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에이드리언 리치 지음, 이주혜 옮김 / 바다출판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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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이 깨어나는 시대에 산다는 건 참으로 신나는 일이다. 동시에 혼란스럽고 어지럽고 고통스럽기도 하다. 이 죽은 자들 혹은 잠자는 의식이 깨어나 이미 수백만 여성의 삶에 영향을 미쳤고, 심지어 아직 이 사실을 모르는 이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 몽유병자들이 깨어나고 있고, 이 깨어남은 처음으로 집단적인 현실을 맞이하고 있다. 즉, 이제 눈을 뜨는 게 더는 외로운 일이 아니다. - P26

문학을 급진적으로 비평하고자 하는 충동에 빠진 페미니스트는 무엇보다 이 일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아왔으며, 자신을 어떻게 상상해왔는가, 우리의 언어는 우리를 어떻게 해방했고 또 어떻게 가두어왔는가, ‘이름 짓기‘라는 행위 자체가 지금껏 어떤 방식으로 남성의 특권이었는가, 이제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고 이름 짓고, 그리하여 새롭게 살아갈 수 있는가를 알아내는 실마리로 삼을 것이다. 모든 새로운 혁명마다 낡은 정치 질서가 다시 살아남는 모습을 보지 않으려면 성정체성의 개념 변화가 필수이다. 우리는 과거의 글쓰기에 대해 알아야 하고, 우리가 이제껏 알아왔던 것과는 다르게 알아야 한다. (...) 우리는 이제 막 움트는 의식을 위한 언어와 이미지를 찾고자 노력하지만, 과거에서 우리를 도와줄 것은 거의 없다. - P26

몇 년 만에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1929)을 다시 읽다가 그 산문의 어조에 어떤 안간힘과 수고로움, 집요한 조심스러움이 깃들어 있는 걸 깨닫고 굉장히 놀랐다. 그 어조가 뭔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나에게서, 또 다른 여성들에게서 많이 들어본 익숙한 어조였다. 남자들이 가득한 방에서 자신의 위상이 말로 공격당하고 있는데, 자신의 분노가 만져질 듯 생생한데도, 절대로 화가 난 사람처럼 보이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기꺼이 침착하고 초연하고 심지어 매력적으로 보이려고 애쓰는 여성의 어조였다. - P29

셋째가 태어났을 무렵 나는 스스로를 실패한 여성이자 실패한 시인으로 봐야 할지, 아니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는 제3의 명제를 찾아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고 느꼈다.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건 운명이라고 부르는 어떤 흐름에 떠밀려 들어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잊어버리는 일이었다. 한때 자기 의지와 에너지를 거의 황홀경의 상태로 경험했던 여자, 도시를 이리저리 걸어 다니거나, 한밤중에 기차를 타거나, 교실에서 타자기로 글을 쓰던 여자를 까맣게 잊고 표류한다는 생각이 정말 무서웠다. - P37

그 시절 나는 늘 사랑의 실패자로서 갈등을 느꼈다. 한때는 내가 섹슈얼리티와 일과 자녀 양육이 공존하는, 다시 말해 대다수 남성에게나 가능한 완전한 삶을 선택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스물아홉 살의 나는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늘 죄책감을 느꼈다.
당시 나는 어떻게 해도 충분하지 않은 단 한 가지를 원했다. 바로 생각할 시간, 글을 쓸 시간이었다. - P39

나로선 ‘나‘라는 말을 쓰지 않고, 자전적이지 않은 책을 쓰는 게 처음부터 불가능해 보였다. 그래놓고 몇 달 동안 내 삶의 고통스럽고 문제 많았던 영역에 뛰어드는 것을 미루거나, 준비 과정으로 역사 연구와 분석에만 몰두하며 보냈지만, 결국 이 책은 내 삶의 바로 그 영역에서 나왔다. 나는 점점 사적이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기꺼이 공유해야만 여성들이 진실로 우리 것이 될 수 있는 세상을 집단으로 묘사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한편 작가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 거짓되고 작위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통렬히 인식하고 있다. 결국, 지금 이 순간 독자가 읽고 있는 것은 그 여자의 이야기고, 다른 이들의 이야기는—죽은 이들을 포함해—아직 말해지지 않았다. - P133

사랑과 미움의 파도에 휩쓸린다. 심지어 아이의 어린 시절을 질투한다. 아이가 자라기를 희망하면서도 두려워한다. 아이의 존재에 낱낱이 매여 있으면서 책임감에서 벗어나길 갈망한다. - P138

