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선집 2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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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에게 심취한 두 사람의 관계는 1년 반 남짓 지속됐다. 이후 콜리지는 증폭된 혼란에 내면을 잠식당한 반면, 워즈워스의 내면에는 자부심이 거의 확고하게 자리잡으면서, 두 사람이 서로에게 몰두하던 시간도 끝이 났다. 2년 가까이 유지돼온 각자의 모습, 서로에게서 온전한 기쁨을 만끽하던 두 사람은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그렇다고 서로를 알기 전의 상태로 돌아간 것도 아니었다. 서로의 존재 속에세 자기 최선의 자아를 느끼는 게 더는 불가능해졌을 뿐이다. - P27

자기 최선의 자아. 이는 몇백 년간 우정의 본질을 정의할 때면 반드시 전제되는 핵심 개념이었다. 친구란 자기 내면의 선량함에 말을 건네는 선량한 존재라는 것. 치유의 문화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이런 개념은 얼마나 낯선가! 오늘날 우리는 서로 최선의 자아를 긍정하기는커녕 그것을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우정이라는 결속을 만들어내는 것은 오히려 우리 자신의 감정적 무능—공포, 분노, 치욕—을 인정하는 솔직함이다. 함께 있을 때 자신의 가장 깊숙한 부끄러움까지 터놓고 직시하는 일만큼 우리를 가까워지게 만들어주는 것도 없다. 콜리지와 워스워스가 두려워했던 그런 식의 자기폭로를 오늘날 우리는 아주 좋아한다. 우리가 원하는 건 상대에게 알려졌다는 느낌이다, 결점까지도 전부. 그러니까 결점은 많을수록 좋다. 내가 털어놓는 것이 곧 나 자신이라는 생각, 그것은 우리 문화의 대단한 착각이다. - P28

"난 내가 뭘 안 원하는지밖에 몰랐어. 늘 옆구리를 찌르는 가시 하나가 있거든, 그래서 항상 생각을 해, 이 가시만 빠지면 나도 내가 뭘 원하는지 생각을 해보겠다고. 한데 막상 그 가시가 빠지고 나면 또 텅 빈 기분이 되더라고. 그러다 금세 또 새로운 가시가 옆구리를 파고들지. 그러면 또다시 그 가시에서 벗어날 생각밖에 할 수가 없는 거야. 도무지 내가 뭘 원하는지 생각할 시간이 없어." - P31

사실 우리는 각자의 인생이라는 영토를 힘겹게 횡단하다 국경이 맞닿는 곳에서 이따금 만나 서로에게 정찰 기록을 건네는 고독한 두 여행자다. - P59

프로이트의 주요 발견들은 무의식에 대한 발견과 탐색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주용한 건 우리가 누구나 평생 내적으로 분열된 상태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성장하길 원하는 동시에 성장하지 않길 원하고, 성적 쾌락을 갈구하는 동시에 두려워하며, 우리 자신의 공격성—분노, 잔혹성, 타인을 모욕하려는 욕구—을 혐오스러워하면서도 그 원천이 되는 울분은 좀처럼 해소하려 들지 않는다. 고통 그 자체는 아픔의 원천인 동시에 안도감의 원처니다. 프로이트가 환자들을 대하며 가장 치유하기 어렵다고 여긴 것도 치유되길 거부하는 마음이었다. - P80

이것이 볼턴에게 "미쳐 돌아가는 일들이 줄줄이 밀려드는 와중에도 뚜벅뚜벅 걸어나가본 적이 있는 가장 고독한 개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준 외로움이었다. - P104

다음 순간 볼턴은 역설적인 상황을 맞닥뜨린다. "세상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혼자 됨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
(...)
볼턴 역시 프로이트가 알았던 걸 알고 있다. 외로움은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주지만 불가해하게도 우리는 그 외로움을 포기하길 망설인다. 심리적 시간 속에서 우리는 단 한 순간도 모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 P105

됐고, 여기서 중요한 건 인간으로서—그래, 처음부터 끝까지—다해야 할 유일한 도리가 의식을 명예롭게 간직하는 일이라고 할 때, 자기 정신을 활용하는 걸 세상 제일가는 기쁨으로 여기며 의식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 평생 분투해온 그가 이제 그 유구하고 결연한 노력을 무시—아니지, 폐기—하게끔 조성된 환경에 갇혀버렸다는 사실이었다. - P116

시간이 흐르고 내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그 원피스 절단 사건을 끄집어낼 때마다, 엄마도 매번 그 이야기의 진실성을 부정했다. 쭉 그 상태로, 나는 계속 엄마를 믿지 않고, 믿지 않고, 또 믿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별안간 믿게 됐다. 오십대 후반이 된 나는 어느 쌀쌀한 봄날 오후에 23번가 시내 횡단 버스를 타고 가다 9번 애비뉴 정류장에서 내렸고, 땅에 발을 딛는 순간 반백여 년 전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든 내가 기억하는 그런 식은 절대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세상에,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치며 생각했다. 나는 내 울분을 제조해내려고 태어난 사람이구나. 하지만 왜? 하물며 소중한 인생에 내처 그걸 붙들고 있었다. 대체 왜? - P122

기억할 수 있는 시점 이후로 평생, 나는 내가 무언가를 원하는 상태라는 게 들통날까 봐 두려웠다. 원하는 일을 하면 기대에 못 미칠 게 분명했고, 알고 지내고 싶은 사람들을 따라가봤자 거절당할 게 뻔했으며, 암만 매력적으로 보이게 꾸며봤자 그저 평범해 보일 것이었다. 계속 움츠러들던 영혼은 그렇게 손상된 자아를 둘러싼 모습으로 굳어져버렸다. 나는 일에 몰두했지만 마지못해 그럴 뿐이었고, 가끔 좋아하는 사람들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서는 일은 있어도 두 걸음을 옮긴 적은 없었으며, 화장은 했지만 옷은 되는대로 입었다. 그 모든 일 중 무엇 하나라도 잘해낸다는 건 별생각 없이 삶과 관계 맺는 일, 다시 말해 내 두려움을 사랑했던 것 이상으로 삶을 사랑하는 일이었을 텐데, 그것이야말로 내가 할 줄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확실히 할 줄 아는 건 몽상으로 세월 흘려보내기였다. 그저 ‘상황‘이 달라져서 나도 달라지기를 간절히 바라고만 있는 것.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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