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온의 간식
오가와 이토 지음, 권남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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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추천 지수는 : ★★★ (6/10점 : 중간부터 먹기 너무 힘들었습니다)


   ★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내가 정하지 못하잖아. 그래서 죽을 때까지는 살 수밖에 없지." (p.120)

 

   ★  내 목표는 그럼 안녕, 하고 손을 흔들면서 밝게 죽는 것이다. 호탕하고 씩씩하게 웃는 얼굴로 저 세상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p.147)

 

   ★  "시즈쿠 씨는 아까 혼자 살아왔다고 하셨습니다만,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존재가 지금도 시즈쿠 씨를 이끌어주고 있을 것입니다. 무색투명해서 평소에는 알아차리지 못하겠지만요." (p.183)

 

   삼십 대의 나이에 말기 암으로 죽음 앞에 놓인 우미노 시즈쿠는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한 끝에 호스피스인 '라이온의 집'으로 향합니다. 푹신한 머랭 쿠키를 닮은 레몬 섬 위의 호스피스에서, 시즈쿠는 똑같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다른 손님들과 조우하면서 조금씩 죽음으로 들어서는데요. 자유롭게 지내는 것이 유일한 규칙인 이곳에서는 특이하게도, 추억의 간식을 호스피스의 운영자들이 직접 만들어 다른 손님들과 공유하는 간식 시간이 존재합니다. 여러 손님들의 마지막을 경험해나가면서, 또 다양한 사람들의 추억과 간식을 공유하면서, 시즈쿠도 점차 마지막의 순간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이런 죽음만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간식처럼 푹신푹신하게

   드라마로도 방영된 바 있는 오가와 이토의 <라이온의 간식>입니다. '간식'이라는 어감이 주는 포근한 인상처럼, 이 책도 '죽음'이라는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주제를 가벼우면서도 따뜻하게 다루고 있는 전개가 인상적입니다. 손님들이 저마다 지니고 있는 사연들과 그에 연관된 간식들도, 다채로우면서 너무 화려하지는 않게 묘사되고 있어 독자들에게 산뜻한 느낌을 줍니다. 다 읽고 난 다음에도 작품이 주는 특유의 분위기가 이따금 힘든 순간에 생각이 날 정도로 인상적입니다. 세상에 이런 죽음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로 푹신푹신한 소설입니다.

 

   지나치게 달달한, 그래서 다 먹기에는 거북했던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은, 죽음에 대한 '상상'은 세밀하게 설정되어 있으나, 실제 죽음에 대한 '반영'은 엉성하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그렇기에 현실과 동떨어진 죽음이라는 느낌이 푹신푹신한 이 소설을 거북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감정이 단순히 국적의 차이에서 비롯된 감성의 차이 탓인지, 아니면 제가 책을 잘못 읽은 탓인지 다른 분들의 비평을 찾아보던 와중에 일본 서평을 몇 개 찾아보았는데, 실제 암을 겪고 계신 분들 중에서 이 책에 대한 서평을 남기신 분들이 몇 분 계시더라고요. 

   '죽음은 이런 식으로 될 수 없는 겁니다.'

   그중에서도 이 문장이 상당히 인상에 깊게 남았습니다. 물론 모든 작품들이 죽음을 현실적으로 반영해야 하는가, 우리가 실제로 친지의 사고나 장례식을 겪으면서 보았던 현실적인 죽음의 모습을 소설에서까지 목격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주실 수 있을 듯합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저도, 모든 책들이 리얼리즘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실제로 타인의 죽음을 겪고 이 책에서 위로를 받았다는 분들도 다수 계시고, 저는 자신과 타인의 죽음에 대해 느끼는 감상이 저마다 다르듯, 책에 대한 감상도 저마다 다른 것이라고 이야기할 뿐이에요.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이 책은 현실에서 벗어나 작가 개인의 상상에 지나치게 치우쳐진 전개가 눈에 띕니다. 그래서 작중 묘사되는 푹신한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흡수되는 한편, 전개가 상당히 거북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는 시즈쿠가 거의 마지막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아버지(정확히 이야기하면 자신을 돌봐준 외삼촌)가 호스피스에 찾아오는 부분부터 확인할 수 있는데요.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시즈쿠에게 아버지는 결혼한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고즈에를 소개합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여동생이 생긴 시즈쿠는 고즈에와 마주하게 되고, 그 자리에서 '만약 내가 어제 죽었더라면 이렇게 아빠와 고즈에를 만나지도 못했을 것(p.245)'이라면서 삶에 대한 감사 인사를 건넵니다. 이전부터 섬에서 만난 지 얼마 안 된 다히치 씨에게 '얼굴을 갖다 대고 키스를(p.103)' 하고, 다히치 씨가 또 긍정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다시 이야기하자면 등장인물들이 지나치게 상냥해 보이는 장면들이 몇 번 등장한 바 있는데, 그것이 이 부분부터 다시금 문제시됩니다.

   작중에서 주인공은 아빠의 결혼 소식을 듣고 일종의 배신감을 느끼고 독립한 상황에서 암에 걸린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생의 거의 마지막에 다다른 그녀에게 아빠 결혼한 사람과 낳은 여동생을 소개하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고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뿐입니다. 또 거기서 시즈쿠는 본인의 입장에서는 갑작스럽게 여동생이 생긴 미묘한 상황임에도 삶의 의지를 얻고, 삶에 대해 감사하게 된다는 점에서 지나치게 상냥해집니다.

