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기 안내서 - 더 멀리 나아가려는 당신을 위한 지도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반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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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정확한 시기에, 그러니까 새로운 이야기를 써나가기에 앞서 찾아온 고마운 책이었다.

이처럼 앞으로 돌진하는 경험에서는 물질적인 것들이 하나하나 떨어져 나간다. 뱀이 탈피할 때 벗는 허물처럼 우리에게서 벗겨져 나간다. 과거를 잊는다는 것은 물론 무언가를 상실했다는 감각마저 잃는 것이다. 그런데 상실의 감각이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풍요로움에 대한 기억이자 우리가 현재에 길을 찾도록 도와줄 단서들에 대한 기억이기도 하므로,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익혀야 할 기술은 과거를 잊는 기술이 아니라 손에서 놓아주는 기술이다. 그리고 우리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우리는 그 상실 속에서 풍요로울 수 있다. - P43

글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나는 인생의 대부분을 아이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나를 형성했던 힘들이 아직 생생하고 강력했다. 이후 시간과 함께 기억들은 대부분 희미해졌고, 내가 그중 하나를 글로 적을 때마다 그 기억은 버려지는 셈이었다. 그 순간 기억은 그림자처럼 흐릿한 추억으로서의 생을 마감하고 활자로 고정된다.더 이상 내 것이 아니게 된다. 살아 있는 것 특유의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속성을 잃는다. - P64

저 포로들은 모든 사람이 살면서 겪기 마련인 사건을 극명하고 극적인 방식으로 보여준 셈이었는데, 그 사건이란 우리가 어떤 과정을 통해 과거의 자신과는 다른 자신으로 변하는 일이다. (...) 가끔은 오래된 사진 한 장, 오래된 친구 한 명, 오래된 편지 한 통 때문에 내가 더 이상 과거의 내가 아님을 깨닫는다. 그들과 함께 살았던 나, 이것을 귀하여 여겼던 나, 그것을 선택했던 나, 저렇게 썼던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먼 거리를 건너온 것이다. - P118

그리고 어떤 사람은 남들보다 유난히 더 멀리 간다.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알맞은 자아, 혹은 적어도 의문을 제기받지 않는 나아를 생득권처럼 타고나지만, 또 어떤 사람은 생존을 위해서든 만족을 위해서든 자신을 새로 만들어내려고 하고 그래서 멀리 여행한다. 어떤 사람은 가치와 관습을 상속받은 집처럼 물려받지만, 어떤 사람은 그 집을 불태워야 하고, 자기만의 땅을 찾아야 하고, 맨땅에서부터 새로 지어야 한다. - P118

그러나 글쓰기는 그러잖아도 충분히 외로운 작업이다. 글쓰기는 즉각적인 대답이나 상응하는 대답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는데 먼저 고백하는 일이다. 상대가 영원히 묵묵부답일 수 있는 대화, 아니면 긴 시간이 흘러서 글쓴이가 사라진 뒤에야 진행될 수도 있는 대화를 먼저 시작하는 일이다. 하지만 최고의 글은 꼭 저 동물들처럼 나타난다. 갑작스럽게, 태연자약하게, 모든 것을 말하면서도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 없음에 가까운 말로. 글쓰기는 자기 자신의 사막, 자기 자신의 야생일지도 모른다. - P186

그리고 내가 이제 그 집 밖으로 나와 다시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내가 과연 다른 집에서 살 수 있을지, 이 작은 집보다 큰 집에서, 이 큰 집보다 작은 집에서 살 수 있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이 집 계단의 굴곡을 자면서도 걸을 수 있을 만큼 몸으로 외운 터이니까, 맨땅에 손수 지어 올려서 내 집이라고 부른 터이니까. 집을 다시 짓는 것도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불을 댕겨 이 집을 태운 사람은 나였다. - P191

이야기는 아리아드네의 실 같은 선물이 될 수 있고, 미로가 될 수도 있고, 미로 속의 게걸스러운 야수 미노타우로스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이야기를 길잡이 삼아 방향을 찾지만, 가끔은 이야기를 버려야만 탈출할 수 있다. - P252

그 집은 큰 장소 속에 든 작은 장소, 혹은 큰 이야기 속에 든 작은 이야기였다. 이야기들은 러시아 인형처럼 첩첩이 담겨 있었다. 그 집에서는 끔찍한 일들이 벌어졌지만, 그 일들은 더 큰 카운티에서 벌어지던 구원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 구원은 또 온 나라와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던 폭력적인 삭제에 대한 반응이었다. 나는 사반세기 전에 그 집을 영영 떠났고 꿈에서는 지난 일 년 안에야 비로소 벗어났지만, 그 카운티만큼은 내가 몇 번이고 다시 돌아가기로 선택한 곳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돌아갔을 때야 비로소 몇몇 동물들이 다시 돌아온 것뿐 아니라 저 이야기들이 첩첩이 담긴 것을 보았다. - P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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