달리고 달렸지만, 결국엔 가난이 만든 길을 따라 걸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50-151쪽
너 그거 기억해. 남자들은, 특히 내 마음에 쏙 드는 남자들은, 처음엔 언제나 멋지고 다정한 법이야. 기억해. 처음이야. 처음에만 그런 거야. 봉선은 진지한 필체로 그렇게 썼다. 진지한 필체란, 볼펜을 아주 꼭꼭 눌러쓰는 것이다. 기억해라는 문장은 다른 문장보다 진하고 깊숙했다. 기억하나마나, 자기는 이미 결혼을 했으니 처음에라도 멋지고 다정한 남자를 만날 가능성은 아예 없다고 여겼으므로, 수선은 봉선의 편지를 볼 때마다 한 번씩 웃고 말았다. 그렇게도 수선을 웃게 하려고 봉선은 볼펜을 꾹꾹 눌러 남자 얘기를 쓰는 건지도 몰랐다. 자기 연애를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수선을 웃게 하려고.-209쪽
시간도 잠시 졸다 깨는 고요한 오후, 수선은 작은방 한가운데에 오도카니 앉아 있기를 즐겼다. 서서히 기우는 햇살이 서쪽 창으로 노랗게 비껴드는 방이었다. 가끔 윗집에 사는 아이가 우당탕탕 뛰어노는 소리도 들렸다. 장사치들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도 들렸다. 시끄럽지만 평화로운 소리였다. 그 방에서 봉선의 편지를 읽거나 두서없는 생각을 마구잡이로 하다가 선잠에 빠져들곤 했다. 꽃씨처럼 세상을 둥둥 떠다니는 꿈을 꿨다. 누구의 아내도 며느리도 딸도 아니고 수선이란 이름도 없이, 몸속엔 심장이나 내장이나 똥 대신 고운 봄바람만 가득 차서, 가고자 하는 곳도 가야만 하는 곳 없이, 되는 대로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꿈. 선잠에서 깨면 천장과 벽면의 모서리에 눈이 갔다. 서서히 자라나는 가느다란 균열과 누런 자국을 멍하니 쳐다보면서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다시금, 여기가 어디더라. 나는 누구더라. 지금이 언제더라. 거짓말처럼 까맣게 지워진 지난날의 광야를 길 잃은 여자처럼 헤매고 다녔다. -230-231쪽
엄마, 비 왔어? 엄마가 고개를 끄덕인다. 언제 왔어? 엄마는 대답 없이 내 손을 바짝 끌어당긴다. 물웅덩이에 한쪽 발이 빠져서 흰 샌들이 더러워진다. 발가락 사이사이 잔모래가 끼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삑삑 소리가 난다. 나는 물웅덩이 밟고 다니는 걸 아주 좋아했지만 엄마는 절대 못 그러게 했다. 나는 실수인 척 물웅덩이를 자꾸 밟는다. 엄마가 신경질을 낸다. 똑바로 보고 걸으라고 한다. 엄만 알았을까? 내가 일부러 물웅덩이에 빠져놓곤 실수인 척 연기한다는 걸,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256-257쪽
마루에 앉아 무청을 손질하다 깜빡 조는 할머니. 언성을 높이며 싸우다가도 사춘기 소녀처럼 요란하게 웃어대는 엄마들. 미안해, 동하야. 미안해. 동그란 밥상에 둘러앉아 따뜻한 밥을 먹는다. 파란 김. 열무김치. 참나물. 시래기된장국. 빨갛게 무친 도라지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고들빼기김치. 시원한 물 한 대접을 들이켜자, 몸 곳곳에 숨어 있던 수많은 새싹이 기지개를 켠다.-306-3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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