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품절


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는 않은 법이다.-11쪽

다만 우리는 애초에 우리 앞으로 결정지어진 것들이 아닌, 우리의 것들을 믿고 싶었을 뿐이었다.-19쪽

그 시절, 우리는 우리 자신이 닭장 같은 데 갇혀 있는 신세라고 생각했고, 그곳을 벗어나 우리의 인생으로 풀려날 날을 기다렸다. 그 순간이 오면, 우리 인생―과 시간 자체―의 속도는 빨라질 것이다. 우리의 인생이 상황을 막론하고 이미 시작돼버렸음을, 그래서 얼마간 득을 봤고, 또 얼마간 손해를 감수했음을 우리가 어찌 알 수 있었을까. 그런데다 닭장에서 풀려난다 한들, 처음엔 그 크기조차 가늠할 수 없는 더 큰 다른 닭장으로 결국 들어가게 될 텐데. -21쪽

그렇다, 당연히 우리는 허세덩어리였다. 달리 청춘이겠는가.-23쪽

인생에 문학 같은 결말은 없다는 것. 우리는 그것 또한 두려워했다. 우리 부모들을 보라. 그들이 문학의 소재가 된 적이 있었나? 기껏해야 진짜의, 진실된, 중요한 것들의 사회적 배경막의 일부로서 등장하는 구경꾼이나 방관자 정도라면 모르겠다. 그 중요한 것들이 무어냐고? 문학이 아우르는 모든 것이다. 사랑, 섹스, 윤리, 우정, 행복, 고통, 배반, 불륜, 선과 악, 영웅과 악당, 죄악과 순수, 야심, 권력, 정의, 혁명, 전쟁,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사회에 맞서는 개인, 성공과 실패, 살이나, 자살, 죽음, 신 같은 것들. 아, 외양간올빼미도 있군. 물론 다른 종류의 문학도 있다. 연극적이고, 자기반영적이고, 눈물을 자아내는 자전적인 문학. 하지만 그런 건 지루한 자위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문학은 주인공들의 행위와 사유를 통해 심리적이고, 정서적이고, 사회적인 진실을 드러내야 했다. 소설은 등장인물이 시간을 거쳐 형성되어가는 것이니까.-31쪽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 -34쪽

우리는 에이드리언의 관심을 받고 싶었고, 그의 인증을 받고 싶었다. 그의 환심을 사려 했고, 괜찮은 얘깃거리가 있으면 그에게 가장 먼저 털어놓았다. 각자가 그와 가장 친하다고,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각자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면서도 어찌된 일인지 에이드리언은 그러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여전히 우리 셋이 그의 가장 절친한 친구이며, 그가 우리에게 기대고 있다고 믿었다. 이는 그저 우리가 그에게 기대고 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서였을까? -38쪽

나는 한순간도 그녀가 책들을 다 읽진 않았을 거라고 의심하거나, 그것들이 소장가치가 있는 책일까를 두고 의문을 제기하진 않았다. 더 나아가서, 그 책들은 그녀의 마음과 성격의 유기적인 연장선인 듯 여겨졌다. 반면에 나의 책들은 나와는 기능적으로 분리된 것으로, 내가 장차 본받으려는 특성을 각인시키기 위해 압박을 가하고 있는 듯 느껴졌다. -46쪽

지금도 그렇듯, 그때도 나는 대부분을 착각했다. 예를 들어, 무슨 근거로 베로니카가 처녀가 분명하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녀에게 물어본 적도, 그녀가 내게 이야기해준 적도 없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한 건 그녀가 나랑 자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무슨 논리가 존재한단 말인가.-49쪽

우리의 티타임은 끝이 났다. 나는 남은 케이크 두 조각을 싸서 비스킷 깡통에 넣었다. 베로니카는 내 입가에, 그다음엔 중앙에, 마지막으로 왼쪽 입가에 입을 맞추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제 우리 관계의 끝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정말로 그랬던 것처럼 만들어버리기 위해 그런 식으로 기억하고, 그래서 비난을 면해보려는 걸까.-65쪽

나 혼자 강둑에 남아 있었다. 그 순간이 내게 가져다준 느낌을 나는 지금도 적절히 형용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것은―내가 그것들을 직접 봤다는 뜻은 아니지만―토네이도 같지도, 지진 같지도 않았다. 자연이 난폭하고 파괴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본문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67쪽

나는 살아남았다. '그는 살아남아 이야기를 전했다.' 후세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을까? 과거, 조 헌트 영감에게 내가 넉살좋게 단언한 것과 달리,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 아니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101쪽

나는 아무것도 기대할 입장이 못 됐다. 전 여자친구를 칭찬하는 말 같은 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상황을 막론하고 내가 원하지 않았다. 나는 다만 과거에서 벗어나길 바랐고, 그래서 묘한 거짓말을 한 나를 마거릿이 용서해주길 바랐다. 그녀는 그렇게 해주었다.-123쪽

