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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 1 - 조선 백성들, 참다못해 일어서다 ㅣ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 1
이이화 지음 / 교유서가 / 2020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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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세상과 소통하는 실천 학문이에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껴야 해요. 역사를 모르면 미래를 열어갈 수 없어요.” 2015년 경향신문 인터뷰 中
이이화 (대구, 1937~2020, 84세) 역사문제연구소 소장과 서원대학교 역사교육과 석좌교수를 역임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이기도 했다. 2015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노교수의 삶에 대한 철학을 엿볼 수 있다. 동학혁명을 단순히 질서에 반하는 무력시위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역사를 바로 이해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실천의 동력으로 사용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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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잊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것은 헛소리예요. 인류는 과거를 기억하면서 미래를 만들었어요. 예를 들어 6·25 동란으로 얼마나 많은 가정이 파탄 났어요? 그래서 우리가 전쟁은 더 하지 말자고 하는 거예요.” 노교수의 이 말을 들으면서, 아나톨 프랑스가 생각이 났다. 노벨문학상 100주년 기념으로 발간된 책이 있었는데, 세계 1차대전을 겪은 아나톨 프랑스가 평화를 외치며 고뇌하는 글이었다. 인생의 고난을 겪으며 지켜본 노교수와 백 년 전의 작가와 수천 년 전의 철학가는 인간의 행복을 보는 시선이 같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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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는 기원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며, 에피쿠로스 학파의 창시자이다. 300권이 넘는 저술 활동을 했는데, 전해지는 것은 몇 권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에피쿠로스 학파 철학 대부분은 후대 추종자들의 해설에 유래한다고 한다. 학파의 철학 목적은 행복하고 평온한 삶을 얻는 데 있었다. 평정, 평화, 자유, 무통 등의 행복의 조건에 들어간다고 한다. 쾌락과 고통은 선과 악의 척도가 되며,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신은 인간을 죄인으로 보지 않으며, 우주는 무한하고 영원하다고 말했다. 그의 철학 중에 세상의 모든 현상은 궁극적으로 빈 곳을 움직이는 원자들의 움직임과 상호작용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기원전의 철학자가 세상을 미시적으로 해석한 부분은 지금 생각해도 놀라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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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은 1894~1895년 동안 농민들이 무력봉기한 일을 말한다. 반란이란 말을 쓰지 않는 것은 역사가들의 시선에서도 옳은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반란은 정부체계나 지도자에 반대하여 내란을 일으키는 것이지만, 혁명은 사회체제를 폐기하고 한층 고도의 사회체제를 세움으로써 근본적인 전환을 가져오는 것을 말한다. 반란은 특정 집단의 욕망과 이기심으로 발생할 수 있지만, 혁명은 자연적으로 인간사회 본연의 생물학적 특성이다. 인류는 유인원보다 물리적 힘이 약하다. 또한, 같이 진화한 네안데르탈인보다 뇌도 작았으며 약했다. 일부의 역사학자나 심리학자는 말한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현 인류가 살아남은 이유는 협력과 소통에 있었다고 말이다. 인류는 서로와의 소통을 넘어 개들과도 소통하여 협력하여 사냥했다고 한다. 결국, 호모 사피엔스에게 협력과 소통하지 않는 지배층들은 진화를 방해하는 암과 같은 것이다.
『이이화의 동학동민혁명사』는 총 3권에 걸쳐 동학혁명에 대해서 사료를 근거로 이야기하고 있다. 1권의 주요 내용은 굶주린 민중들이 농기구 대신 무기를 들고 일어설 수밖에 없었던 필연성을 이야기한다. 가장 큰 요인으로 우선 세도정치라는 당파싸움을 들고 있고, 관직을 매관매직하고, 지방관리들은 잃어버린 재물을 충당하기 위해 농민들을 더욱 핍박하였다. 윗물이 흐리면 아랫물은 썩을 대로 고이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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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이라는 지배계급의 논리가 아닌, 실학의 발전과 나라를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는 정부를 보며 민중의 삶은 더욱 불안해졌다. 굶주림과 침략이라는 두려움 속에 민중들은 스스로 뭉치기 시작했고, 집강소를 통해 마치 프랑스 시민혁명과도 같은 민주주의의 뿌리가 내려지기 시작했다. 인간의 질서와 도구는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필요 때문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당시의 농민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본능적으로 민주주의에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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