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편지 쓰는 시간 - 소셜 네트워크 시대에 배달된 손으로 쓴 편지
니나 상코비치 지음, 박유신 옮김 / 북인더갭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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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의사소통 방식은 간편하고 빠르다. 편리하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없는 법. 편한 만큼 가벼워졌다. 나와 너 사이의 무게가 가벼워졌다. 가벼운 정보를 전하기에는 좋지만 깊은 마음은 전달하기엔 어딘가 부족하다.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을 문자 메시지, SNS, 이 메일 등을 통해 주고 받지만 허전함을 부인할 수 없다. 멀리 있는 사람에게도 쉽게 안부를 물을 수 있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러한 관계의 허전함을 채울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손 편지.

 

저자처럼 나도 손 편지의 힘을 믿는다. 내가 쓴 편지는 상대와의 깊이 있는 관계를 세우기 위한 반 원을 그리며 답장으로 하나의 온전한 원을 만든다. 하나의 원으로 완성되는 과정에서 편지는 과연 어떤 역할을 할까? 우선 편지는 타임머신이다. 편지는 잊혀 진 과거를 영원한 시간으로 불러온다. 단순히 과거사건 반복이 아니라 현재 속에서 새롭게 재창조 된다. 그래서 우리는 웃고, 울고, 행복해진다.

 

편지는 자신의 세계로의 초대장이다. 누구든 편지를 읽으면 편지를 쓴 사람의 내면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편지를 읽을 때 글 속에 숨겨진 주인공의 마음, 태도, 기분, 상황이 눈앞에 펼쳐진다. 일종의 편지는 상상을 자극하는 확대기다. 그래서 그 사람을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된다. 이런 경험은 산 자와 죽은 자,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다. 편지가 있고 읽는 사람이 있다면, 불멸의 경험이다.

 

편지는 무장해제. 적어도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상대에게 만큼은 적나라하게 보여줄 수 있다. 그것은 편지가 사적이고 비공개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편지에서는 무엇이든 자신이 쓰고 싶은 것을 쓸 수 있다는 생각에 자신의 영혼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편지를 통해 진짜 나를 누군가와 공유한다. 그래서 편지는 쓰는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의 숨은 고백이다.

 

편지는 커피. 커피가 맛있는 이유는 단 맛, 씁쓸한 맛, 신 맛, 인생의 모든 맛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편지는 다정한 위로가 된다. 애통하는 마음을 쓴 편지는 상대의 마음을 달래주는 힘이 있다. 때론 편지는 따끔한 조언이다. 아무리 좋은 충고도 전달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편지를 통한 조언은 상대가 받는 충격도 약해지고 상대를 염려하는 마음을 전할 수 있기 때문에 조언이 조언된다.

 

편지는 확실한 증거. 우리가 함께 한 경험, 관심, 노력, 신뢰를 보여주는 유형의 증거물이다. 나와 너 사이의 사랑, 친절, 성실함을 보여주는 물리적인 증표다. 편지는 변하지 않는다. 너와 나와 있었던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게 하는 놀라운 증거다. 그러니 편지는 너와 나의 성육신이다. 그러니 써라! 붙여라! 보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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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카이퍼 - 리처드 마우가 개인적으로 간략하게 소개하는
리처드 마우 지음, 강성호 옮김 / SFC출판부(학생신앙운동출판부)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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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가 개인의 구원을 강조한다면 카이퍼는 공적 영역의 구원도 강조한다. 그가 이렇게 공적 영역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하나님의 통치가 안 미치는 영역이 단 한 평도 없기 때문이다. 교회는 예배 공동체로서 하나님을 예배한다.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각자 주어진 삶의 영역에서 매일 하나님의 통치를 증명하는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신다.

 

하나님의 통치는 교회를 넘어 선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일 수는 있지만 하나님 나라를 교회로만 이야기할 수 없다. 교회는 (긍정적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좋은 모델이다. 교회의 사명은 자신이 받은 소명대로 하나님의 통치를 세상에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에 설교자는 모든 분야의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설교자는 성도들에게 성경적인 방향과 동기를 제시해야한다.

 

이 책에서 잘 지적하듯이 타락은 전적타락이지 완전타락은 아니다. 전적이라는 말은 전반적으로 죄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는 상태라는 말이다. 구원은 회복이다. 죄로 얼룩졌지만 하나님 형상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다. 이러한 하나님 형상이 완전히 회복되는 그 날을 바라보며 오늘을 고민해야 한다. 이러한 고민을 통해 하늘의 뜻이 이 땅 가운데 구체적으로 실현되기를 소망하는 것, 이것이 카이퍼의 소망이고 우리의 소망이다.

