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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정면
윤지이 지음 / 델피노 / 2021년 12월
평점 :

의사들은 술·담배를 안 할 것 같지만, 의외로 많은 의사가 업무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마시고 피운다. 누구보다 흡연이 건강에 좋지 않음을 머리로 이해하지만, 신체적·정신적으로 받는 스트레스를 제대로 풀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신명칭은 신경정신과라고 불린다. 뜬구름같은 마음을 고치는 병원이 아니라, 우리의 호르몬 불균형, 신경 물질대사의 이상으로 겪는 정신적 괴로움을 주로 치료하는 병원이다. 물론, 전문적으로 대화를 통해 상담으로 치유를 하기도 한다.
“아무리 좋은 말도 계속 반복적으로 들으면 싫증이 난다.” 막 이혼한 친구에게서 전화가 와서 자신의 하소연을 내뱉는다. 나는 친구니까 위로가 되는 말들을 건네고, 전 남편에 대해서 막 욕을 한다. 그러면, 친구가 위로될 것 같지만, 어느 사이 시간이 지날수록 친구와 말싸움을 하게 된다. 보통 이런 경우를 한두 번은 겪어 봤을 것이다. 나는 너를 위로하고자 하는 말인데, 너는 왜 내 말을 그렇게 받아들이니? 상대방은 내가 아니다. 아무리 좋은 말도 반복적이 되면 거부감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 사람이다. 이런 전화가 왔을 때, 가장 현명한 방법은 아무런 조언 없이 공감해주고 계속 들어주는 것이다.
『어둠의 정면』 소설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주인공은 신경정신과 의사이며, 우울증이 심해져 자살을 생각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 상태로 현장에서 계속해서 비슷한 증상을 가진 환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환자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어떤 배신감을 느낄까? 자신의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방문한 의사가 자살을 시도하려는 환자라니 말이다.
얼마 전 읽은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라는 임세원 교수의 마지막 책이 생각나는 소설이다. 임세원 교수는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살인 사건’의 의사자이며, 20년 동안 환자들을 진료한 전문의이다. 그의 책에 이러한 고백이 나온다. “하지만 어느 날……. 느닷없이 통증이 시작되고 뒤이어 우울증까지 심해지자. 나 역시, 죽고 싶어졌다.” 환자를 돌보며, 자신 또한 환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동화되고, 신체와 정신이 자신도 모르게 망가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사고가 일어나 사망하기까지, 의문의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자신이 극단적인 생각을 하면서 ‘막연한 희망’이 아닌 ‘근거 있는 희망’이 있어야 자살하려는 사람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임세원 교수는 ‘자살 예방프로그램’을 공동연구하여 현장에서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게 된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 보자. 주인공은 이미 우울증과 극단적 자살이라는 설정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가 죽지 못하는 이유를 말하는데, ‘살아남은 아내가 걱정되어서라고 말한다.’ 얼핏 보면 죽지 못하는 이유일 것 같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않다. 극단적인 자살에 이르는 사람들의 궁극적인 이유는 ‘살고 싶다’라는 극적인 반전이다. 그러므로, 주인공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못하는 것은 결국 자기애에 있는 것이다.
사람은 언어에 지배당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깡패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무엇인가? ‘의리’이다. 결국, 형님·아우 하다가 배신으로 자리를 빼앗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들에게 의리는 곧 배신이라는 말이다. 정치인의 말을 살펴볼까? 정치인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국민과 서민이다. 그러나, 그들의 삶 어디에도 국민을 위한 일이나, 서민의 마음을 아는 경우는 없다. 솔직하게 자신의 권력욕과 명예욕에 정치한다고 하는 것이 솔직한 것이다. 그렇게 ‘국민’을 외치는 정치인들은 세금 횡령, 비리, 각종 사건에 연루도 되어 국민을 배신하게 되는 것이다. 가장 정직한 정치가가 가장 판을 엎는 가장 큰 사건의 주인공이 되는 경우가 많다. 언어는 자신을 지배하는 감옥이기 때문이다.
“낯설지만 다시 보면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 출판사의 소개 글처럼 의사도 사람이다. 그들도 문제가 있고, 욕심이 있고,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한다. 학창시절 조금 더 암기력이 좋아서 의대에 진학했을 뿐이다. 우리 사회에는 학력·직업 등을 막론하고 가장 인간적인 본성은 누구나 비슷하게 존재한다. 세상에는 ‘완벽’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으며, 아직 ‘온전’하게 자신의 삶을 만족해하는 사람도 드물다. 극단적인 선택은 필멸의 존재가 가지는 창조주에 관한 유희로 생각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