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빛
전수찬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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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다.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만 해도 그자 앞에서 떠오르는 나쁜 기억들에 매번 패배당해, 집으로 돌아갈 때는 마치 기억에 두들겨맞아 녹초가 된 것처럼 지치곤 했다. 나쁜 기억은 쉽게 일어나 쉽게 삶을 침범했고, 며칠 동안 썩은 내를 풍기나 가라앉았다. 몇 달 동안 그러했다. 그자는 삶에서 불필요한 기억들은 편리하게 도려내 오래전 삶을 회복한 듯했다. 그자의 아들, 기환은 대학생이었다. 올봄이 되어서야 그자를 바라보는 일은 본래의 의미를 되찾았다. 그것이 그자의 가정불화―사고를 치고 온 아들을 두들겨패는 그자를 몇 번 본 뒤에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면 치졸하다고 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마음의 안정을 찾은 것은 그 이후였다.-29쪽

시선은 결국 원했던 것이 고발이 아니라 바다였음을 인정하라고 종용했다. 하지만 그자를 고발하지 않고 바다에 갈 수 없었다. 삼 년 전 박선명을 다시 발견한 뒤, 한창 그자를 추적할 때는 그 일을 일컬어 시간을 매듭짓는 일이라 불렀다. 봄볕 아래에서 그자를 만났을 때, 그자는 같은 시간 속에 살고 있지 않았다. 그자는 그 시간―창호가 죽은 뒤 새로이 탄생한 그 시간에서 벗어나 먼 곳에 살고 있었다. 그자를 그 시간 속으로 데려오고 싶었다. 그리고 매듭짓고 싶었다.-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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