 

문제는 어떻게실현할 것인가? 카이퍼는 먼저 다양성에 초점을 둔다.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다양성이다. 한 가지가 전부라고 말하는 것은 일종이 폭력이다. 하나님 나라는 다양함을 통해 풍성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각 영역의 다양성을 인정하며 조화를 이루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공적인 영역의 다양성뿐만 아니라 다양한 교회를 인정하는 것도 중요하다. 완벽한 교회, 모든 것을 다 갖춘 교회는 없다. 개 교회는 완전한 교회의 한 조각일 뿐이다. 공적인 영역도 마찬가지다. 한 조각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카이퍼는 그 시대의 사람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시대가 던지는 주제가 다르며, 이에 대한 해결 방안도 다르다. 이런 맥락에서 칼빈주의가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분명하게 사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우리는 다양한 문화의 상황 속에 있는 기독교인들과 대화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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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적 제자도
존 하워드 요더 지음, 존 C. 누겐트.앤디 알렉시스-베이커.브랜슨 L. 팔러 엮음, 홍병 / 죠이선교회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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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나는 무엇을 행동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꿔도 무관하다. 행동존재. 신앙도 마찬가지다. 내 신앙의 수준은 행동의 수준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존재와 행동은 동전의 양면처럼 뗄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예수님을 본받는 자. 다시 말해 예수님을 따르는 삶에서 그리스도인임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첫 걸음에는 어떤 행동도 없었다. 오직 십자가의 은혜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완성형이 아닌 진행형이다. 어린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하듯 예수님을 향해 자라야한다.

 

따라서 십자가는 우리를 새 사람으로 만들었고, 만들고 있고, 만들 것이다. 십자가는 단순히 천국행 티켓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이며, 방향이자 살아갈 힘의 근원이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로 다시 태어난 자들은 십자가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 자동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십자가와 함께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출발은 여기서 시작된다. 십자가는 무엇인가?

 

십자가는 우리의 운명을 바꿨다. 원래 우리는 세상에 순응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이었다. 이제 십자가는 세상과 다른 방식의 삶, 불순응의 길을 제시한다. 예를 들면 세상에서는 받은 대로 돌려주는 것이 최상의 관계다. 반면 십자가는 서로의 짐을 지고, 상대의 약점을 용납하는 것을 진짜 관계라고 말한다. 이처럼 십자가는 진짜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가짜라는 사실을, 보잘 것 없었던 것들이 진짜임을 알게 한다. 문제는 아는 게 늘 기쁜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앎의 기쁨이 최고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여전히 내안에 가짜를 진짜처럼 생각하고 싶은 데 가짜임을 알아버렸으니 불편하다. 역설적이지만 십자가는 내게 불편한(?) 기쁨을 준다.

 

불편함은 갈등이다. 예수님은 화평을 주러 오신 게 아니라 검을 주러 오셨다. 모든 게 좋은 게 좋은 식의 평화가 아닌, 아닌 건 아니라서 갈등을 감당해야하는 평화다. 여기서 우리는 남들에 라고 할 때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이러한 결단은 단순히 무엇을 하지 않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는다. 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과 깊은 사귐을 위한 한 걸음이라면 예수님과 좀 더 깊은 사귐을 위한 무엇을 해야 하는 다음 발걸음이 필요하다.

 

다시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 발견한 분명하고 절대적인 진리 때문에 이제 세상이 마냥 편하게 느끼거나 자신에게 늘 만족할 수 없는 경험이다. 경험은 말이 아니라 체험이다. 시편기자의 고백처럼 꿀보다 더 단 말씀은 맛보는 것이지 이론적으로 달 것이라고 추측하는 게 아니다. 즉 말씀 따라 구체적인 삶을 사는 과정에서 우리는 갈등을 경험하면서 동시에 꿀보다 더 단 하나님의 말씀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갈등이라는 불편함 속에 감춰진 진리를 발견하는 기쁨은 좁은 길이다. 많은 사람들이 좁은 길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만 정작 좁은 길로 가는 사람은 적다. 불편하지 않는 비결은 단 하나.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된다. 우린 지금 어떤행동으로 무엇이 불편한가? ‘어떤무엇으로 당신이 그리스도인임을 확인하고 세상에 드러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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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 크리스천
데이브 톰린슨 지음, 이태훈 옮김 / 포이에마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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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하나님의 자녀인가? 교회 가는 사람?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은 좀 더 정교한 기준을 제시한다. 그 기준은 명확하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걷는 사람! 교회는 예수님을 따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든든 지원 공동체. 예수님을 따르는 길 위에는 다양한 삶의 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걸어간다. 제도화된 종교와 교회 전통은 자칫 다양한 삶의 방식을 하나로 만들 수 있다. 다양함을 하나로 만드는 것만큼 폭력적인 게 어디 있을까.

 

다양한 삶의 방식 속에서도 공통 원리들이 있다. 몇 가지를 살펴보자. 먼저는 사랑이다. 사랑은 이웃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사랑은 자신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자기 사랑은 다른 말로 자기 인정, 자기 소중함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보다 사랑하기 힘든 대상이 바로 자신이다. 우리는 있는 모습 그대로인 나를 받아들이기 힘들어 한다. 그래서 환상 속에 사는 나를 만들어 사랑한다. 분명한 건 나를 사랑하지 못하면 이웃도 사랑하지 못한다.

