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행복론 동서문화사 월드북 34
카를 힐티 지음, 곽복록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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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과 전혀 다른 전개에 깜짝 놀랐다. 행복론 이란 제목이 붙어있기에 당연히 '행복'에 대한 사상적 역사를 알려주거나, 행복을 위한 마음 가짐의 자세를 가르쳐 주는 책이 아닐까 예측했었다. 허나 달랐다. 이 책은 어떤 이론을 말하는 책이 아니라 잘 쓰여진 자기계발서였다.


이 책은 행복을 추상적인 마음 상태로 정의하지 않는다. 저자가 말하는 행복은 다음과 같다.

자연적 휴식에 의해서만 중단될 뿐인 끊임없는 유익한 활동 상태야말로 이 땅에서 주어지는 최상의 행복이다. 인간은 이것 이외의 어떠한 외적인 행복도 바라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끊임없는 유익한 활동 상태란 무엇인가? 바로 이다. 힐티는 행복을 위한 필요 조건인 일에 대한 중요성을 말하고, 나중에는 일을 잘하는 요령에 대해 설명한다. '행복'이란 주제에 대한 사상적 역사나 중요한 논의, 그런거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이다. 그런데 이 부분이 내게 얼마나 신선하게 다가왔던지. "행복론"이란 제목 아래 일에 대한 중요성과 일에 대한 요령을 설명하고 있다니! 그리고 그 내용이... 훌륭했다.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나 논지를 꼼꼼히 제시하진 않았지만 그의 통찰은 훌륭했으며 무엇보다 글의 밀도가 좋았다. 필요 없는 문장이 없었으며 각 문단은 적절하고 단단하게 압축되어 있었다. 게다가 오랜만에 접하게 된 자기계발서라 그런지 가슴이 두근 두근 했다. 남들이 모르는 비법을 채득한것 같고, 빨리 일하고 싶고, 회사 사람들에게 이 책을 모두 읽게 만들고 싶고!


자신이 수정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대상은 바로 자신이라고, 그리고 당신을 그리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자기계발서의 그 맛이란 참 달콤하다.

우리들이 이미 하나의 작은 세계이고, 확고한 원리와 좋은 습관으로 먼저 이 작은 세계를 극복하지 않는한, 어쩌면 세계를 극복하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참 달달하다. 이게 자기계발서를 읽는 맛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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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에스프레소 노벨라 Espresso Novella 6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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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SF소설이다. SF 소설을 읽을 때 기대하는 몇가지가 있다. 뛰어난 상상력, 독창적인 스토리, 디스토피아적 분위기, 문제를 해결해가는 주인공의 솜씨. 허나 이 책의 줄거리는 내 기대를 교묘히 만족시키고, 또한 교묘히 비껴나가며 전개되었다. 이 책은 SF 장르로 쓰여진 육아서이다. 내가 본 어떤 육아 서적보다 훌륭한 육아 안내서 이다.


의식을 가진 인공지능은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까? 우리의 의식은, 우리의 자아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저자가 초점을 두는 이 질문의 해답은 바로 '경험'이다. 자유의지, 의식을 가진 인공지능을 구현하려면 그 소프트웨어의 토대 위에 경험을 차곡 차곡 쌓아야 한다. 그 경험이 어떻게 쌓이는 가에 따라 각 소프트웨어는 특유의 개성을 가진 개체로 존재할 수 있다. 그 개체가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결정하는 것은 경험이고, 이 경험을 바른 방향으로 쌓도록 유도 하는 것이 바로 육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육아 서적이 된다.


의식을 가진 소프트웨어 객체가 세상에 나왔을때 사람들은 소프트웨어 객체를 키우며 즐거워한다. 다른 이용자들에게 피드백을 얻고 노하우를 공유한다. 객체가 자라며 하는 행동들을 보며 기뻐한다. 하지만 예전 다마고찌를 정성스레 키운 뒤 쓰레기통에 버렸던 우리들의 과거처럼 그들도 객체에 관심을 잃고 만다. 바른 경험을 쌓게 하기 위해, 그리고 그 경험을 지속되게 하는 것은 오직 애정인데, 쉽게 롤백이 가능하고, 쉽게 삭제가 가능하고, 쉽게 복사가 가능한 소프트웨어 객체에게 그 애정을 깊게 갖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처음부터 마지막 까지 지속적인 애정을 갖고 객체를 돌보는 사람들이 소프트웨어 객체의 창조에 큰 역할을 한 사람들이란 것을 주목해야 한다. 창조에는 당연히 노력과 땀과 고통이 들어가 있는 법. 우리가 자식을 다마고찌 버리듯이 버릴 수 없는 것은 자신이 자식의 창조자이며 자식은 육아라는 매우 피곤한, 끝도 없는 노동 끝에, 끝이 없는 노동 끝에서 매시간 마다 새롭게 얻어 지는, 세상에 단 하나 뿐인 소중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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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측과 논박 1 - 과학적 지식의 성장 현대사상의 모험 6
칼 포퍼 지음, 이한구 옮김 / 민음사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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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경험론과 고전 합리주의

지식의 근원은 무엇인가?