어느새 나는 내 인생과 에이드리언의 인생을 비교하고 있었다. 윤리적 결정을 내리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능력에 대해, 자살을 감행한 정신적, 육체적 용기에 대해. 한 구절로 표현하자면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에이드리언은 자신의 삶을 책임졌고, 그것을 지휘했으며, 온전히 포착했다. 그리고 놓아주었다. 우리―살아남은 우리―중에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우리는 살면서 좌충우돌하고, 대책없이 삶과 맞닥뜨리면서 서서히 기억의 창고를 지어간다. 축적의 문제가 있지만, 에이드리한 것이 의미한 것과는 무관하게 다만 인생의 토대에 더하고 또 더할 뿐이다. 그리고 한 시인이 지적했듯, 더하는 것과 늘어나는 것은 아는 것이다.
나의 삶엔 늘어남이 있었을까, 아니면 단순한 더하기만 있었을까.-153쪽

시간이란…… 처음에는 멍석을 깔아줬다가 다음 순간 우리의 무릎을 꺾는다. 자신이 성숙했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저 무탈했을 뿐이었다. 자신이 책임감 있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다만 비겁했을 뿐이었다. 우리가 현실주의라 칭한 것은 결국 삶에 맞서기보다는 회피하는 법에 지나지 않았다.-162쪽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 -165쪽

나는 에이드리언에 대해 좀 더 생각해봤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는 언제나 우리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명철한 시각을 갖추었던 것으로 보였다. 우리가 호강에 받들려 무풍지대나 다름없는 사춘기를 허우적대며 우리의 타성적 불만이 인간 조건에 대한 본원적 반응이라 믿는 동안, 에이드리언은 이미 거기에서 벗어나 멀리, 넓게 앞을 조망하고 있었다. 그는 인생에 대해서도―애써 살아봤자 보람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을 때마저도, 어쩌면 그래서 더더욱―남들리 명징하게 받아들였다. 그에 비하면 나는 언제나 흐리멍덩했고, 인생이 내게 던져주는 얼마 되지도 않는 교훈에 대해 크게 깨달을 깜냥도 못 되었다. 내 식으로 말하면, 나는 삶의 현실에 안주했고, 삶의 불가항력에 복속했다. 만약 이렇다면 이렇게, 저렇다면 저렇게 하는 식으로 세월을 보냈다. 에이드리언 식으로 말하면 나는 삶을 포기했고, 삶을 시험해보는 것도 포기했고, 삶이 닥쳐오는 대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난생처음, 나는 내 온 인생에 대해 한결 총체적인―자기연민과 자기혐오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한―후회의 감정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살아온 어느 하루도 후회되지 않는 날이 없었다.-173쪽

평균치. 학교를 떠난 후 나란 인간은 줄곧 그랬다. 대학에서, 직장에서 평균치. 우정과 성실과 사랑에서 평균치. 섹스에서도 의심할 여지 없이 평균치였다. 몇 년 전 영국의 자동차 운전자들을 상대로 실시한 조사에서 설문에 참여한 운전자 구십오 퍼센트가 스스로 '평균 수준보다 양호한' 운전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 믿는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평균치의 법칙에 따르면, 우리는 불가항력적으로 평균치가 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이렇게 생각해봐도 마음은 결코 편해지지 않았다. 평균치란 말이 메아리쳐 울려퍼졌다. 평균치 인생. 평균치 진실. 평균치 윤리관.-174쪽

인성의 깊이와 세월의 흐름은 비례하는 걸까? 소설에선 물론 그렇다. 그렇지 않다면, 스토리라고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 인생에선 어떨지 가끔 궁금해질 때가 있다. 우리의 태도와 견해가 바뀌고, 새로운 습성과 기벽이 생기긴 하지만, 그건 뭔가 다른 것, 이를테면 장식에 가까운 것이다. 어쩌면 인성이란 다소 시간이 지나서, 즉 이십대에서 삼십대 사이에 정점에 이른다는 점만 빼면, 지성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 시기가 지나면 우리는 그때까지 쌓은 소양에 여지없이 고착되고 만다. 우리에겐 우리 자신뿐이다.-179쪽

날 원망하지 말기를, 날 좋게 기억해주기를. 세상 사람들이 날 좋아했다고, 날 사랑했다고, 내가 나쁜 놈이 아니었다고 말해주기를. 이중 해당되는 경우가 단 하나도 없다 한들, 부디. -187쪽

인생에 대해 내가 알았던 것은 무엇인가. 신중하기 그지없는 삶을 살았던 내가. 이긴 적도, 패배한 적도 없이, 다만 인생이 흘러가는 대로 살지 않았던가. 흔한 야심을 품었지만, 야심의 실체를 깨닫지도 못한 채 그것을 위해 섣불리 정착해버리지 않았던가. 상처받는 게 두려웠으면서도 생존력이라는 말로 둘러대지 않았던가. 고지서 납부를 하고, 가능한 한 모든 사람들과 무난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았을 뿐, 환희와 절망이라는 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소설에서나 구경한 게 전부인 인간으로 살아오지 않았던가. 자책을 해도 마음속 깊이 아파한 적은 한 번도 없지 않았던가. 이 모든 일이 따져봐야 할 일이었고, 그러는 동안 나는 흔치 않은 회한에 시달렸다. 그것은 상처받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쳤던 인간이 비로소 느끼게 된 고통, 그리고 바로 그랬기 때문에 느끼게 된 고통이었다.-2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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