이제 스물한 살이 된 큰아들이 앞 문단을 읽고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는 늘 우리를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매 순간 상대방을 사랑하는 인간관계는 존재하지 않아요." 그렇다. 나는 아들에게 설명하려고 애썼다. 여성들은—무엇보다 어머니들은—그런 식으로 사랑해야 한다고 여겨졌다고. - P139

"내가 무슨 부탁을 해도 남편은 들어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언제나 내 편에서 먼저 말을 꺼내야 한다." 내가 느끼는 우울과 울컥 터지는 분노, 덫에 걸린 느낌을 남편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하는 짐으로 여겼다. 이렇게 무거운 짐을 안겨주었는데도 나를 사랑하는 남편이 고마웠다. - P145

물론 셋째의 탄생을 나의 죽음을 예고하는 영장이 아니라 ‘죽음에 대항할 또다른 무기‘로 볼 수 있었던 것도 정신적 여유와 함께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 그러나 물리적인 여유가 아닌 다른 의미에서, 내가 내 삶을 위해 아이들의 삶을 통해서, 아이들의 삶에 맞서, 아이들의 삶과 함께 싸우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 밖에 다른 것은 내게 분명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을 낳으려고 애쓰고 있었고, 다소 암울하고 불투명한 방식이지만 그 과정에 임신과 출산까지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 P148

사회의 시선으로 보면 한때 엄마였던 우리가 영원히 엄마가 아니라면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 ‘아이를 놔주는‘ 과정은—그렇게 하지 않으면 비난을 받지만—가부장제 문화를 거스르는 반역 행위다. 그러나 아이를 놔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에겐 다시 돌아갈 자신이 필요하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은 가부장제와 심리학이 결탁해 여성성의 개념으로 만들어버린 일을 수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주 강력한 방식으로 자신의 신체와 감정을 경험하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육체와 신체의 변화뿐 아니라 성격의 변화도 느낀다. 종종 자기절제와 자신을 불로 지지는 고통스러운 행위를 통해 우리 안에 ‘내재했다‘라고 여겨지는 자질들을, 즉 인내심과 자기희생과 한 인간을 사회화하기 위해 사소하고 틀에 박힌 일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의지 등을 습득한다. 또한, 놀랍게도 우리가 알았던 그 어느 감정보다 더 강렬하고 격한 사랑과 폭력이 넘쳐흐르는 것을 느낀다. - P159

이 책 전체에 이어질 내 이야기는 그저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결국, 내가 열중한 것은 한 여성 개인이 할 수 있는 한, 다른 여성과 함께 마음과 몸의 분리를 치유하겠다는 결심,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다시는 그런 식으로 나 자신을 잃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서서히 나는 ‘나의‘ 모성 경험에 모순이 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다른 많은 여성의 경험과 다르고, 나의 경험이 유일하지 않으며, 내 경험이 유일하다는 환상을 걷어낼 때야 비로소 여성으로서 진정한 삶을 살아갈 희망을 품을 수 있다고. - P164

어머니에 관해 쓰기가 쉽지 않다. 내가 무엇을 쓰든 그것은 내가 말하는 나의 이야기고 내가 바라본 나의 과거다. 어머니가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면 다른 풍경이 펼쳐질 것이다. 그러나 내 풍경이든 어머니의 풍경이든, 오래된 분노의 조각들이 이글이글 타고 있을 것이다. - P169

나의 일부분은 어머니와 너무도 닮았다. 아직도 어머니를 향한 분노가 깊이 쌓여 있음을 알고 있다. 철없는 행동을 했다고 네 살에 벽장에 갇혔을 때의 분노(아버지의 지시였지만 실행은 어머니가 했다), 얼굴에 틱이 올 때까지 너무 오래 피아노를 연습해야 했던 여섯 살 아이의 분노(역시 아버지가 고집해서 피아노를 쳤지만 시킨 사람은 어머니였다)가 여전히 남아 있다. (이제 어머니가 된 나는 아이의 얼굴에 나타난 틱 증상이 자신의 몸을 찌르는 날카로운 죄의식과 고통의 칼날이었음을 안다.) - P173

그리고 어머니 안에도 분노가 깊이 쌓여 있음을 안다. 모든 어머니는 자녀를 향해 압도적이면서도 인정할 수 없는 분노를 품고 있다. 내 어머니가 어머니가 되었을 때의 조건, 불가능한 기대치, 임신한 여성을 향한 아버지의 혐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모든 것을 향한 아버지의 혐오를 생각해보면, 어머니에 대한 나의 분노는 어머니를 위한 비애와 분노로 바뀌고, 다시 어머니를 향한 분노로, 즉 오래되었으나 정화되지 않는 아이의 분노로 바뀐다. - P174

