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훌 - 제12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57
문경민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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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추천 지수는 : ★★★★ (8/10점 : 이 정도의 온도를 간직하기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진짜로.)


할 일은 해야 했다. 설거지 같은 일이었다. 식탁에 밥 한 공기 더 올리면 되는, 딱 그 정도의 일이었다. (p.47)


서러웠고 치사했고 가슴이 뭉클했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었지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닥쳐 버린 모든 일이 그렇듯 이 마음도 어쩔 수가 없었다. (p.78)


누군가가 연우에게 "너 아침 먹었어? 뭐 먹었어?" 하고 물었을 때 연우가 "밥 먹고 왔지. 그럼 뭘 먹어?"하고 대꾸하게 해 주고 싶었다. (p.142)


고등학생 유리는 자신을 버리고 간 엄마 '서정희 씨'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열여덟 살 때부터 할아버지와 살던 유리에게 배 다른 동생 연우가 생기게 되는데요. 기본적인 생활 습관도 잘 갖춰지지 않은 연우를 돌보던 와중, 유리는 경찰로부터 연우가 엄마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연우의 몸에 난 아동학대 흔적을 발견하고, 자신과 비슷한 입양 가정의 학생을 만나게 되며 유리는 점차 과거를 훌훌 털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알아가게 됩니다.


첨예한 감정선으로, 차갑지만 따뜻하게

제12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문경민 작가님의 <훌훌>입니다. 상이라는 것이 작품의 품질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만, 8회, 10회 수상작을 워낙 재밌게 읽은 터라, 이번 수상작은 어떤 느낌일지 먼저 관심이 갔어요. 우선 이 작품은 <작가의 말>에서 확인할 수 있듯, 작가님께서 직접 입양 가정의 어머니를 인터뷰한 경험을 바탕으로 집필하신 소설인지라 등장인물들의 감정이 상당히 섬세했습니다.

특히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은 여러 자잘한 사건들을 겪으면서 주인공이자 서술자인 유리가 겪는 감정 변화가 굉장히 현실적이고 예리하다는 점이었어요. 233쪽에 서술된, 진실을 알게 된 후 유리가 느끼는 감정이 상당히 드라마틱하면서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이 이야기하는 '차가운 현실 속 따뜻한 애정'이 작품에 녹여내기 굉장히 힘든 것임에도 불구하고 유리라는 캐릭터의 성격과 어우러져 작품은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매력을 지니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대상화되지 않도록 주인공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어떤 소설이든, 작가는 자신이 소재로 차용한 현실이 독자들에게 대상화되는 일을 충분히 경계해야만 합니다. 여기서 '대상화'라는 말은 쉽게 이야기하자면 인간성을 고려하지 않고 하나의 상품으로 인식한다는 뜻이에요. 장애인이라는 용어를 장애우友로 바꾸고자 했던 옛날의 사례를 생각하시면 이해가 쉽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생판 모르는 남이 갑자기 나를 친구라고 부르고, 나를 돌봐주어야 하는 존재로 여긴다니, 그거야말로 대상화에 해당하겠죠.

이 작품에서는 그러한 대상화의 여지가 발생하지 않도록 작가님이 고민한 흔적이 보입니다. 다양한 처지에 놓인 인물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고 노력하면서, 불필요한 연민을 배제하되 그들이 받는 차별과 편견을 가감 없이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죽은 새를 주워 온 연우의 생각, 그리고 연우와 싸우던 와중 엄마 서정희 씨의 학대 장면을 떠올리며 연우를 끌어안고 우는 어린 주인공의 모습 등이 읽으면서도 인상 깊었습니다. 요컨대, 입양 가정의 학생들을 대하는 작가의 시선은 '돌봐줘야 된다'는 식의 부담스러운 동정도 아니고 '우리와 다르다'는 식의 차가운 손절도 아닙니다. 그러한 점에서 독자들이 적절한 거리에서 따뜻함을 지닐 수 있도록 이끄는 점이 아주 매력적인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외의 이야기는 '훌훌' 털어버리며 읽을 수 있나요?

유리와 연우, 그리고 할아버지가 품고 있는 각자의 사정과 그들이 서로 유대를 쌓아가는 과정은 이 작품이 이래서 대상을 수상했구나,라고 생각할 정도로 분명한 인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리네를 제외한 조연들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불필요하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조연들의 수가 적지 않은 탓에, 서사가 차지하지 않아도 될 공간까지 차지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더 인상적으로 그려질 수 있었던 주인공들의 이야기 농도가 다소 옅어지는 부작용이 있었습니다. 미희와 주봉이처럼 단순히 엑스트라 역할에 있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그렇다 하더라도, 주요 등장인물에 해당하는 세윤은 유리의 '거울' 역할을 해주고 있으므로 중요한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빈번하게 등장하고는 있지만 남는 이미지가 거의 없었습니다.

또한 연우 아빠, 고향숙 선생님과 같이 뭔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법한 사람들도 줄곧 등장합니다만, 그들은 기대했던 만큼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어 소모적으로 활용되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갈등의 전환을 야기할 것처럼 보였으나 손쉽게 퇴장하는 인물, 사정이 충분히 제시되지 않은 상황에서 명언을 날리는 인물 등을 사례로 들 수 있을 듯합니다. 스토리 구조를 불필요하게 복잡하게 만드는 인물들을 과감히 삭제하거나 플롯 자체를 정돈해서 인물들의 이야기를 보다 잘 드러낼 수 있었다면 좀 더 훌륭한 작품이 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을 긍정적으로 읽을 수 있었던 데에는 유리네 식구들의 서사가 그만큼 강렬한 인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유리가 엄마인 서정희 씨의 진실을 알게 된 후, 자신을 힘들게 하던 감정의 응어리들을 '훌훌' 터는 장면에서, 등장인물이 '용서'나 '원망'이 아닌 '애잔'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거리 유지가 정말 탁월하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네요. 그렇기에 더더욱 이러한 서사들에 집중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 또한 있었습니다.


"살아온 길이 저마다 다르니까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을 것 같아. 나는 그 사정을 알 수가 없잖니." (p.207)

고향숙 선생님이 이 말을 던지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아쉬움을 제쳐두고, 이 문장 자체는 작품의 주제를 담아내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문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 그대로 작중 등장인물들은 차가운 현실 속을 살아가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함부로 상대방의 삶에 대해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잔잔함과 따뜻함이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훌훌'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은 함부로 뜨겁게 굴지 않고, 잔잔하게 인물들을 사랑하는 방법을 제시해준다는 점에서 저희 서재가 인정하는 명작이었습니다.

#푸른여우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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