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134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대우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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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데려다 에덴동산에 두시어, 그곳을 일구고 돌보게 하셨다.

16 그리고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이렇게 명령하셨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17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18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 19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흙으로 들의 온갖 짐승과 하늘의 온갖 새를 빚으신 다음, 사람에게 데려가시어 그가 그것들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보셨다. 사람이 생물 하나하나를 부르는 그대로 그 이름이 되었다. <창세기 215~19>


 



태초에 땅의 주인은 하느님이었다. 인간은 그 관리를 맡았을 뿐이다. 인간은 그 땅을 쪼개어 자기 이름을 갖다 붙였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산부인과 병원장의 자녀가 아닌 이상 타인의 땅에서 태어난다. 태어날 때부터 땅이 없는 비참한 채로 말이다. 오래전에는 모두가 자유로이 땅을 왕래했다. 힘이 센 자가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땅에다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 힘센 자의 옆에서 아첨꾼들이 귀족이라 칭하며 그 땅을 나눠 받았다. 그렇게 수천 년을 주인행세 하던 그들은 계몽으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주인행세를 하기 시작한 것이 부르주아이다. 지금은 자본주의의 시대이다. 자본가들이 땅에다 자신의 이름을 붙이고, 자신의 땅을 걷는 자에게 통행료를 걷고 있다. 21세기 이전의 발전은 수백 년이 걸렸다. 21세기는 1년이 기존의 백 년만큼이나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세계가 일일생활권이 되었고, 인간들은 자신의 지식을 다 같이 공유하게 되었다. 땅 주인 행세하는 인간들과 가지지 못한 자의 전쟁은 이제 시작되었다. 과거의 역사는 경험론적으로 미래의 모습을 보여준다. 1% 미치지 못하는 가진 자가 99%의 인간들을 가혹하게 착취하였을 때 어떤 결과를 맞았는지 말이다. 땅에는 주인이 있다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땅은 땀 흘려 일하는 자들이 사용해야 할 장소일 뿐이다. 그곳에 흙과 돌로 건물을 짓고, 통행료와 사용료를 받는 것은 죄악이다. 가난한 자들이 왜 천국에 갈 수 없는가? 그것은 조물주 위에 존재하는 건물주가 그 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에는 사말(四末)교리(죽음, 심판, 지옥, 천국)가 있다. 하느님의 숨으로 빚어 만들어진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어 영원한 삶을 잃고 죽음을 두려워하게 된다. 죽음은 공포의 대상이자 삶을 심판받아 지옥이나 천국으로 가는 것뿐이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죽음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니, 이는 인간이 어둠을 극복하였듯이 죽음에 대한 승리를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책에서 말하고 있는 부활이다. 이전의 온전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말이다. 지옥과 천국은 장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지옥은 스스로가 하느님을 거부하고 가는 곳이라고 한다. 즉 두 장소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상태이기도 하다.

 




길고양이의 고단한 삶을 본 적이 있는가? 야생에서의 고양이는 20년 가까이 산다고 한다. 그러나 도시에서의 수명은 1~2년이 채 안 된다. 그것도 살아남았을 때 말이다. 밤에 시끄럽게 울어대고, 오물만 남기는 혐오스러운 존재로만 인식하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래서 작대기로 쫓아내고, 쥐약을 풀어 죽이고, 사로잡아 즙을 낸다. 어느 봄날 집안 마당으로 어미와 새끼 두 마리가 들어왔다. 보통의 길고양이들은 사람을 피한다. 그러나 나를 보는 눈빛은 공포를 넘어선 살려달라는 모습으로 보였다. 그때부터 집 한편에 사료를 놓아두고, 매일 깨끗한 물을 두었다. 새끼들을 돌볼 때는 근처에 가지 않았다. 여름, 가을이 지나고 겨울에는 창고 문을 살짝 열어두고 담요로 잠자리를 만들어 두었다. 길고양이에게 물은 생존의 필수품이다. 항상 얼지 않게 핫팩으로 물을 데워놓았다. 다시 봄이 왔다. 두 마리의 새끼는 무사히 성장했고, 어미는 사람들이 주는 지역을 밥자리라고 하는데, 그것을 새끼에게 양보하고 다시 험한 세상으로 떠난다. 그것이 길고양이의 모성애이다. 사람은 길고양이가 될 수 없다. 하지만 먹이와 잠자리를 주면서 그들의 고단한 삶을 따라가며 알아볼 수 있다. 슬퍼할 수 있고 눈물 흘릴 수 있다. 네흘류도프는 그렇게 시베리아행 행렬을 따르며 농민들의 고단하고 비상식적인 삶을 알게 되었다. 까쥬사를 사랑한 시몬손은 자신의 자리를 버리고 직접 농민이 되어 감옥으로 잡혀들어왔다. 이것이 둘의 차이다.

