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제10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박상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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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벌써 서른한 살이고, 성인이 된 지도 십 년이 넘었고, 그녀가 내 삶을 지연시키는 조재가 아니라 그저 누구보다도 성실히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한 명의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 정도로 성장했다. 그녀는 그저 그녀 자신으로서 존재하고 있을 뿐 나를 옥죌 의도가 없고, 나 역시 그저 나로 존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똑같은 인간에 불과하다. 다만 운이 나빴을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며 암이나 곰팡이처럼, 지구의 자전이나 태양의 흑점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우주의 현상이다. 이런 것들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자꾸만 그녀가 내 모든 문제들의 원인인 것만 같았다. 살가죽만 남은 채 다 죽어가는 사람을 앞에 두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나 자신이 혐오스럽지만 그 생각을 멈출 수는 없었다. (박상영, <우럭 한 점 우주의 맛>) - P87

"우리는 전부를 걸고 낯선 나라에서 인생을 새로 시작할 만큼 용기를 내본 적 있는 사람들이니까, 걱정 마. 넌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스스로 원하는 걸 찾을 줄 아는 사람이야" (백수린, <시간의 궤적>) - P166

하지만 아이가 나를 이곳에 뿌리내리게 만드는 유일한 존재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나는 때때로 견딜 수 없을 만큼 큰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내가 아이를 아무리 사랑하더라도 아이는 언젠가 나의 모국어조차 아닌 언어로 나를 증오한다고 말하고 떠날 것을 이미 알기 때문이다. (백수린, <시간의 궤적>) - P179

내가 조금 더 적극적이라면 언니와 연락할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는데, 사과를 하러 연락하지 않는 것이 언니를 위한 것인지 나를 위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백수린, <시간의 궤적>) - P179

우리는 우리가 받은 상처에 대해서는 호들갑을 떨며 아파하면서도 타인의 상처에는 태연한 얼굴로 손가락을 들이미는 그런 존재들이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점점 더 참혹해져서, 안간힘을 써봤자 모든 것의 끝에는 결국 후회와 환멸, 적의나 허무만이 남을 것만 같다는 두려움을 안고 사는 존재들이니까. 하지만 시간이 드러내는 진실이 그토록 하찮은 것뿐일지라도, 우리가 서로 사랑했던 순간들, 온기를 나눴던 순간들, 타인의 입장이 되어 "그 사람,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라고 말해주던 순간들마저 온통 거짓은 아닐 것이다. (백수린, 작가노트말) - P183

예전에는 다른 많은 것을 궁금해하며 지냈다. 보통 누군가에 대한 불만에서 시작해서 그 사람은 대체 왜 그럴까 궁금해하는 것. 조금 더 친밀한 관계와 서로 간의 이해를 쌓기 위한 궁금증이 아니었다. 그저 욕의 다른 얼굴일 뿐. (이주란, <넌 쉽게 말했지만>) - P196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하고 일을 한 뒤 돌아와 씻고 밥을 먹고 나면 하루가 지나 있었고 말하자면 일기에 쓸 일도 일기에 쓸 말도 일기를 쓸 필요도 없었다. 기껏해야 남의 욕이라든가 나 자신이 싫다는 그런 말들이나 썼다. 정말 싫다, 정말 정말 싫다, 그렇게 생각한 다음부턴 막무가내로 싫어하기만 했다. 일을, 하루를, 그러나 다른 방법을 모르는 나를. 나는 그것 말고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이주란, <넌 쉽게 말했지만>) - P209

엄만 그걸 잊지 않고 있었다. 그때 뜯게 둘걸, 싶었고 지금이라도 다시 기회가 생겨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행이기 이전에, 미안하고 고맙다는 생각. 너무 쉬운 일들이라고 생각해왔지만 나는 이제 그런 일들을 가장 우선으로 여기고 싶다. 나는 이제 그렇게 살고 싶다. (이주란, <넌 쉽게 말했지만>) - P215

한편 나는 이곳을 그리워했다는 사실과 별개로 그때와 멀어졌다는 생각에 안심하기도 했다. (김봉곤, <데이 포 나이트>) - P284

너무 아름다웠지만 내 눈을 가리던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한참을 걸어가다 마지막으로 뒤돌아본 그곳에는 H선생님도, 종인 선배도, 나도 없었다. 의심의 여지도 착각의 여지도 없었고 나는 그것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김봉곤, <데이 포 나이트>) - P305

신인들의 빛나는 소설 한 꾸러미를 읽으면 기가 죽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막상 심사에 참여해보니 다른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에게 소중한 이 종이의 세계에서 누군가 공들여 품고 멋지게 완성한 결과물을 보는 일은 더없는 기쁨과 용기를 준다는 것. 그렇다. 좋은 작품은 언제나 기쁨과 용기를 준다. 일반 독자가 읽을 때나 동료 작가가 읽을 때나 말이다. (심사평, 김성중) - P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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