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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되지 않는 여자, 애디 라뤼 ㅣ 뒤란에서 소설 읽기 2
V. E. 슈와브 지음, 황성연 옮김 / 뒤란 / 2021년 9월
평점 :

“기억되지 못한다는 저주를 받은 애디 라뤼는 가장 잊지 못할 인물이며, 그녀의 이야기는 믿기 힘든 불멸을 가장 유쾌하게 소환한 이야기다.” 「닐 게이먼」 『파우스트』의 젠더화된 버전이라 책을 소개하고 있다. ‘신’ 혹은 ‘악마’와 ‘선’ 혹은 ‘악’의 개념이 아닌 존재와 거래를 통해 영혼을 내어주고 영생을 얻는 것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얼마 전 읽은 오디세이아의 젠더화된 버전 『키르케』가 생각나는 부분이다. 트로이 전쟁의 주인공 오디세우스의 바다에서 방황하는 대서사시에서 키르케가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 되지 않는다. 심지어 책을 읽은 사람도 키르케에 관한 기억이 없을 정도로 미약하다. 그러나 그녀 역시 한순간의 불꽃이 아니라, 일평생을 살아가는 온전한 존재였던 것이다.
신화와 현대이전의 문학은 거의 모두가 남성 중심의 이야기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 우리가 위대하게 칭송하는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등의 작품에서 백인 이외의 인종은 이름조차 없는 열등한 동물로 묘사된다. 두 작품에서 작중 주인공이 만나는 원주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원래의 언어와 이름이 있었을 것이다. 나치즘과 같은 고의적인 인종차별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대문호조차도 모든 사상을 섭렵하는 것이 아니기에, 자기가 아는 세상만큼 보이고, 자기가 사는 세상의 순리대로 세상을 이해했을 것이다.
「파우스트」 아이큐 200도 모자란다는 독일의 천재이자 문호 괴테의 평생에 걸쳐 써낸 희곡이다. 1774년 처음 집필을 시작하여 사망하기 1년 전인 1831년에 완성되었다. 괴테의 생애와 철학이 온전하게 담겨있는 작품으로 아직도 작품 해석에 대한 여러 논문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섭렵하고도 자살 충동을 느낄 만큼 우울과 환멸에 빠진 파우스트 박사는 악마 ‘메피소트펠레스’의 세상의 온갖 쾌락을 누릴 수 있게 해주겠다는 제안을 받아들인다. 단, 욕망을 충족하는 대신 금구를 언급하면 영혼을 가져가겠다고 했으며, 결국 파우스트 박사는 욕망의 충족 중 금구를 말하게 되고, 악마가 그의 영혼을 가져갈 때 신의 구원으로 모면하게 된다. 신비주의를 넘어서 괴테가 살던 시대의 기독교적 사상의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하며, 결국 인간의 끊임없이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며 신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기억되지 않는 여자, 애디 라뤼』 1714년 프랑스 시골 마을 비용에서 스물세 살 처녀가 숲을 향해 달린다. 아이 셋 딸린 홀아비와 결혼하라는 주변의 강요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불 보듯 뻔한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숲에서 외친 그녀의 간절한 기도에 ‘어둠’이 응답한다. 처녀는 어둠에 자유를 달라고 간청하고, 어둠은 대신 영혼을 달라고 하고, 처녀는 자신이 더는 자유를 원하지 않을 때 영혼을 가져가라고 한다. 이로써 처녀는 영원한 젊음과 불멸을 얻게 되지만, 어둠은 한가지 장치를 하게 된다. 그녀는 아는 사람, 만나는 사람 모두가 시야에서 벗어나는 순간 모두 그녀를 잊어버리게 만든 것이다. 시야가 벗어나는 것만으로 잊힌다는 것은, 그 어떤 안정적인 삶이 허용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심지어, 돈을 받은 여관 주인도 문을 닫고 나가면 그녀를 손님으로 인지하지 못한다. 그녀는 그렇게 300년을 버텼고, 그녀가 살아남는 유일한 방도는 훔치는 것이었다. 영생이란 자유를 얻었지만, 왜 그녀는 기억에 집착했을까? 잊힌다는 것만큼 가장 완벽한 자유는 없는 데 말이다. 이율배반적으로 그녀는 자신의 흔적을 여기저기에 남기기 시작한다. 그림과 음악 속에 자신의 이미지를 남기는 것이다.
파우스트가 진정한 아름다움을 외치거나, 아들린이 기억되지 않는 삶을 포기할 때 영혼은 계약자에게로 빼앗긴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탐구하고도 절망한 파우스트 박사와 돼지우리 같은 삶에서 벗어나 영원한 젊음과 불멸의 삶을 받았음에도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은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인간의 욕망은 하나가 아닌 복합적인 걸 의미할까? 아니면 인간의 욕망은 완전체가 아닌 수정과 보완을 걸치며 완성되어 가는 것일까? 완전체 이전의 욕망은 이토록 위태롭고 위험한 것일까?
인간의 가장 큰 축복인 젊음과 영생을 얻었지만,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세상에 맞서 흔적을 남기고자 하다는 여자의 이야기가 과연 슬플까? 300년 전 1714년으로 돌아가서 홀아비와 집에서 고단하고 비참한 삶을 살지만, 누군가에는 기억되는 삶을 사는 것이 옳았을까? 그녀는 과연 행복한 걸까? 불행한 걸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