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년세세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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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
그것은 아니라고 한세진은 답했다.
그것은 아니라고 한세진은 생각했다. 할아버지한테 이제 인사하라고, 마지막으로 인사하라고 권하는 엄마의 얼굴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마음이 아팠을 거라고, 언제나 다만 그거였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 P44

그게 룰이었다. 일터로 가장을 보러 오는 사람은 그가 어떤 장소에서 어떻게 일하고 먹고 마시며 돈을 버는지를 봐야 했다. 그렇게 버는 돈으로 그들이 먹고살았고, 살고 있으니까. 한영진은 그렇게 배웠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시장에서 부모에게, 직장에서 동료들에게 그걸 배웠따. - P59

실망스럽고 두려운 순간도 더러 있었지만 한영진은 김원상에게 특별한 악의가 있다고 믿지는 않았다. 그는 그냥...... 그 사람은 그냥, 생각을 덜 하는 것뿐이라고 한영진은 믿었다. 한영진이 생각하기에 생각이란 안간힘 같은 것이었다. 어떤 생각이 든다고 그 생각을 말이나 행동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버텨보는 것. 말하고 싶고 하고 싶다고 바로 말하거나 하지 않고 버텨보는 것. 그는 그것을 덜 할 뿐이었고 그게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 - P70

모든 게 끔찍했는데 그중에 아기가, 품에 안은 아기가 가장 끔찍했다. 그 맹목성, 연약함, 끈질김 같은 것들이. 내 삶을 독차지하려고 나타나 당장 다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타인. 한영진은 자기가 그렇게 느낀다는 걸, 그렇게 생각한다는 걸 티 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 P73

어머니가 너무 때리면 벽 너머에 네가 있다는 걸 생각한다고 순자가 말한 적이 있었다. 더 때려봐 어디 죽여봐 내가 깩소리를 내면 순자가 듣는다 순자가 듣고 있다 순자가 듣고 있어. 그렇게 생각하면 죽을 것 같다가도 무섭지 않고 이상하게 배짱이 생긴다고 말하던 순자. - P124

이은일. 기록으로는 그 아이가 죽지 않은 채로 살아 있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 아이도. 깊은 수풀 속 어딘가에 남은 조그만 집터처럼 거기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르는 채 방치되어 있던 이름들이 그 서류 한 장에 남아 있었다. - P132

잘 살기.
그런데 그건 대체 뭐였을까, 하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나는 내 아이들이 잘 살기를 바랐다. 끔찍한 일을 겪지 않고 무사히 어른이 되기를,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랐어. 잘 모르면서 내가 그 꿈을 꾸었다. 잘 모르면서. - P138

수십년 살림으로 손이 굳고 곱았는데도 뜨거운 것에 닿으면 여전히 뜨겁다는 것이 이순일은 성가시면서도 경이로웠다. - P141

그러나 한영진이 끝내 말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걸 이순일은 알고 있었다.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거라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그 아이가 말하지 않는 것은 그래서 나도 말하지 않는다.
용서를 구할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엔 있다는 것을 이순일은 알고 있었다.

순자에게도 그것이 있으니까. - P142

안나가 거기서 살았다면 다르게 살았을 거라고, 안나는 한국에서 덜 외롭고 더 행복하게 살았을지 모른다고 노먼은 말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안나는 안나의 삶을 살았어, 여기서. -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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