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원이 되고 싶어
박상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0월
평점 :
품절


추천 지수는 : ★★★ (6/10점 : 좀 더 높은 차원에서 쓰였어야)


그때, 그 눈물의 시간을 통해 무늬는 진심이라는 감정이, 사랑이라고 믿었던 어떤 형체가 실은 매우 연약하다는 진리를 배웠다. (p.85)


그럴 때면 그냥 다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고 생각해버리는 거지. 저 별도 지구도, 나도 그냥 다 점이다. 좆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p.121)


나는 이 소리 없는 이별의 신호를 내 업보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먹었다고 해서 쓸쓸한 기분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p.267)


상담사인 '나'는 '1004'라는 아이디를 쓰는 이로부터 디엠을 받고 자신의 10대 시절을 돌아보게 됩니다. '기이한 열정으로 들끓고 있(p.17)'던 2003년 밸런타인데이, '나'는 자신이 짝사랑하고 있는 남학생 '윤도'에게 초콜릿을 몰래 전하려던 와중 같은 학원의 '무늬'에게 들키고 마는데요. 비슷한 고민을 갖고 있는 둘은 각자의 이야기를 공유하며 학교 생활을 이어나갑니다. '나'는 점차 '윤도'와 가까워지는 한편,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태리'와 무언가 비밀이 있어 보이는 '희영' 등 다양한 인물들과 만나게 되는데.......


'그 시절' 10대의 감정과 삶을 섬세하면서도 담담하게

박상영 작가님의 <1차원이 되고 싶어>입니다. 소설을 읽고 가장 매력적이라고 느낀 점은 작중 과거에 해당하는 2000년대 전후의 현실을 밀도 있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었어요. IMF의 여파가 아직 남아있는 시대적 상황에서 주인공의 부모들이 느끼는 부에 대한 열등감, 동성애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 등이 어우러진 복잡한 현실이 MSN 메신저, 자우림의 '연인' 등 그 당시 유행했던 소재들과 어우러져 짙은 색채를 띠고 있습니다. 이렇게 깊게 묘사되는 현실 속에서 남들에게 이야기할 수 없는 비밀과 감정을 지니고 있는 주인공들이 서로 유대를 쌓는 과정은 독자들에게 충분히 짙은 인상을 남깁니다.

그러면서도 등장인물들의 감정과 이야기를 거창하게 얘기하지 않고, 최대한 담담하게 제시해주고 있다는 점이 또한 매력적입니다. 복잡한 현실에서 조금 더 자유로운 차원으로 벗어나고 싶은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잘 드러내는 문구가 제목인 '1차원이 되고 싶어'입니다만, 이러한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드러내는 데에 있어서 결코 1차원적이지 않은 배경과 인물 묘사는 굉장히 탁월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책을 읽고 나면 스쿠터에 탄 윤도의 옷에서 날리는 하얀 깃털을 '나'가 처음에 낭만적으로 느끼는 부분은 물론, 심지어는 단순히 식당에서 '나'와 무늬가 밥을 먹는 장면조차도 하나하나 생생하게 머릿속에 그려집니다. 이러한 점에서 작가님의 역량을 확인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다소 아쉬웠던 점 중 하나는 작가님의 담담한 문체가 소설이 지녀야 할 '치고 빠지는' 매력을 감소시키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작중에서 여러 반전들이 등장하지만, 특유의 조용한 서술이 해당 반전들을 임팩트 없게 만드는가 하면, 오히려 필요 없는 반전처럼 느껴지게 하기도 합니다. 무늬가 사모하던 언니의 동거인이 누구인지, 윤도의 책상에 초콜릿을 놓고 간 또 한 명의 정체 등 매력적으로 전달될 수 있었던 반전들이 이러한 담담한 서술에 묻히면서 개인적으로 많은 아쉬움을 낳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이 마음에 들었던 이유는, 우리가 흔히 과거의 일정 부분을 회상할 때와 비슷하게 해당 소설이 '그런 일이 있었다'는 온화한 느낌으로 조용히 전개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서술 방식이 실제 회상 방법과 비슷하다 보니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본인들의 10대 시절을 떠올려보면서, 등장인물들의 삶과 자신의 삶을 좀 더 쉽게 비교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1차원이 되고 싶어>는 고차원적인 현실을 세밀하게 묘사함으로써, 복잡한 현실로부터 단순해지고 싶은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보다 설득력 있게 전달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탁월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구원'에 찬 현실 속에서 '실패'를 이야기하는 모순

