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패단의 방문
제니퍼 이건 지음,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3월
장바구니담기


그녀와 코즈는 힘을 합쳐 이미 결말이 정해진 이야기를 써나가는 관계였다. 그녀는 괜찮아질 것이다. 더는 사람들의 물건을 훔치지 않게 될 것이고, 그녀를 이끌어주었던 음악과, 처음 뉴욕에 왔을 때 만난 친구들로 이루어진 인맥과, 커다란 신문지에 휘갈겨 써서 당시 살던 아파트 벽에 붙여놓았던 일련의 목표들을 다시금 소중히 여기게 될 것이다.-18쪽

코즈는 몇 번이나 배관공을 사샤의 아버지와 관련지으려 했었다. 그녀가 여섯 살 때 사라져버린 아버지였다. 사샤는 그런 논리에 혹하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기억 안 나는데요." 그녀는 말했다. "아버지에 대해선 할 말이 없어요." 그렇게 말한 건 코즈를 보호하기 위해서, 또 그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구원의 이야기를, 새 출발과 두번째 기회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쓰는 중이었다. 하지만 코즈가 말한 방향으로 가면 얻을 건 오로지 슬픔뿐이었다. -20쪽

알렉스와 함께 서 있던 순간 느꼈던 복잡 미묘한 감정은 코즈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 물건들에서 취했던 자존감을, 그것들을 훔쳤다는 것 때문에 느끼는 수치심에 오히려 고조되던 애정을. 그녀는 그 어떤 위험도 마다하지 않았고, 그 결과물이 여기 있는 것이었다. 그녀 삶의 원초적이고 뒤틀린 핵심.-31쪽

정적이 흘렀고, 그동안 사샤는 뒤에 있는 코즈가 기다리고 있음을 예민하게 의식했다. 그를 기쁘게 해줄 만한 대답이 간절했다. 가령 그게 전환점이 되었어요, 그러니까 이제 모든 게 전과 다르게 느껴져요, 라든가 리지한테 전화를 했고 마침내 화해했어요, 라든가 다시 하프를 연습해봤어요, 라든가 하다못해 난 바뀌고 있어요 난 바뀌고 있어요 난 바뀌고 있어요 난 바뀌었어요! 라고 말하고 싶었다. 구원, 변모―맙소사, 그녀가 얼마나 절실하게 원하는 것들인가? 매일매일, 매 순간순간. 우리 모두 마찬가지 아닌가?-35쪽

멘토로 삼았던 루 클라인이 기억났다. LA에 있는 그의 저택에서였다. 집 안에는 폭포가 있었고, 루가 늘 대동하고 다니는 어여쁜 여자들이 있었고, 앞마당에 그가 수집하는 자동차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때 베니는 자신의 우상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당신, 맛이 갔군. 향수에 잠기면 끝장이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루는 뇌졸중이 온 후 전신 마비로 고생하다가 석 달 전에 세상을 떠났다.-64쪽

"말도 안 돼요, 베니. 우린 서로가 필요한 사람들이잖아요." -66쪽

우리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냥 어둠 속에 나란히 누워 있다. 마침내 내가 입을 연다, 나한테 얘기했었어야지.
무슨 얘기? 조슬린이 묻는데, 정작 나도 그게 뭔지 모르겠다.-90쪽

이제 그는 소리내어 웃는다, 진짜 웃는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루와 내가 친구임을 깨닫는다. 비록 내가 그를 미워할지라도. 사실 그가 밉다.-94쪽

얼마간 그녀는 아무 낙이 없는 삶을 살 것이다. 지긋지긋하게 울어대는 딸들에게 시달리면서 그녀는 이 아프리카 여행이 아직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고 자유롭고 걸림돌이 없었던,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행복했던 순간이었다고 생각하며 간절히 그리워할 것이다. 그리고 의미 없이, 부질없이 앨버트를 그리면서 때만 되면 그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만약 3호실로 찾아갔을 때 그가 반농담조로 제안한 대로 함께 도망쳤다면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상념에 잠길 것이다. 물론, 훗날 그녀는 ‘앨버트’가 자신의 철없음과 참담한 선택에 대한 회한이 투영된 초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129쪽

끝났어. 모든 게 지나가버렸어, 나만 빼놓고. 그 시절 나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는 걸 잊은 적이 없었는데. 아니면 재미있는 일은 이제부터 시작되는 걸까?-135쪽

그리고 롤프의 작은 침실에서 그 일이 일어났을 때, 줄무늬 그림자 사이로 슬며시 비쳐들어온 햇빛 아래서 나는 처음인 양 굴었다. 롤프는 내 눈을 들여다보았고, 나는 내가 여전히 평범할 수 있다고 느꼈다.-139쪽

그들은 젊었고 운이 좋았고 강했다―그들이 걱정할 게 뭐가 있었겠는가?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되돌아가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201쪽

가슴을 치는 후회가 너무도 커서 처음엔 도무지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사샤에게 매달렸더라면 너는 그때 바로 정상이 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신이 네게 던져준 단 한 번의 기회를 포기했으니, 이젠 돌이킬 수 없다. -287쪽

"누구나 살아남는 건 아냐. 하지만 우린 살아남았어. 그렇지?"
"그래."
그녀는 네 옆에 나란히 누워 있었고, 네 몸 구석구석이 그녀와 맞닿았다. 그녀가 드루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수없이 많은 밤에 그랬던 것처럼. 사샤의 강인함이 네 피부 속으로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다. 너는 그녀를 안으려고 했지만, 손이 박제된 동물의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내 말은 이제 두 번 다시 그러면 안 된다는 뜻이야," 사샤가 말했다. "다시는. 다시는. 다시는. 다시는. 약속하는 거지, 보비?"-294쪽

테드는 멀찍이서 그 모든 것이 차츰 사샤 본인의 속성으로 자리 잡아가는 것을 경악하며 비켜봐왔다. 테드는 미시건 호에 있는 베스와 앤디 부부의 집에서 보냈던 여름엔 사샤가 사랑스럽고, 심지어 요염하기까지 한 꼬마였었다고 기억했다. 그러나 그후 크리스마스나 추수감사절에 가끔 보면 조카는 죽상을 한 아이가 되어 있었고, 테드는 행여 자기 자식들이 스스로를 제물로 던지는 조카에게 물들까봐 같이 못 놀게 했다. 사샤와는 어떻게든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애는 가망이 없었다. -311쪽

그는 조카의 어린 자식들이 사방에 던져놓은 잡동사니를 헤치며 거실로 들어가, 유리 미닫이문을 통해 서부의 태양이 발하는 광휘를 바라볼 것이다. 그리고 잠시 나폴리를 떠올릴 것이다. 사샤의 작은 방에 앉아 있던 때를. 마침내 해가 창문 한가운데까지 기울어 그녀가 매달아둔 철사 원형 고리에 담기는 것을 본 순간 불현듯 맛보았던 놀라움과 기쁨을.
지금 그는 조카딸을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오렌지빛으로 물든 그녀의 머리와 얼굴은 타오르는 듯했다.
"봤죠?" 사샤가 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제 거예요."-340쪽

알렉스는 상상했다. 그녀의 아파트로 걸어들어가 발견하는, 여전히 그 안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젊은 시절의 그 자신, 무궁한 계획과 드높은 기준을 품었고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었던 그 시절의 자신을. 그 환상이 그에게 위태롭게 내달리는 희망을 심어주었다. 그는 다시 한번 버저를 눌렀다. 몇 초가 지나자 썰물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상실감을 느꼈다. 한바탕 정신없던 무언극이 허물어지더니 사라져버렸다.-46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