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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측과 논박 1 - 과학적 지식의 성장 ㅣ 현대사상의 모험 6
칼 포퍼 지음, 이한구 옮김 / 민음사 / 2001년 12월
평점 :
고전 경험론과 고전 합리주의
지식의 근원은 무엇인가?
가장 생각하기 쉬운 저 질문의 첫번째 응답은 '경험론'으로 알려진 것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은 지식을 '경험'으로 얻는 다는 주장이다. 이 응답에서 지식의 근원은 경험, 또는 '관찰'이다. "불에 가까이 가는 것은 위험하다." 라는 지식의 원천은 불에 가까이 갔다가 큰 화를 당한 사람의 경험, 또는 그것을 관찰한 사람의 증언이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생각하면 이 주장은 과연 받아들여질 만하다. 이 경험론에서는 '귀납법'이 진리를 밝히고 새로운 진리를 얻기 위한 중요한 도구가 된다.
데카르트를 필두로한 합리주의는 경험론보다는 바로 떠올리고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잘 알려진 데카르트의 말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는 이 진실에서 모든 이야기를 출발한다. 그 진실이란 '생각'한다는 것, 곧 인간에게 '지성'이 있다는 그 진실이 인식의 출발점이 된다. 그 '지성'의 대표적 예가 인간의 모순을 판별할 수 있는 능력과 3단 논법이다. 데카르트는 그 '지성'이란 능력에 '신'의 권위를 더한다. 신은 진실하고 우리를 속이지 않기에 신이 우리에게 준 선물 '지적 직관'도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데카르트의 주장에서 지식의 근원은 '인간의 지성'이 된다. 이 합리주의에서는 '연역법'이 진리를 밝히고 새로운 진리를 얻기 위한 중요한 도구가 된다.
낙관적 인식론의 한계
한편 경험론과 합리주의는 거대한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인간은 진리를 식별하고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라는 교설이다. 또는 "진리는 명백하게 드러난다"는 교설이다. 이것을 낙관적 인식론이라 명명하자.
진리와 거짓으로 하여금 서로 대결케 하라. 자유롭고 공개적인 대결에서 진리가 불리해진 것을 본 자가 누구인가? 존 밀턴
하지만 현 시대를 살고 있는 나는, 또는 우리는 이런 낙관주의에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과연 진리는 명백하게 드러나는가? 그렇게 드러난 진리를 우린 잘 소유하고 있는가? 사실 그렇지 않다. 진리란 대게 손에 넣기 어려우며 일단 발견했다 하더라도 다시 잃어버리기 쉽상이다.
낙관적 인식론을 완전히 받아들이면 사람은 성찰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기 어렵다. 그는 자신에게 한번 주어진 진리 - 자신의 경험을 통해 얻었거나 자신의 지성을 통해 연역한 진리 - 를 다시 성찰하지 않고 그것을 모두에게 적용하려 한다. 때문에 이 시대의 진정 악한 이들은 자신이 한번 획득한 진리에 신적 권위를 부여하는 사람들이다.
낙관적 인식론 공격하기
낙관적 인식론에는 '지식의 근원'으로 진리의 근거를 삼으려 한다는 문제가 있다. 예로 경험론을 공격해보자. 경험론은 우리가 어떤 주장을 할때 다음 질문을 한다.
- 당신은 어떻게 해서 알게 되었는가?
- 당신의 주장의 근원은 무엇인가?
- 당신의 주장의 기초를 이루는 '관찰'은 무언인가?"
그러나 우리의 주장 대부분은 직접적인 관찰이 아니라 온갖 종류의 권위에 기대고 있기에 우린 보통 위와 같은 경험주의자들의 질문에 '출처'란 권위를 댈 것이다. 경험주의자는 멈추지 않고 계속 질문할 것이다. "그 출처는 믿을만 한가? 그 출처의 원래 출처는 무엇인가?" 젠장, 출처가 '신문'이라면 우린 그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신문사에 전화를 해 기사의 본 출처를 알아내야만 한다. 잠깐, 그렇게 해서 정보의 '근원'을 알아냈다 하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경험론자는 질문을 계속 해야만 한다. 내가 건 신문사 전화가 과연 '진짜' 신문사 전화번호인가? 그 정보의 '근원'의 출처는 과연 믿을만 한가?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결국 이렇게 경험주의적으로 계속 질문을 이어 나간다면 우리가 직접 관찰할 수 없는 사실들은 결코 검증 될 수 없다. 근원을 찾아 내려는 과정 속에서 다른 종류의 검증된 지식이 동원되야 하기 때문에 결국 무한 소급에 빠져버린다.
이런 멍청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사실 위와 같은 작업은 완전히 상식에서 벗어나 있다. 어떤 주장에 대해 의문이 생길 경우에 정상적인 절차는 그 근원을 찾기 보다는 그 주장을 검증하는 것이다. 만약 독립적인 확증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린 근원에 대해선 신경쓰지 않고 그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다. 또는 모순된 증거를 발견한다면 우린 그 주장을 반대할 수 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지식의 근원을 찾는 것은 무익한 노력이란 것이다. 왜냐면 그 어떤 지식의 근원도 본질적 권위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기원의 문제가 아니라 타당성의 문제이다. 우린 다르게 질문해야 한다.
우린 어떻게 오류를 검출하고 제거할 수 있는가? 우린 어떻게 검증할 수 있는가?
내가 어떤 주장을 했을때 이렇게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알게 되었는가, 당신 주장의 근원이나 근거는 무엇인가" 난 이렇게 답할 것이다. "나는 그것에 대해 알지 못한다. 내 주장은 어쩌면 '짐작'에 불과 했다. 그러나 당신이 만약 내 주장, 내 해석에 관심이 있다면 그것을 엄격히 논박해 달라. 난 전력을 다해 당신이 내 주장을 논박하도록 도울 것이다."
정리하며 마치자.
- 지식의 궁극적인 근원이란 없다. 우린 정보의 출처보다는 사실 자체를 검토하는 것이 옳다. 또한 주장의 타당성을 검토해야 한다.
- 지식의 진보는 그 이전의 지식을 수정함으로써, 검증함으로써, 논박함으로써 이루어진다.
- 명석함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지만 정밀성이나 정확성은 그렇지 않다. 우리의 문제가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정확하고자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 2번을 반복해야겠다. 지식의 진보는 검증과 논박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