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술 - 오늘의 술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무튼 시리즈 20
김혼비 지음 / 제철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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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치명상을 입을 만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니다. 같거나 다른 색깔을 가진 크고 작은 일들과 몇 가지 상황이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얕봤던 것 같다. 사실은 그것들이 전부 인생의 얄궂은 규칙에 따라 배치된, 저 멀리서 바라보면 ‘우울증‘이라는 글자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카드섹션 같은 것이었다는 건, 그 시기에서 빠져나와 멀리멀리 걸어가던 어느 날 문득 뒤돌아보고서야 알았다. 원래 카드섹션이라는 게 그 한복판에 서서 눈앞에 있는 카드 낱장들을 하나하나 볼 때는 대체 이게 뭘 가리키는지 별 의미도 연관도 없어 보이니까. - P47

누군가를 붙잡고 울며불며 고통을 호소하는 건 너무 뻔해 보였다. 안 그래도 비참한데 뻔하기까지 한 건 싫었다. 그냥 그때는 이렇게 힘들어도 티내지 않는 것이, 이렇게 힘들어도 누구에게 기대지 않고 혼자서 꿋꿋하게 ‘어른다운 방식‘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그 기분이, 세상에게 부릴 수 있는 유일한 자존심이었다. 어렸다. 매우 어렸다. 빈 주머니에 그런 쓸데없는 똥자존심이라도 욱여넣어야 할 정도로. ‘감춤‘으로써 그것은 나만 아는 은밀한 성장처럼 느껴졌다. 그런 느낌이 거짓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 P48

그 사람이 집 안에 숨겨두거나 남겨둔 모습 말고 그가 집 바깥으로 가지고 나가기로 선별한 모습, 딱 그만큼까지만 알고 대면하고 싶은데, 집 안 구석 어딘가에 묻어 있는 무방비하고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면모, 이 사람 또한 인간으로서 나름 매일매일 실존적 불안과 싸우고 있으며 누군가의 소중한 관계망 속에 자리하고 있는 존재라는 걸 상기시켜주는 흔적을 봐버리면 필요 이상의 사적인 감정과 알 수 없는 책임감 비슷한 감정이 생겨 곤란하다. 게다가 집은 대개 말이 많다. 모든 사물들이 집주인에 대해 자세히 말해주는 걸 내내 듣다 나오는 건 제법 에너지가 드는 일이다. - P80

누가 지금의 내 모양새를 본다면 폭탄이 떨어진 곳에서 겨우 도망쳐 나왔다고 생각하지 폭탄주를 마셨을 뿐이라고 상상이나 할까? 중립국의 폭탄이라고 너무 방심했다. - P129

누군가 술기운을 빌려 나에게 꺼내놓는 말들을 소중히 담아놓는 쪽이었다. 때로는 그 말이 우리를 나쁜 방향으로 이끌고 갈 때도 있지만, 어쨌든 ‘나이스‘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게 고여 있는 것보다는 어느 쪽으로라도 흘러가는 편이 낫다고 믿는다.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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