나는 더 이상 어머니와 치유를 위해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환상, 그 대화 속에서 서로 상처를 전부 드러내며 모녀 사이에 공유한 고통을 초월해 마침내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는 환상을 품지 않는다. 그런 환상은 치유되지 못한 어린아이의 환상이다. 그러나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나는 어머니의 존재가 지금 내게 얼마나 중요한지, 얼마나 중요했었는지 인정할 수 있다. - P174

시인 린 수케닉이 만든 ‘모성공포증‘이라는 용어는 어머니나 모성을 향한 두려움이 아니라 어머니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수많은 딸이 그토록 벗어나고자 애쓰고 있는 타협과 자기혐오를 자신의 어머니에게서 배웠으며, 여성 존재에 대한 제약과 비하를 강제적으로 전수받았음을 알고 있다. 그 힘이 어머니에게서 출발해 자신에게 영향을 주는 모습을 지켜보느니 차라리 노골적으로 어머니를 미워하고 거부하는 편이 훨씬 더 쉽다. 그러나 모성 공포증이 생길 정도로 어머니를 미워하는 곳에는 어머니를 향해 깊이 끌리는 힘도 있을 것이다. 방심하는 순간 완전히 어머니와 똑같아질 수 있다. 청소년이 된 딸은 어머니와 전쟁을 벌이며 살지만 동시에 어머니의 옷과 향수를 빌릴 수도 있다. 집을 떠나면 어머니와 방식과 정반대되는 모습으로 집안일을 할 수도 있다. - P190

많은 딸이 너무도 쉽게 수동적으로 ‘찾아오는 건 뭐든지‘ 받아들이며 살았다고 어머니에게 분노를 느낀다. 어머니의 희생은 어머니 자신에게도 치욕이었지만, 여성으로 살아가는 게 어떤 의미인지 탐색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어머니를 지켜보는 딸까지도 훼손한다. - P203

생존을 위해 온종일 힘겹게 일하다가 하루 끝에 어머니로서 에너지는 바닥이 난 상태로 무감각하고 지친 모습으로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하는 여성에 대해서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아이는 사회제도나 모성 제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직 모진 목소리, 멍한 눈동자, 자신을 안아주지 않는 어머니,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지 말해주지 않는 어머니를 바라볼 뿐이다. 그리고 딸이 자기 자신으로 자랄 수 있도록 애정과 지지를 보내준 사람이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였다고 느끼는 가정에 대해서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어머니를 보충한 게 아니라 대신해 양육하는 아버지는 어머니가 부재한 이유가 무엇이든 어머니를 희생시킨 대가로 틀림없이 사랑받는다는 게 고통스러운 사실이다. 그는 남성으로서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면서 최선을 다하고 있겠지만,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 어머니를 향한 사랑을 대신한다면 어머니를 두 번 잃는 셈이다. - P205

한 여성이 다른 여성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실제적인 가능성에 대한 자신의 의식을 분명히 밝히고 확장하는 것이다. 어머니에게 이는 그저 어린이 책이나 영화, TV, 교실에서 보여주는 여성을 깎아내리는 이미지와 싸우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희생자 되기를 거부하는 것, 그리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 P207

과거 세대가 아무리 나쁘게 행동했더라도 당신들 세대는 세상을 구해야 한다는 말로 졸업식 축사를 끝내는 건 너무도 진부한 일입니다. 그보다는 1979년 졸업생 여성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선배 자매들의 가치를 지켜주십시오. 역사에서 배워주십시오. 여성 조상들에게서 영감을 구하십시오. 이 역사가 여러분에게 가르칠 게 빈약하다면, 역사를 잘 모르겠다면, 여러분이 지닌 교육적 특권을 이용해 배우십시오. 특권을 지닌 일부 여성들이 어떻게 더 큰 해방에 타협해왔는지, 또 어떤 여성들은 해방을 심화하기 위해 어떻게 자신의 특권을 위협에 빠트렸는지 배우십시오. - P232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내가 속한 가족과 사회가 심각하게 정보를 숨기고 빼앗아가는 바람에 이 일이 내게 진정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나 혼자 이해하려고 애써야 했다는 사실에 뒤늦은 분노를 느낀다. 나는 한 번도 저항을 배운 적이 없고, 오직 못 본 척하는 법만 배웠다는 사실이, 반유대주의 자체를 표현할 어떠한 언어도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이 화가 난다. - P296