작가님은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은 실패의 기록으로 남을 것 같다(p.408)'고 이야기하신 바가 있는데, 개인적으로 여기서 언급하신 '실패'는 단순히 등장인물들의 심리에 대한 좌절에만 적용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인즉슨, 작중 서술되는 과거의 이야기는 다소 세밀하면서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는 데에 반해, 작품 중후반부의 이야기와 '현재'의 이야기가 비교적 엉성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맨 처음 등장하는 '과거로부터 온 편지 1'에서는, 상담사인 '나'가 유명세를 얻고 PD로부터 '살아갈 의지를 얻었다는 분들이 많습니다.(p.9)'라고 이야기를 듣는 부분이 짧은 분량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짧게 제시되는 '나'의 이야기는 뒷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다소 엉성하고 작위적으로 느껴져 초반부터 독자들에게 반감을 살 우려가 있습니다. 후에 수성못의 백골 사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본격적인 과거 회상에 들어가면서 작품의 장점들이 독자들에게 소설을 읽어나갈 이유를 부여하지만, 초반부에서 느낀 작위적인 설정은 중후반부의 전개에 있어서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우선 작품에 있어서 '나'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윤도라는 캐릭터의 활용을 먼저 지적하고 싶습니다. 후반부에 이 캐릭터가 주인공에게 어떤 말을 건넬지는 대충 예상이 갔는데도, 초중반에 보였던 대사나 인물이 풍기는 분위기와 달리 후반에 실제로 '나'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쏟아내는 윤도의 모습은 생각보다 다소 갑작스럽고 어색합니다. 윤도의 속셈이 드러나는 374쪽은 윤도라는 캐릭터가 결국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보다 주인공에게 좌절을 부여하는 것이 먼저 우선시 되었다는 느낌이 있어, 결국 '나'에게 좌절을 경험시키기 위해 윤도라는 캐릭터가 소설의 장치로서 급하게 활용되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너 진짜 게이냐?' 라는 말과 '넌 그냥 내 좆집이었어.'라는 말이 같은 인물에게서 나오는 것은 이상하니까요.

이렇게 '실패'를 급하게 주입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전후의 '나'의 행적도 초반의 설득력 있던 인물 전개와는 다소 멀어집니다. 과거의 이야기를 완독한 독자는 '나'가 수성못에서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 이후 '나'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여 약물 치료까지 받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서 '나'가 속죄의 뜻으로 품는 심리와 그 후의 행적은 안타깝다기보다는 이기적이라는 인상이 강합니다. 상대방이 등장하는 꿈을 꾸는 장면은, 자신이 끌어안고 있는 진실을 털어놓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자신의 죄책감을 해소하고 싶어 하는 심리가 기반에 있어 보입니다. 상대방이 행방불명된 상황에서 '내가 저지른 일이 언젠가 만천하에 드러날지도 모른다(p.337)'고 생각하는 모습 또한 그 예시입니다. 물론 그동안의 심리나 대화에서 느껴지는 어색함이 10대의 불안한 심리를 탁월하게 대변했기 때문에, 서술되는 '나'의 행적은 오히려 미숙한 10대의 심리를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나'의 철없음이 현재까지 이어지면서, 해당 작품이 전달할 수 있었던 여러 주제들이 설득력을 잃어버린다는 점입니다. 현재의 주인공은 자신의 죄책감을 원인으로 에세이를 써서 출간했습니다만, 이 행위는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에세이임으로 에세이에 등장할 주변 인물들의 동의를 어느 정도 구해야만 마땅합니다. 에세이를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자기 고백을 주제로 삼은 에세이는 상당히 낭만적입니다만, 그 속에 등장할 실존 인물들의 입장에서는 그 행위를 마냥 낭만적인 것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나'를 알고 있는 주변 사람들은 에세이를 읽고 그의 마음을 공감해주고 위로해주고 있기에 주인공이 지나치게 '구원'의 상황에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게 합니다. 심지어 태란의 경우 아무리 악행을 저질렀다고 한들 자신의 어머니가 에세이에 마음대로 쓰였음에도 오히려 '나'의 마음을 공감해주기까지 합니다.