   다소 작위적인 이 부분은 긴 에필로그에서도 이어집니다. 시즈쿠의 죽음 이후 집으로 돌아온 아빠는 식사 도중에 자꾸 시즈쿠의 애칭인 '시짱'을 언급하며, 시즈쿠와 있었던 이야기를 사실상 그녀와 거의 관련된 경험이 없는 아내와 고즈에에게 계속 이야기합니다. 고즈에의 입장에서 식탁에서 밥을 먹고 있는 독자들은 옆자리에서 자꾸 시즈쿠의 이야기를 꺼내고, 시즈쿠가 좋아했던 푸딩을 꺼내며 "시짱, 이렇게 꺼내주면 기뻐했어.(p.283)"라고 이야기하는 아버지로 인해 거북해집니다. 거기에 고즈에가 시즈쿠의 환상을 보고 둘이 꿈에서 초원을 달리는 장면도 솔직히 부담스럽습니다. 고즈에의 입장에서 시즈쿠는 아버지가 지나치게 과거 이야기를 풀어서 알고 있을 뿐이지 실제로는 딱 한 번밖에 만난 적 없는 이복언니입니다. 설령 고즈에가 아이들 특유의 선한 마음으로 시즈쿠에게 공감한 것이라고 해명하더라도, 그것은 아버지가 건넨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일종의 '강요된 공감'이므로 독자 입장에서 그것을 마냥 즐겁고 감동스러운 이야기로 여기기는 조금 버거웠습니다.

 

   삶과 죽음을 '보여줄' 수 있었으나, 그냥 '말하는' 소설이 되어버린

   '나는 행복해.'라는 말을 누가 묻지 않았는데도 입으로 내는 사람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저는 개인적으로 그 상황이 행복한 상황이 아니라면, 애써 자신의 불행을 감추기 위해 행복을 입밖에 내는 것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우리가 말을 안 해도 이미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 행복이라든지 삶이라든지 죽음이라든지 하는 것들을 구태여 입 밖으로 내는 순간 그것은 굉장히 이질적인 것이 되어버립니다.

   소설은 논설문이 아니기 때문에, 소설이 해야 하는 일은 '보여주는' 것이지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과 죽음에 대해 다루는 소설은 그것을 살아 있는(어떨 때는 죽어 있는) 사물과 사람을 적절히 조종해서 보여줘야 합니다. 독자들은 그것을 토대로 자기 나름대로 주제를 찾고 교훈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삶과 죽음을 '보여줄' 수 있는 소설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등장인물이 직접 주제를 '말하는' 이질적인 글이 되어버렸습니다. 아빠와 고즈에의 이야기를 단순히 소설의 오점으로 넘길 수 없는 이유가 이 책이 품고 있는 '말하는' 특성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시로, '그런 아무것도 아닌 일상이 이렇게 소중해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p.164)'고 삶을 회상하는 장면이나, '그 사실을 그저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열심히 사는 게 인생을 완수하는 것이다(p.176)'라고 모모의 인생까지 멋대로 자신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주인공의 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 혹은 작가 개인이 생각하는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이 독자라는 타인에게 가닿을 수 있으려면, 작가는 삶이라든지 죽음이라든지 하는 얘기를 적어도 단정적인 투로 이야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즈에를 만난 주인공이 '신이여, 고마워요!(p.245)'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은 여러 단점들이 한꺼번에 드러나면서 종교가 없는 사람이 세례 장면을 목격하는 듯한 상당히 이질적인 느낌을 줍니다. 기적적으로 다음 간식 시간까지 살아서 선생님에게 자기 얘기를 하는 시즈쿠의 모습도,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위해서 멋대로 주인공을 죽였다 살렸다 하고 있다는 인상밖에는 들지 않았습니다.

 

   '물론 죽음에 관한 글은 어디까지나 산 자의 죽음에 대한 상상이나 희망 사항에 지나지 않는다.(p.310)'

   옮긴이의 말은 예상치 못하게 이 글의 전반적인 내용을 꿰뚫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작가가 어디까지나 산 사람의 입장에서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상상한 이 책은, 여러 간식들이 주는 포근함과 마찬가지로 독자들에게 푹신푹신하고 따뜻한 감정들을 전달하는 데에는 물론 성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사람들의 다채로운 삶과 죽음에서 지나치게 동떨어진 상상의 영역은 오히려 현실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운 좋게도 서로의 마음에 드는 행동만 하고 그 의도가 다 긍정적으로 통하는, 이런 상냥한 삶과 죽음만 있다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다만, 현실에는 보다 다채로운 관계들과 대화들이 있고, 서로의 의도가 엇나가는 경우들 또한 다수 존재합니다. 딸이 당연히 이해해줄 것이라 생각하고 아빠가 멋대로 결혼을 진행한 책 속의 사례 이외에도 말이죠.

   그리고 이 책은 그런 엇갈리는 현실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출간된 책입니다. 그렇기에, 작가가 등장인물을 가지고 인형놀이를 하는 데에서 오는 비현실적인 달달함은, 저로서는 도리어 쓰다고 느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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