 

자신을 사랑할 때 비로소 남들도 나를 사랑하게 된다.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알 때 매 순간이 소중함을 깨닫는다. 작은 일들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한다. 크고 작은 일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깨닫는다. 이러한 발견은 범사에 자족할 수 있다. 순간순간 삶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집중력은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을 인정하는 평정심과 바꿀 수 있는 것들을 변화시킬 용기를 만든다. 이러한 변화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좋은 기회가 된다.

 

하나님 나라의 큰 특징은 너와 나사이의 벽이 허물어지는 것이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이방인과 유대인의 막힌 담을 허무는 것으로 설명한다. 우리는 하나 됨을 힘써 지켜야 한다. 현대판 이방인과 유대인의 차이는 어디서나 등장한다. 하나 됨은 차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인정함으로써 이뤄진다. 인정은 구체적인 식탁에서 성만찬 속에서 나타난다. 어디 인정뿐인가? 타인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 용서하는 현장 속에서 차이는 사라지고 하나 됨을 경험할 수 있다. 하나 됨은 이론이 아니다. 체험이다!

 

기독교 전통과 유산은 유익하다. 하지만 오랜 시간 고착되면서 다른 사람을 하찮게 여기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타인을 괴롭힐 수 있는, 왜곡된 복음을 강요할 위험이 생길 수 있다. ‘완전함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폭력이 될 수 있는지 우리는 늘 자신을 살펴야 한다. 이러한 성찰 위에 예수님의 삶의 방식을 따르는 몸부림이 있어야 한다. 몸부림의 현장이 없는 화석화된 신앙을 진짜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책은 당신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선명하고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거울이다. 거울 앞에 선 당신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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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하늘과 새 땅
리차드 미들톤 지음, 이용중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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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믿고 천국 가세요!” 우리가 쉽게 하는 말이다. 이 말대로 예수님을 믿었는데 이제 천국은 어디로 가야 할까? 죽어서 가는 곳이 천국이라면 지금 여기는 어딘가? 계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이 땅에 내려온다고 말한다. 천국은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여기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도 말해야 한다. “예수님 믿고 이 곳이 천국임을 아세요!”

 

그런데 이 곳을 천국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망가졌다. 사람만 망가진 게 아니라 모든 게 망가졌다. 사회, 정치, 전통, 환경, 동물, 음식, 시간과 공간, 역사, 과학, 예술 등 망가지지 않은 것이 없다. 망가진 곳곳에서 신음소리가 들린다. 그래서 고쳐야 한다. 고치는 과정이 바로 구원이다. 이런 맥락에서 구원 대상은 단순히 사람을 넘어 우주적이다. 하나님은 사람만 사랑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신다(3:16).

 

놀라운 건, 하나님이 이 과정에 우리를 참여시키신다는 점이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한다. 왕은 세상의 통치자다. 제사장은 모든 관계의 갈등을 푸는 화해자다. 즉 우리는 왕으로서 세상 모든 관계에서 망가진 문제를 풀어내는 제사장이다. 다른 말로 우리는 거룩한 산 제물이다. 망가진 세상을 본 받지 말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자신의 삶으로 보여줘야 한다. 이러한 삶의 현장이 예배며 곧 천국이다.

 

우리는 몸의 부활을 믿는다. 장차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의 몸을 완전하게 회복시키실 것이다. 몸의 부활을 믿는다는 말은 보이는 세상을 심판받아 멸망할 대상이 아닌 회복될 소중한 대상으로 여긴다는 말이다. 그러니 망가진 곳곳을 보며 외면할 수 없다. ‘구체적으로 어떤 게 망가졌고 현실적으로 어떻게 고칠 수 있는 지 고민하며 도전한다. 천국은 무한도전이다.

 

이러한 수고는 완성될 천국에 대한 기대없이 불가능하다. 성경이 보여주는 천국은 자유, 해방, 화해, 안식, 기쁨, 누림이 있는 곳이다. 우리는 세상 모든 영역에서 이 날이 오기를 꿈꾼다. 꿈은 현실을 살아가는 힘이 된다. 물론 과잉 기대는 우리를 쉽게 좌절시킨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7:23)! 조급하지 마라. 하나님에게 천년은 하루다. 비록 시간 이해가 다르더라도 때가 되면 이뤄질 것이다. 좌절금지!

 

물론 조급함만 있는 게 아니다. 둘로 쉽게 나누려는 성급함도 있다. 성과 속, 개인과 사회,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으로 나누는 것은 천국을 축소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하나님 백성 안에서도 우리그들로 나눈다. 아마 그곳에도 자유, 화해, 안식, 기쁨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 함께 할 수 없는 곳이라면(아무리 좋아도!) 천국이 아니다. 천국을 가장한 자기만의 성, 바벨탑이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다. 천국은 나를 통해 드러난다. 망가진 세상 밖이 아닌 속에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와 몸부림을 통해 천국이 가까이 오는 것이다. 이미 우린 천국을 경험했다. 망가진 나는 새로운 내가 되지 않았던가! 나를 떠난 나는 없다. 내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나는 다시 태어난다. 이런 맥락에서 너와 내가 있는 곳이 새 하늘과 새 땅이다. 그러니 내가 곧 신천지(新天地)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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