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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한 상실 - 해결되지 않는 슬픔이 우리를 덮칠 때
폴린 보스 지음, 임재희 옮김 / 작가정신 / 2023년 8월
평점 :
“이제야 어렵게 알게 되었다. 어떤 시는 각운을 맞추지 않고, 어떤 이야기는 명쾌하게 시작, 중간, 끝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 기분 좋은 모호함 (delicious ambiguity). (…) 아마도 나는 절대 두려움과 공황 증세를 완전히 통제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 하루하루를 통제하며 살아야 하는지 배울 수 있었다.” (273~2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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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기 전 여느때처럼 스크롤을 휘리릭 내리다 올해 초 전두측두엽치매(FTD)진단을 받은 브루스윌리스 부인의 기사를 보았다.
"WHEN THEY SAY THIS IS A FAMILY DISEASE, IT REALLY IS.” 알츠하이머와 달리 FTD는 언어능력을 상실하는 것을 시작으로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거나 식욕, 성욕 등에 과하게 집착하며 점차 기능을 잃는 병이다. 특별한 치료법이 없는지라 결국 가족들은 사랑하는 이가 인간성을 상실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해야한다. 환자가 환자를 낳는 과정이라 할 수 있겠다.
이 <모호한 상실>의 서평단으로 지원할 당시 나는 16년간 키웠다가 올해 6월 급작스레 세상을 떠난 고양이 보리에 대한 상실감이 내 안에 죄책감의 형태로 남아있었다. 이 우울과 자책을 애도의 다른 형태로 봐야할지, 상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애매모호한 상태로 봐야할지 몰랐기 때문에 더 적극적으로 읽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어떤 식의 종결이 없다면, 부재하는 자는 현재에 머문다.” (94쪽)
이 책은 읽을수록 상실의 형태가 단순히 죽음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사람들이 직면하는 상실 가운데 가장 많은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것이 모호한 상실 (49쪽)”이라고 말하며, 알츠하이머, 말기 암 등 질병으로 인해 곧 상실됨을 인정해야하는 상태, 실종 등 생존여부 조차 알수 없는 상태, 또는 이민, 이주 등 환경의 급작스런 변화에 따른 상태 등 완벽한 상실로 정의되지 않는 것들을 모호한 상실이라 정리한다.
📍“힘든 상황에서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불행한 상황들이 그들의 잘못으로 초래된 것이 아님을 안다면, 감정의 모든 변화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치료나 상담에 보다 덜 저항하게 될 것이다.” (157쪽)
모호한 상실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상반되는 감정의 충동을 경험하며 자신뿐 아니라 주변인 특히 가족들과 갈등을 빚는다. 과거에는 상실감을 우울 등으로 간주하여 ’치료‘를 하는데 중점을 뒀는데 작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총체적으로 환경을 고려하며 양가성을 인정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한다고 말한다.
📍“일단 가족들이 자신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모호한 상실로 인식하고 이름을 붙인 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불능 상태가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면, 부정을 방어 기제로 삼을 가능성은 더 낮아지고 중요한 결정들을 내릴 수 있는 가능성은 훨씬 커진다. 그들은 그들의 삶에 대한 통제력을 되찾고 앞으로 나아간다.” (188쪽)
작가는 *모호함을 완전히 없앨 필요는 없다고 한다. 긴 문장을 짧게 줄이자면 현실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돌파구를 제시해주는 것이 낙관주의와 현실적인 사고가 결합이라 할 수 있으나 소속된, 그리고 전문적인 공동체로부터 이해와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도 덧붙인다. (189쪽)
이 책은 40년 넘게 가족 스트레스 관리법을 기초로 하여 가족심리치료를 한 사례를 함께 제시하며 어렵게 느껴질 개념을 잘 이해시켜 준다. 나처럼 이미 상실을 경험한 이후 뒤따르는 감정을 해석하는데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상실이라 딱히 정의할 수 없는 모호한 단계에서 가족들과 갈등을 겪고 있는 이에게 더 나은 해답을 주는 책이라고 생각하였다.
보리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 뒤이어 13살 고양이 알콩이 역시 심장에 문제가 있다고 진단을 받았다. 검진을 다녀온 뒤 알콩이는 밥 먹기를 거부하기 시작했고 나는 매일 아침 사료를 갈아서 주사기로 먹이고있다. 보리가 죽은지 얼마나 됐다고 알콩이까지 이러나, 나는 주인자격도 없다고 한탄했다.
“현실을 직시하라.” 최근 나와 배우자는 이 책의 내용과 같이 또다시 우리에게 닥칠지 모르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받아들임이 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보호자로서 가족의 삶의 끝까지 최선을 다해 보살피는 것, 그것이 상실에 대비하는 자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