즉, '나'는 자기 죄책감을 해소하는 방안으로 에세이를 출간했고, 우연한 인터뷰로 운 좋게 많은 사람들에게 살아갈 의지를 주는 데에 성공했으며, 운 좋게 자신의 에세이를 읽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위로를 받고,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를 저질렀음에도 운 좋게 상대로부터 재회의 의지를 듣습니다. '나'는 분명히 자신이 연모했던 대상으로부터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고 좌절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실패'를 담고 있습니다만, 실패 자체도 다소 급하게 주입되었으며, 그 점을 제외하고 보았을 때 현재 시점에서 '나'의 처지는 아무리 본인이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구원'에 놓여 있습니다. 이렇게 구원 속에서 실패를 이야기하는 모순을 끌어안은 채 어설프게 맺어진 결말은 충분히 전달되지 못한 현재의 이야기와 어우러져 작품의 주제를 분산시켜버립니다. 과거의 이야기만큼이나 현재의 이야기도 '구원'과 '실패' 중 방향을 확실하게 정하고 촘촘하게 써 내려갔다면, 아무리 '나'가 철없는 인물로 비춰진다한들 적어도 독자들에게 임팩트 있는 결말을 전달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우리 1차원의 세계에 머무르자. (...) 너와 나라는 점, 그 두 개의 점을 견고하게 잇는 선분만이 존재하는, 1차원의 세계 말이야.(p.130)"

작품에서 활용된 문자 내역, 미니홈피 글귀, 그리고 노래와 만화 등등을 접하다 보면 그 시절을 겪지 않은 사람마저도 해당 시기가 풍기는 어떤 향기를 느끼는 것이 가능합니다. 해 질 녘 노을과 초저녁의 푸른 하늘이 어울리는 이 시대에서 미숙한 등장인물들의 행동은 웃음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그들이 저마다의 사랑과 비밀에 좌절하는 모습은 독자들로부터 많은 공감을 얻는 것 또한 가능하게 합니다.

과거를 짙게 그려내는 것이 작가님의 장점이기 때문에, 그만큼 설득력 있는 현재를 그려내는 것 또한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보다 촘촘한 현재의 이야기를 통해 '나'의 이야기를 좀 더 설득력 있게 그려내셨다면, 적어도 4장 이후의 '나'의 대사와 행동이 1차원적인 속죄로 느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설프게 속죄하는 주인공은 때때로 속죄하지 않는 주인공보다 훨씬 큰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법입니다. 1차원적으로 살고 싶은 것이 우리 모두의 소망입니다만, 그럼에도 우리가 호감을 느끼는 대상은 보다 높은 차원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고민하고 궁리하는 인물일 것입니다.


추신 : 그리고 코멘터리 북은 완성도 높은 책에 대해 독자들이 열화와 같은 요청을 보내고, 거기에 대해 한참 시간이 지난 후 어쩔 수 없이 내는 것이 가장 적절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는 어쨌든 작품의 완성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현란한 마케팅은 작품의 완성도가 높을 때는 더욱 작품을 빛나게 하는 법이지만, 작품에 흠집이 나있을 경우 그것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기도 한다는 것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푸른여우의냠냠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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