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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 2 - 침략에 맞서 들불처럼 타오르다 ㅣ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 2
이이화 지음 / 교유서가 / 2020년 7월
평점 :

“역사는 세상과 소통하는 실천 학문이에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껴야 해요. 역사를 모르면 미래를 열어갈 수 없어요.” 2015년 경향신문 인터뷰 中
이이화 (대구, 1937~2020, 84세) 역사문제연구소 소장과 서원대학교 역사교육과 석좌교수를 역임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이기도 했다. 2015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노교수의 삶에 대한 철학을 엿볼 수 있다. 동학혁명을 단순히 질서에 반하는 무력시위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역사를 바로 이해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실천의 동력으로 사용하라는 것이다.
조선은 고려의 뒤를 이어 1392년부터 1897년까지 505년간 한반도를 지배했던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전제군주정 국가이다. 고려 말기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기점으로 정권을 장악한다. 새로운 혁명이 왕조를 멸하는 것과 달리, 이성계의 역성혁명은 국가승계의 왕조이기에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무혈혁명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 설계와 기반을 닦은 이가 민본을 근간으로 한 정도전이었다. 병든 부모라 하여 버릴 수 없다는 충신 정몽주의 시체 위에 세워진 국가이다. 유고를 숭상하고 고려말 타락한 불교를 억제하고, 오늘날의 입헌군주제 격인 재상정치를 실현하고자 하나, 태종 이방원에게 도륙된다. 그때부터였을까 조선의 민본은 사라지고, 역사상 최악의 한반도 국가로 이름을 남게 된다.

‘“새 궁궐을 경복궁이라고 이름짓기를 청하오니, 전하와 자손께서 만년 태평의 업을 누리시옵고, 사방의 신민이 길이 보고 느끼게 하옵니다.” <정도전,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8권 中 > 경복궁의 이름을 지은이는 정도전이다. 조선왕조 500년의 궁궐이자 왕이 업무를 보는 제1의 법궁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흥선대원군이 재건했다.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막부정치는 막이 내리고, 왕정복고를 이룩하고 재상에 의한 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유신 이후 서양기술의 빠르게 받아들이고, 외교와 함께 근대적 국가의 틀을 갖추며 강대국의 모습으로 변모한다. 임진왜란의 패배를 한번 겪은 일본이지만, 다시 한번 대륙을 도모할 야망을 키우고 실행에 이른다.

“일본군은 대본영의 명령에 따라 혼성여단 육전대를 인천에 상륙시켜 서울에 진주하게 했다. 1894년 6월 21일, 일본군은 경복궁을 강점해 고종을 유폐하고 흥선대원군을 섭정으로 추대해 개화 정권을 출범시켰다. 남의 나라에서 이른바 불법적인 쿠데타를 단행한 것이다.” 한반도의 역사는 999번의 외침을 당했으나, 한 번도 주권을 상실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조선은 실리가 아닌 명나라에 대한 유학의 사대를 하며 ’친명배금‘의 노선을 택한다.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명과 주변국을 정리하는 청에 대해서 외교조차 시도하지 않았다. 인조 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남한산성에 포위당해 항복하고, 평복의 차림으로 끌려 나와 조선왕은 항복의 절을 하게 된다. 지금 또다시 쇄국정책으로 나라를 고립시킨 조선왕실은 일본에 의해 주권을 상실하게 된다.

청일전쟁 도중 경복궁을 점령하고 갑오개혁을 시행하자, 전봉준은 ’척왜근왕‘을 외치며 동학 농민군을 모았다.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 북진을 시작하였으나, 기관총을 비롯한 근대 무기와 월등한 조직력을 갖춘 관군과 일 분 군에게 대패한다. 일본 침략자를 몰아내고 주권을 되찾고자 친 것은 양반이 아닌 민초였다. 러나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에 끝이 나게 되고, 전국에 걸쳐 대량 학살이 자행되어 그야말로 지옥도가 펼쳐지게 된다. 그 하수인들은 일본군의 힘을 가지고 민초에 복수전을 펼친 양반들이었다. 전봉준은 1895년 3월 29일(음력) 사형을 선고받고 교수형으로 생을 마친 후 참수되어 효수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