가장 생각하기 쉬운 저 질문의 첫번째 응답은 '경험론'으로 알려진 것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은 지식을 '경험'으로 얻는 다는 주장이다. 이 응답에서 지식의 근원은 경험, 또는 '관찰'이다. "불에 가까이 가는 것은 위험하다." 라는 지식의 원천은 불에 가까이 갔다가 큰 화를 당한 사람의 경험, 또는 그것을 관찰한 사람의 증언이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생각하면 이 주장은 과연 받아들여질 만하다. 이 경험론에서는 '귀납법'이 진리를 밝히고 새로운 진리를 얻기 위한 중요한 도구가 된다.

데카르트를 필두로한 합리주의는 경험론보다는 바로 떠올리고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잘 알려진 데카르트의 말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는 이 진실에서 모든 이야기를 출발한다. 그 진실이란 '생각'한다는 것, 곧 인간에게 '지성'이 있다는 그 진실이 인식의 출발점이 된다. 그 '지성'의 대표적 예가 인간의 모순을 판별할 수 있는 능력과 3단 논법이다. 데카르트는 그 '지성'이란 능력에 '신'의 권위를 더한다. 신은 진실하고 우리를 속이지 않기에 신이 우리에게 준 선물 '지적 직관'도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데카르트의 주장에서 지식의 근원은 '인간의 지성'이 된다. 이 합리주의에서는 '연역법'이 진리를 밝히고 새로운 진리를 얻기 위한 중요한 도구가 된다.

낙관적 인식론의 한계

한편 경험론과 합리주의는 거대한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인간은 진리를 식별하고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라는 교설이다. 또는 "진리는 명백하게 드러난다"는 교설이다. 이것을 낙관적 인식론이라 명명하자.

진리와 거짓으로 하여금 서로 대결케 하라. 자유롭고 공개적인 대결에서 진리가 불리해진 것을 본 자가 누구인가? 존 밀턴

하지만 현 시대를 살고 있는 나는, 또는 우리는 이런 낙관주의에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과연 진리는 명백하게 드러나는가? 그렇게 드러난 진리를 우린 잘 소유하고 있는가? 사실 그렇지 않다. 진리란 대게 손에 넣기 어려우며 일단 발견했다 하더라도 다시 잃어버리기 쉽상이다.

낙관적 인식론을 완전히 받아들이면 사람은 성찰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기 어렵다. 그는 자신에게 한번 주어진 진리 - 자신의 경험을 통해 얻었거나 자신의 지성을 통해 연역한 진리 - 를 다시 성찰하지 않고 그것을 모두에게 적용하려 한다. 때문에 이 시대의 진정 악한 이들은 자신이 한번 획득한 진리에 신적 권위를 부여하는 사람들이다.

낙관적 인식론 공격하기

낙관적 인식론에는 '지식의 근원'으로 진리의 근거를 삼으려 한다는 문제가 있다. 예로 경험론을 공격해보자. 경험론은 우리가 어떤 주장을 할때 다음 질문을 한다.

  1. 당신은 어떻게 해서 알게 되었는가?
  2. 당신의 주장의 근원은 무엇인가?
  3. 당신의 주장의 기초를 이루는 '관찰'은 무언인가?"

그러나 우리의 주장 대부분은 직접적인 관찰이 아니라 온갖 종류의 권위에 기대고 있기에 우린 보통 위와 같은 경험주의자들의 질문에 '출처'란 권위를 댈 것이다. 경험주의자는 멈추지 않고 계속 질문할 것이다. "그 출처는 믿을만 한가? 그 출처의 원래 출처는 무엇인가?" 젠장, 출처가 '신문'이라면 우린 그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신문사에 전화를 해 기사의 본 출처를 알아내야만 한다. 잠깐, 그렇게 해서 정보의 '근원'을 알아냈다 하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경험론자는 질문을 계속 해야만 한다. 내가 건 신문사 전화가 과연 '진짜' 신문사 전화번호인가? 그 정보의 '근원'의 출처는 과연 믿을만 한가?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결국 이렇게 경험주의적으로 계속 질문을 이어 나간다면 우리가 직접 관찰할 수 없는 사실들은 결코 검증 될 수 없다. 근원을 찾아 내려는 과정 속에서 다른 종류의 검증된 지식이 동원되야 하기 때문에 결국 무한 소급에 빠져버린다.