살다 보면 그 순간 곧바로 배신임을 알게 되는 배신을 저지를 때가 있다. 그 일도 그랬다. 그 일 말고도 너무 반복적이고 일상적이어서 어떤 기억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오직 비참함과 점점 무뎌지는 자기혐오의 찌꺼기만 쌓이는 배신도 있었다. 이런 배신은 말이 아니라 침묵의 형태를 띨 때가 많았다. 반여성적인 농담이나 인종차별적 농담, 반유대주의 농담을 하며 다들 웃는 앞에서 침묵하기. 침묵하고 나서 망각하기. 우리가 존경하는 사람이, 그 용기와 웅변으로 우리를 감동하게 한 사람이 억압자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못 들은 척하기. 저 사람이 정말로 그럴 의도는 없었어. 진짜로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어. 그러나 배신은 주전자 속의 일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채로 쌓이고 쌓여간다. - P300

그러나 우리는 상처 입지 않은 사람이 우리를 연결해주길 기다릴 수 없다. 우리가 완벽하게 깨끗하고 정당해질 때까지 발언을 미룰 수가 없다. 순도 100퍼센트는 없으며 우리 생애에 이 과정의 끝도 없다.
- P316

그러므로 이 글에도 결론이 없다. 내게는 또 다른 시작이다. 1982년 우경화된 미국에서 나도 노란별을 달겠다고 말하는 방식만으로는 안 된다. 책임과 책임 범위의 확대를 향해 움직여야 한다. 남은 생애 동안, 다음 반세기 동안, 내 정체성의 모든 면이 전부 개입되어야 한다. 바로 다음과 같은 정체성들 말이다. 특권을 얻고 싶으면 복종을 바치라고 배운 백인 중산층 여자아이. 이성애자 기독교인으로 길러진 유대인 레즈비언. 흑인 인권투쟁을 통해 처음으로 억압이 호명되고 분석되는 것을 들었던 여성. 남성 폭력을 증오하는 페미니스트이자 세 아들을 둔 여성. 지팡이를 짚고 다리를 저는 여성. 피 흘리는 사람도 책임이 있다는 생각을 멈춘 여성, 아름다운 언어도 거짓말을 할 수 있고, 억압자의 언어가 때로는 아름답게 들릴 수 있음을 아는 시인. 저항의 일부분으로 자신의 행동을 깨끗이 하려고 노력하는 여성. - P317

1956년부터 내가 쓴 시마다 연도를 써넣기 시작했다. 시를 캡슐로 감싼 하나의 사건, 그 자체로 완전한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여기길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삶이 변화 중이고 내 작품이 변화 중임을 알았기에 독자에게도 내 존재 의식이 오래도록 지속되는 하나의 과정에 참여하고 있음을 알릴 필요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는 완곡한 정치적 주장으로, 시 텍스트가 세계를 살아가는 시인의 일상과 분리된 채 읽혀야 한다는 지배적인 비평의 생각을 거부하는 행위였다. 시를 역사를 벗어난 곳이 아니라 역사적인 연속체 안에 위치시킨 일종의 선언이었다. - P347

그러나 우리는 오직 여성 공동체 안에서만 살면서 글을 쓰지 않았고, 지금도 그러하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심장에서, 인종차별이 모든 형태의 물리적, 제도적, 정신적 포격을 당연하게 여기고 일곱 명 가운데 한 명 이상이 빈곤선 이하의 삶을 살아가는 국가에서, 정치문화운동을 구축하려고 애쓰고 있다. 미국의 예술은 캡슐에 싸인 하나의 상품으로, 돈으로 사고팔 수 있는 인공물로, ‘예술 행정가‘라는 특별한 직원을 요구하는, MFA 과정에서 배울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정확한 이유를 몰라도 ‘가져야만 하는‘ 어떤 것으로 여겨진다. 레즈비언이자 페미니스트 시인, 작가로서 나는 이러한 위치가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 나라의 피와 빵에 관한 현실과 함께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 P351

나는 토종 파시스트 성향과 자유 시장주의 실천이 동맹을 맺고, 언어 안에서 의미라는 알맹이를 빼버리려고 노력해온 나라의 작가다. 나는 내 목소리를 효과적으로 낼 수 없도록 차단당함과 동시에 내가 가장 들어야만 하는 목소리들을 듣지 못하게 차단당하는, 이중의 차단을 종종 느껴왔다. 작가라면 누구나 자신의 언어를 옹호할 자격이 있는가, 자신의 글이 읽을 가치가 있는가, 하는 필요한 의문을 품는다. 그러나 내게는 내 작품을 비옥하게 만들고 영속시켜준 거의 모든 게 위험에 처했다는 느낌에 대한 의문도 있었다. 그리고 사실은 이것이야말로 내가 글로 써야 하는 소재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런 시대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두 가지 의미로 ‘나의 시대에서 비롯된‘ 글을 쓰려고 노력할 것이다. - P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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