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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가 ‘말’해 주는 것들 - 우리는 정말로 진실한 성이 필요한가? 레즈비언. 퀴어. 젠더. 섹슈얼리티
백승진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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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성소수자를 포괄하는 단어로,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인터넥스, 무성애자 등을 모두 일컫는 말이다. 원래의 뜻은 ‘기묘한, ’괴상한‘이지만, 성소수자들이 수용하여 비하의 의미는 사라졌다고 한다. 이후 퀴어학, 퀴어신학, 퀴어영화, 퀴어문학 같은 파생적인 단어들도 생겼다. 퀴어의 유전학적 확률은 3~4%에 이른다. 그러나 여전히 가톨릭이나, 보수단체에서는 중세시대의 주류들처럼 악마로 취급하고 있다. 왜 인간들은 아직도 이 미개한 편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차별을 계속하는 걸까?
「혐오」 싫어하고 미워한다를 넘어서서, 역겹고 구역질 날 정도로 미워한다는 표현이다. 미움과 증오의 그 중간쯤에 위치하는 단어라고도 한다. 증오는 분노의 대상을 해하고 싶은 능동적 공격성을 가지지만, 혐오는 가까이하고 싶지 않다는 거부감의 수동적인 공격성을 가진다고 한다. 가볍게는 우리의 일상에서 혐오하는 음식의 예를 들 수 있겠다. 곤충류의 요리나, 요리법이 잔인한 방식의 요리들을 우리는 혐오식품이라고 부른다. 프랑스인들이 우리의 개고기를 먹는 식습관에 혐오라는 표현을 사용했고, 프랑스의 푸아그라(거위 간 요리)에 많은 사람은 퇴출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들어보면 혐오라는 것은 잘못된 것들에 대한 우리의 수동적인 공격의 표현이고, 마치 몸 안의 면역체계처럼 사회를 견제하는 표현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책은 전반적으로 혐오를 인종, 성소수자, 성별, 종교, 나이, 장대, 국가, 민족, 법률, 인터넷 등 많은 부분에서 괴물이라고 칭하며 규탄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
“나는 누군가 내가 게이라는 사실을 발견해서 해고할까 두려워” 만약 당신이 중세 유럽에 태어났는데, 전 인류의 10%에 해당하는 왼손잡이라면 마녀라 불리며 불에 타 죽을 수 있을 것이다. 중세 기독교에서는 왼손잡이를 악마로 취급했고, 동양에서도 『예기』에서 자식이 혼자 밥을 먹을 수 있게 되면 오른손을 쓰게 가르치라고 한다. 문화가 아닌 유전학적인 왼손잡이를 왜 이토록 혐오하고 차별해 왔을까? 게이는 유전학적으로 동성과의 관계를 선호하는 사람들이다. 누군가에게 폭력적이나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데 왜 기업에서는 해고할까?
「가톨릭」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개신교, 가톨릭) 지구에서 가장 많은 신자를 가진 종교 중 하나이다. 전 세계적으로 13억 정도의 신자를 가지고 있으며, 북유럽을 제외하고는 서유럽의 중심적 종교이다. 이 가톨릭에는 아직도 변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 여성의 낙태금지, 여성 사제(신부)가 없고, 여러 가지 모순적인 차별이 존재한다. 아직도 중세적인 구법을 신성시하며 고치려고 하지 않는다. 일부 개혁적인 사제들이 여러 방면에서 노력을 하나, 거대한 권력으로 고인 그들을 쉽게 바꿀 수가 없다.
「이슬람」 단일 종교로는 세계 최고의 신자를 가진 종교이다. 율법이라는 핑계로 여성이나 소수자에게 가장 부당한 처우를 하는 종교이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성폭행을 당한 여성을 몸가짐이 바르지 않다는 이유로 태형 200대를 내린 사건은 아직도 유명하다. 여성의 참정권이 보장되지 못한 것도 존재하고, 최근에서야 운전면허를 취득할 수 있을 만큼 차별이 심한 종교이다. 80억 인구 중에 3/1에 해당하는 31억의 사람들이 아직도 이런 편견과 차별로 여성과 소수자를 대하고 있다.
『퀴어가 ’말‘해주는 것들』 단순하게 성 소수자들만이 퀴어일까? 백인들은 유색인종을 차별하고, 백인들은 수백 년 동안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노예로 부리기 위해 화급한 문명으로 취급해왔다. 실제로 찬란한 문명을 꽃피운 아프리카 문명들의 역사를 모조리 지워버리며, 미개한 원주민으로 취급해왔다. 부자가 보았을 때 가난한 사람들은 퀴어다. 정상인이 보았을 때 장애인들은 퀴어다. 학교폭력을 당하는 아이는 그 세계에서 퀴어다. 퀴어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에 의해 만들어진 폭력의 이름이다.
CCTV가 설치되어 있어도 쓰레기가 버려지는 원룸촌의 쓰레기더미에는 누구나 쓰레기를 갖다 버린다. 왜냐하면, 나 이전에 누군가가 버렸기 때문에 나에게 책임이 없다는 논리이다. 우리의 편견과 차별은 이러한 쓰레기 더미와 같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사회가 안전하고 행복해야 한다. 뉴욕의 슬럼가에서 당신은 안전과 행복을 보전받을 수 있는가? 우리의 이런 차별과 혐오의 칼날은 결국은 나에게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