이런 멍청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사실 위와 같은 작업은 완전히 상식에서 벗어나 있다. 어떤 주장에 대해 의문이 생길 경우에 정상적인 절차는 그 근원을 찾기 보다는 그 주장을 검증하는 것이다. 만약 독립적인 확증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린 근원에 대해선 신경쓰지 않고 그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다. 또는 모순된 증거를 발견한다면 우린 그 주장을 반대할 수 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지식의 근원을 찾는 것은 무익한 노력이란 것이다. 왜냐면 그 어떤 지식의 근원도 본질적 권위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기원의 문제가 아니라 타당성의 문제이다. 우린 다르게 질문해야 한다.

우린 어떻게 오류를 검출하고 제거할 수 있는가? 우린 어떻게 검증할 수 있는가?

내가 어떤 주장을 했을때 이렇게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알게 되었는가, 당신 주장의 근원이나 근거는 무엇인가" 난 이렇게 답할 것이다. "나는 그것에 대해 알지 못한다. 내 주장은 어쩌면 '짐작'에 불과 했다. 그러나 당신이 만약 내 주장, 내 해석에 관심이 있다면 그것을 엄격히 논박해 달라. 난 전력을 다해 당신이 내 주장을 논박하도록 도울 것이다."

정리하며 마치자.

  1. 지식의 궁극적인 근원이란 없다. 우린 정보의 출처보다는 사실 자체를 검토하는 것이 옳다. 또한 주장의 타당성을 검토해야 한다.
  2. 지식의 진보는 그 이전의 지식을 수정함으로써, 검증함으로써, 논박함으로써 이루어진다.
  3. 명석함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지만 정밀성이나 정확성은 그렇지 않다. 우리의 문제가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정확하고자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4. 2번을 반복해야겠다. 지식의 진보는 검증과 논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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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측과 논박 1 - 과학적 지식의 성장 현대사상의 모험 6
칼 포퍼 지음, 이한구 옮김 / 민음사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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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퍼는 1장에서 인간이 완전히 진리를 밝혀낼 수 있다는 낙관적 인식론에 반기를 든다. 진리란 인간에게 완전히 밝혀질 수 없으며 인간이 획득한 진리는 손 안에서 사라지기도 한다. 어느 순간 손 안에서 사라질 진리라면 그것은 진리라 부를 수 없게 된다. 때문에 포퍼는 해석이란 단어를 즐겨 사용한다. 우리는 단지 해석할 뿐이다. 그리고 그 해석은 어느 순간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다. 해석에 진리란 권위를 부여할 수 없기에 우린 그것을 의심하고 검증 할 수 있고 또한 그렇게 해야만 한다.

포퍼는 낙관적 인식론의 한계는 지식의 근원을 통해 지식이 유효함을 나타낼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에 있다고 말한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자.

첫번째

'향수' 소설은 그루누이가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서 버림받았고 아기 몸에서 당연히 나야 할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아 젖을 물렸던 보모가 기겁하고 도망간다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쥐스킨트는 부모의 냄새를 제대로 맡지 못한 아기는 인간의 냄새가 나지 않는 괴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상상으로 그려냈다. 아기 냄새 중에서

위 인용은 "엄마의 냄새가 아이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의 근거로 소설 '향수'를 사용했다. 향수가 저 주장의 근거로 사용될 수 있는지 판단하기 위한 경험론자의 무식한 방법은 파트리크 쥐스킨트를 찾아가 이 해석이 맞냐고 물어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린 굳이 '근원'을 찾지 않아도 위 인용 문장의 근거가 빈약하다는 것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루누이는 정말로 엄마 냄새를 맡지 못했기에 아기 냄새가 없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소설에서 엄마로 부터 바로 버림받은 사람은 모두 아기 냄새가 없어야 하는데 굳이 그루누이만 아기 냄새가 없는 까닭은 무엇일까? 만약 엄마 냄새가 없는 모든 아이가 아기 냄새가 없다면 향수는 완전히 다른 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향수는 그루누이에게 어떠한 특별함을 처음부터 끝까지 부여하고 있으므로 향수를 엄마 냄새가 중요하다는 것의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할 수 있다.

