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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감으면 보이는 것들 - 월가 시각장애인 애널리스트가 전하는 일상의 기적
신순규 지음 / 판미동 / 2015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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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서울에서 태어나 아홉 살에 시력을 완전히 잃은 뒤, 눈으로 보는 대신 듣고 느끼고 경험하고 오랫동안 깊이 생각하며 살았다. 열다섯에 홀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고, 하버드, 프린스턴, MIT, 펜실베이니아 등 세계적인 명문 대학에 동시 합격했다. 하버드에서는 심리학을 전공, MIT에서는 경영학을 공부했다.
우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몸이 천 냥이면 눈이 구백 냥이다. 그만큼 세상을 본다는 것은 우리 삶의 거의 전부라 하여도 틀리지 않은 말일 것입니다. 듣고 말하고 느끼고 모든 감각이 중요하겠지만, 특히 그중에 못 보는 만큼의 공포와 답답함을 주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는 어둠이 내리면 세상에 공포가 내려앉았다 하여 동굴로 숨어들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매일 저녁 전등을 켜는 것도 우리 몸에 새겨진 어둠에 대한 공포를 잊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두 번째로 슬펐던 때는 어느 날 내 머릿속에서
엄마의 얼굴이 지워진 것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페이지를 얼마 지나지 않아 저자의 이 글을 보는 순간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백발이 희끗희끗한 동생 진석이 백골이 된 형 진태에게 하는 대사가 있다. 돌아와서 구두 완성한다고 했잖아요.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요.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돌아온다고 약속했잖아요. 왜 이러고 있어요. 말 좀 해요. 50년 동안이나 기다렸는데…. 이 동생한테 뭐라고 말 좀 해요. 그때 형 혼자 두고 오는 게 아니었는데….
50년을 엄마 냄새가 나는 이불을 부둥켜안으며 엄마 얼굴이 생각나지 않는다며 울던 이산가족의 모습이 겹쳐, 나도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이 책의 원고를 쓰던 시점이 2012년경이라고 합니다. 지금 서평을 쓰고 있는 나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같은 나이입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동갑내기 친구로서의 감정을 가지고 읽어 나갔습니다.
『그런데 터무니없는 꿈을 좇는 것에는 확실한 장점이 있다.
서울대에 입학하려면 적어도 공부는 누구보다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학교에서 제공하는 점자 교과서뿐만 아니라,
엄마의 열성으로 만든 점자 전과 참고서까지도 열심히 읽으며 공부했다.』
요즘 예능에 자주 출연하는 ‘박군’이라는 가수가 있습니다. 15년의 특전사 부사관 복무를 마치고 가수로서 예능인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중학생 시절부터 시한부 말기 암 판정을 받은 어머니를 병간호하며 스스로 생활비를 벌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전교 회장도 하고, 울산과학고도 우수하게 진학하고 공부했다고 합니다. 서울대에 충분히 가고도 남을 똑똑한 인재였지만, 어머니를 위해 대학을 포기하고 특전사 부사관으로 입대하게 됩니다. 저자의 목표는 서울대였고 어머니는 조력자이자 기회였지만, 박군에게는 어머니가 삶의 목표였고 특전사가 기회였습니다. 이 부분을 읽을 때는 저자가 너무 눈으로 보이는 세속적인 성공만을 삶의 가치 기준으로 삼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조금 아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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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이렇게 성장, 만남, 결혼, 가족이라는 소주제를 가지고 자신의 삶을 써 내려가고 있습니다. 멀쩡한 사람들도 해내지 못할 일들을 노력으로 이룩해내고, 또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도 해냅니다. 저자가 주는 많은 영감과 느낌 중에 눈을 감고 거리를 걸으면 어떠할까? 생각으로 익숙한 초등학교 담벼락을 3분 정도 눈을 감고 걸어봤습니다. 제일 먼저 두려움이 엄습해왔지만, 이내 심호흡 후 첫발을 내디디며 잘 포장된 길이라 안전하다는 안심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 그 누군가의 노동과 고생으로 이렇게 안전한 길을 포장해놓았구나, 게다가 내내 잡고 걸은 담벼락 살들은 날카로운 부분 하나 없이 매끈했습니다. 저자가 말한 것이 이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일상에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노력과 그 결과물 속에서 가치 있는 삶을 꿈꿀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15년 동안 윤리적인 비건을 하고 있습니다. 신념에 의한 일이었지만, 어느 순간 나에게만 보이는 게 있고, 들리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올린 야식 사진에 ‘좋아요’를 볼 때 공장식 축산에 비참하게 살다간 동물들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지하철 노약자석에 앉은 젊은 아가씨가 배가 불러오지 않아도 산모임을 알아채고 배려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동차를 버리고 1시간 이내의 거리는 걷거나 뛰어다니고, 무거운 짐이 없으면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계단을 사용합니다. 누구의 시선이나 격려가 아닌 온전히 저만의 기쁨으로 말입니다. 최소한 내가 걸어 지나간 길은 공동체를 위한 마음이 있었고, 더불어 지구를 아끼는 작은 행동이라도 했다는 뿌듯함입니다.
책을 읽는 지금 친구 같은 저자의 10년 후의 이야기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것들’이라는 신간이 출간되었습니다. 책의 후미에 등장하는 받은 것을 되돌려 주는 삶에 얼마만큼의 발전이 있었는지 알아보려 합니다. 새로운 것을 보게 해준 저자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며 감사의 마음을 되찾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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