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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인문학 - 위태로운 존재들을 위한 견고한 철학적 기초
마틴 하글런드 지음, 오세웅 옮김 / 생각의길 / 2021년 11월
평점 :

이 책은 우리 자신의 인생철학을 세울 수 있는 견고하고 일관된 기초를 제공하기 위해 쓰였다고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에게 무엇이 중요한지를 이해하기 위한 시간, 우리 자신을 배우게 할 시간, 우리에게 진정으로 유의미한 행위가 무엇인지를 탐구할 시간을 제공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마틴 하글런드(Martin Hagglund, 1976년~46세) 스웨덴 출신으로 철학자, 문학 이론가 학자이며, 예일 대학교의 비교문학과 인문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미국 최고 명문대에 젊은 나이에 교수직을 맡을 정도면 소위 천재라고 불릴만한 인물일 것이다. 2008년 『급진 무신론』, 2012년 『죽어가는 시간』, 2019년 『내 인생의 인문학』 의 3권의 책을 출간했고, 책의 제목에서도 보다시피 담대하고 파격적인 목소리는 내는 철학계의 모더니스트 스타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말처럼 고전은 고전의 시대의 것이고,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말로서 들린다.
『급진 무신론』을 읽지 못했지만, 존경하는 리처드 도킨스 교수의 책을 자주 접한 나로서는 대충의 느낌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중세와 근대까지의 교회의 비과학적이고 비상식적인 일들은 엄청나게 많았다. 심지어 아직도 가톨릭에서는 수백 년 전의 구법이 실행되고 있고, 여성 사제(신부)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사랑과 관용의 종교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말이다. 종교에 가장 이용당하기 쉬운 사람들은 이성적으로 무지한 사람들이 대부분 대상이 된다. 나는 어릴 적부터 교회에서 많은 봉사활동을 했고, 꾸준히 공동체 안에서 선을 추구하였지만, 결국은 찾을 수 없었다. 어느 순간 깨달은 것은 ‘신은 존재한다’ 하지만 누구도 신을 증명하지 못한다. 즉, ‘불가지론적 유신론자’라고 스스로 말한다. 그래서 신의 대리인이라 칭하거나, 종교적인 직업의 가진 사람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신이 아니고 인간이기 때문이다.
『내 인생의 인문학』 하글런드 교수의 20년 내공이 집약된 최신의 서적이다. “실존적 불안은 우리의 정신적 자유의 증표다”처럼 어려운 말을 사용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책의 핵심적인 단어는 ‘생존’과 ‘번식’의 두 가지라고 본다. 어떤 과학자, 철학자, 종교학자도 사람이 ‘왜 태어나고 사는지’ 답한 사람은 그 누구도 없다. 그리고, 우리의 설계도에 확실하게 각인된 모든 생물의 공통점 ‘번식’을 이성적으로 거부하는 몇몇이 있을 수 있지만, 대세를 거스르는 것은 종의 종말을 의미한다. ‘생존’을 위해 죽음, 상실, 불안, 두려움, 위태로운 삶의 여러 요소를 철학적으로(이성적으로) 구체화하여 더욱 명확하게 하자는 이야기로 들린다. 막연하게 살아야 한다. 보다는, 목표와 이유를 가지면 더욱 구체적인 삶의 모습이 나올 테니 말이다.
“믿음”, “사랑”, “책임” 이런 말들이 우리가 인생을 살 가치가 있다는 믿음을 줄 수 있는 말들일까? 때로는 문명적,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명제에 갇혀, 우리 인간의 본질이 묻혀버린 느낌이 들 때가 많다. 극소수의 인간은 이성적인 판단으로 위의 단어들을 위해 생존을 희생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삶이라는 것은 어디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이라는 것에 대항하며 버티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근원적인 욕구인 ‘번식’을 가장 저해하는 요소는 자본주의라고 생각한다. 능력주의 능력이 있으면 모든 공동체의 보상을 당연히 쓸어가야 한다는 생각 말이다. 생물은 본능적으로 짝을 찾아 나서는 게 숙명인데, 그것이 문명의 시스템에 의해 순환되지 못한다면 과연 정상적인 사회인가? 1%의 능력을 갖춘 그룹이 99%의 공동체 부를 소유하고, ‘번식’의 기회마저 박탈시키고 있는 상황은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책은 스타 교수에게 맞게 정말 알차고 훌륭한 내용이 많다. 나는 ‘모두가 행복해지는 세상은 결코 만들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생물은 본능적으로 경쟁우위에 서도록 만들어졌으니 말이다. 반면에 인간은 ‘모두가 불행해지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소수의 사람이 사람 대다수를 육체적·정신적으로 몰아넣지 않는다면 말이다. ‘인생이 견딜 수 없거나, 살 가치가 있냐?’라는 질문은 결코 나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생명을 유지하도록 설계되어 태어난 인간에게, 이차부산물인 사회적 가치로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단 말인가? 올겨울 많은 사유가 필요한 분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