 


<민중은 죽어 가고, 자신들의 죽음에 익숙해 있으며, 그들 사이에는 죽음이 내재한 생활 방식이 형성되어 있구나, 아이들의 죽음과 여인들의 과도한 노동과 모든 사람의, 특히 노인들의 굶주림이 바로 그건 아닌가. 민중은 아주 조금씩 그런 상태에 빠져들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 두려움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또 그것에 대해 불평할 줄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상태를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다> 자연은 인간 동물 모두의 것이었다. 그것을 인간이 죄 없는 길고양이를 범죄자로 만든 것이다. 100년 전의 부르주아나 자본가의 탈을 쓰고 있는 지금의 건물주 또한 변한 것이 전혀 없다.

 




이 책에서 온전하게 부활하는 사람은 까쥬사 한 명뿐이다. 천국과 지옥은 장소와 상태 둘 다 의미한다고 했다. <그 이유는 죄는 내가 짓고, 벌은 그녀가 받기 때문입니다.> 네홀류도프는 자신의 죄를 반성하고, 까쥬사를 불쌍하게 생각하지만 사랑은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농민이 아니고 귀족의 생태가 이미 뿌리 박혀있기 때문이다. 수년간 남자들에게 몸을 팔아온 까쥬사를 결코 사랑할 수는 없었다. 하늘에서 와인을 따르면 스튜어디스라고 부른다. 지상에서 위스키를 따르면 작부라고 부르며 천대한다. 사람이 직업을 가지면서 자신의 노동과 뇌의 지식을 팔지 않는 것이 어디 있는가? 자본주의 시대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몸을 판다. 그것에 귀하고 천한 것이 어디 있는가? 그것을 정한 것은 1% 안 되는 가진 자들이다. 1% 안 되는 자들 가운데 법조인들은 몸뿐만 아니라, 그들의 양심까지 판다. 우스갯소리로 이런 말이 있다. ‘연탄재 차지 마라. 당신은 한 번이라도 누구를 따뜻하게 해준 적이 있나?’ 이때의 비양심적인 법조인보다 지금은 양심과 상식 자체가 없는 자본의 노예만이 존재한다. 그들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톨스토이는 80의 나이로 농민이 되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폐렴으로 죽게 된다. 그 안타까운 마음과 심정을 담아 네홀류도프에게 자신을 투영했을 것이다. 톨스토이의 삶은 끝났으나 주인공의 삶은 독자로 인하여 끝나지 않았다. 수십년의 삶의 더 남은 네홀류도프는 결국은 농민이 되어 온전한 부활을 하게 될 것이다. 까쥬사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왜 그녀만 온전히 부활했을까? 까쥬사는 몸을 팔 때도 남자들을 위로해준다는 모호한 보람이 있었다. 감옥에 있을 때도 다른 이들에게 친절했고, 억울한 자들을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의 상태는 겁탈당한 그 날의 기억에서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반성을 하고 자신과 결혼을 하겠다는 네홀류도프를 보면서, 자신을 사랑할 순 없지만 애쓰는 모습에 청년 시절의 순수한 그를 보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겁탈한 것은 욕망에 물든 악마가 아니라, 순수한 사랑이었다고 스스로 믿게 되고, 그를 사랑했던 그 당시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까쥬사의 공간은 감옥으로 변함이 없었지만, 그녀의 마음의 상태는 이미 변했다. 부할은 처음의 온전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 했다. 그래서 까쥬사는 부활할 수 있었다.

 


<인간의 내면에는 추악한 야수성이 꿈틀거리지만, 야수성이 그대로 드러날 때 정신생활의 높은 자리에서 그것을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고 인내한다면 원래의 모습대로 남을 수 있어. 하지만 야수성이 미적, 시적 감정이라는 가식적인 외피를 쓰고 경배받기를 요구한다면 그 야수성을 숭배하게 되고 거기에 빠져들어 선악의 구별도 할 수 없게 되지. 그건 정말 무서운 일이야> 인간보다 야수에 가까운 법 집행자들은 이 책에서 그 누구도 부활하지 못한다. 또한, 죄없이 갇힌 농민들도 죽음을 맞이하거나, 지옥의 공간에 그대로 있거나, 부활하지 못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 2540) 주일마다 예배를 나가는 그들은 무엇을 하는 것일까? 자신의 상태가 변하지 않는다면 결코 부활할 수 없다. 다시 한번 세상의 공동체에 어떤 마음과 행동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보자. 많은 생각과 행동의 변화를 불러온 훌륭한 책을 번역 출판해 준 열린책들 출판사에 고마움을 표하며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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