두번째

누군가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관념에 있다. 물질이 거기 있다고 지각하기에 물질이 거기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지각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고 하자. 그런데 컵이 식탁위에 있다고 했을때 나와 내 아내는 동일하게 "컵이 식탁에 있다"고 지각한다. 그 어떤 사람을 데려와도 컵이 식탁위에 있다고 증언할 것이다.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주관적일 수 밖에 없는 개개인의 관념이 어떻게 같은 것을 말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이 질문의 유명한 대답은 아래와 같다.

모든 개개인의 관념은 신의 관념안에 있기 때문에 서로 통일된 의견을 가질 수 있는 겁니다.

참으로 창의적이고 멋진 말이다. 마지막 문장으로서 그의 의견은 모순이 전혀 없고 완결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지성으로 판별해 모순이 없고 완결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진리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럴수 없다. 오히려 저 의견이 의미 없음은 그의 의견이 검증 불가능하고 반증이 불가능하다는 것에 있다. (언젠가 진중권이 토론에서 신경질 조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내가 그걸 어떻게 반박하고, 어떻게 검증합니까!")

좋은 질문하기

사실의 근원을 파악해 주장의 옳고 그름을 판별하려는 시도는 좋은, 또는 효율적인 방법이 아니다. 우린 보다 멋진 질문을 떠올릴 수 있다.

세번째

누군가가 "죽으면 사후세계가 존재하며, 그곳에서 정의로운 신에 의해 우리의 삶이 공정히 평가될 것이다."라는 주장을 했다고 하자. 사실 이 주장은 검증 불가능하다. 때문에 "죽으면 사후세계가 존재하냐?" 라는 주제를 탐구하는 것은 생산적이지 않다. 주장한 자는 성경을 들먹이거나 자신이 받은 계시를 말할 것이고 우린 결코 그것에 완전히 동의할 수 없다. 하지만 "사후세계가 존재한다는 믿음이 어떻게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까?" 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누군가는 그 질문에 대해 "사후 세계는 사람의 이 현실을 보다 좋게 개혁하려는 욕구를 무의식 중에 막을 수 있어. 죽은 뒤에는 모든 것이 공의롭게 재판되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저런 믿음은 기득권에게 유리하게 작용될 것 같아." 라는 답변을 할 수 있을것이고 또 누군가는 "사람들의 도덕 관념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겠는데? 공의롭게 심판받는다는 사실을 스스로 믿는다면 '신'의 기준에 최대한 부합한 행동을 하려 노력할 것이고 이것은 전체 사회에게 이득을 줄거야." 라고 해석할 수 있을것이다. 이처럼 검증 불가능한 영역을 좀 더 검증 가능하고 토론 가능한 영역으로 옮겨오게 만드는 질문이 보다 유익하다.

우린 검증 가능한 질문을 떠올려야 하고 검증 가능하도록 사안을 '해석'해야 한다. 그것이 더욱 유용하고 유익하다.

정리

스스로 진리라 믿는 것에 칼날을 들이댈 필요가 있다. 그건 '해석'에 불과 하기에 파괴되거나 다른 멋진 '해석'으로 진화 할 수 있다. '삼각형의 합은 180도'라는 믿음에 칼날을 들이대보자. 구체 위의 삼각형에 저 말은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유클리드 2차원 공간에서 삼각형의 합은 180도'라는 보다 깔끔한 정리가 탄생할 수 있다. "우주는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라는 믿음에 칼날을 들이댔기에 지동설이 나올 수 있었고 나아가 케플러의 이론이 나올 수 있었다. 칼 포퍼의 말처럼 지식의 진보는 이전의 지식을 재차 검증할 때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더 생각해볼 거리들.

우린 검증할 수 있는 권리를 포퍼로 부터 부여 받았기에 그의 말을 검증할 수 있다. 질문해보자.

  1. 검증, 논박, 기존 지식의 수정만으로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는가?
  2. 우리가 누리고 있는 혜택들의 대부분은 과연 기존 지식의 수정을 통해 온 것인가?
  3. 검증, 논박, 수정만으로는 불충분하다면 우리는 무엇을 통해 보다 나은 진리를 획득하는가. 우린 과연 진리를 획득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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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에
수잰 레드펀 지음, 김마림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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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위있으며, 동시에 굉장히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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